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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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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다니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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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그녀와의 마지막 카톡이 무려 8개월 전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형식적인
카톡을 용기까지 내어 보냈다. 그리고 역시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어쩌면 다음 카톡까지의 텀은 더 길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한달,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카톡을
보내왔다.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오빠!"

간만에 만난 연주는 조금 살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어떠랴. 스물 한 살 나이가 가진 힘은 위대한 것이다.
이미 충분히 귀여웠다.

"오늘 디게 이쁘게 하고 나왔네?"

웃으며 인사하자 그녀는 얼굴을 매만지며 "빈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 오빠 밖에 없어요" 라며 좋아라
한다. 빈 말에 인색한 그녀 주변의 남자들이여…

갑자기 추워진 날씨, 연주의 손을 자연스레 잡으며 까페로 인도하고 싶었지만 역시 시간적 거리가 가져온
심리적 장벽은 결코 낮지 않다. 코트 주머니에 꽂혀있는 그녀의 손을 보며 마음 속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

"오빠는 요새 어떻게 지냈어요?"
"직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길어"
"우, 최악이다"

길거리에 수많은 까페가 있지만 이미 자리가 없거나 분위기가 별로 아늑하지 못했다. 매의 눈으로 스윽
훑어보다가 겨우 그나마 한 군데를 지목했다.

"저기가 좋겠다"

탑 클래스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하며 작년에 새로 런칭한 커피 프렌차이즈. 우리는 안에 들어섰다.



훈훈한 까페 안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 1년 간의 이야기부터 요즘의 이야기, 내일의
이야기, 너무 간만의 만남이라 '이 이야기를 했었던가?' 싶어서 꺼낸 화두에 대한 재공감, 요 근래에 본
영화 이야기, 여행 이야기, 다시 직장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록금에 대한 고민 등등.

대화의 내용은 흔한 대학생 동생과 직장인 오빠의 이야기였지만, 불과 1년 사이 그녀는 많이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많이 세련되진 패션, 뽕인지 어쩐지 나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 가슴, 살이 조금 올라 부해지기는
했어도 젖살이 빠져 많이 오목조목해진 얼굴, 여전히 새하얀 피부, 언제나 매력적인 시원한 웃음…

"나 오늘 오빠가 사준 립스틱 하고 왔는데"

빨리 '어른' 되라고 생일 날 사준 맥 리커블 컬러 립스틱. 처음 바르고 왔을 때는 그렇게나 어색해보이
더니 오늘 보니 또 잘 어울렸다.

"그게 아직도 남아있었어?"
"특별한 날에만 했으니까요. 아직도 거의 그대로에요"

흐, 사실은 좀 더 자주 써주기를 바랬는데. 아니면 누가 대신 먹어주기라도 하던가.

"그 립스틱 먹어줄 사람 못 찾았어?"

잠시 내 말 뜻을 이해 못하고 어리벙벙하던 그녀는 곧 내 말 뜻을 이해하곤 "아! 우리 과가 원래 그래요.
연애하기 힘들어요 맨날 과제 때문에!" 하고 웃으며 너스레를 쳤다. 난 픽 웃고는 "1학년 갓 끝난 주제에
무슨 엄살이야. 너 그러다 3학년에는 어쩌려고" 하고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솔직히 그녀가 연애를 못 했다고 하니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뮤지컬 이야기, 영화 이야기, 요즘 본 전시 이야기 등을 나누고는 식사를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녀에겐
이미 클래식'에 해당하는 10년 전 작품들 이야기를 하노라면 갸우뚱 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나이차, 세대
차이를 실감하지만…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해서 그래도 이미 고딩 때부터 남다른 정보력과 각별한 관심을 뽐내던 그녀였던 터,
연주가 요즘 관심을 갖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또 흥미로웠다. 이윽고 그녀가 보여준 몇 장의
습작 그림을 보며 새삼 그녀의 작품들에 감탄했다.

잘 그린다 못 그린다를 떠나서 정말이지 그녀의 작품 세계는 이미 기성 작가들 뺨치는 뭔가 다른 특별한
느낌이 있었다. 만약 연주에게 든든한 '백'만 있다면 벌써 어디가서 천재 소리 들으면서 전시회 열고 뭐
그러고 다녔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도 음식점. 언젠가 혜선이에게 고백하던 날 함께 왔던 가게다. 단순히 기억의 미화인지, 그 날이 너무
특별했던 날이라 맛까지 그렇게 느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는 그저 그랬다. 그래도 아직 어린
그녀에게 가게의 분위기는 제법 특별했던 모양이다.

"여기 맛있는 것 같아요. 분위기도 좋고"
"나도. 난 하나 더 먹을까?"
"네! 좋아요. 아 근데 저 너무 많이 먹죠? 미안해요"
"아휴, 너만큼도 안 먹으면 영양실조지"

내 말에 괜히 빵 터진 그녀는 고딩 같은 식성으로 열심히 그릇을 비웠다. 그게 참 보기 좋았다. 잘 먹는
그 모습이 흐뭇했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연주의 손을 잡았다. 아까 카페에서 봤을 때
새삼 발견한 그녀의 조금 못생긴 손. 그랬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의 못생긴 손이 컴플렉스라고 했다. 하
지만 솜씨 좋은 그녀의 손은 내 손 안에서 이미 그 어떤 손보다도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오빠 이제 우리 어디가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뭘 더 먹기는 부담스러웠고, 가볍게 술이나 한잔 할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술 못 먹는
그녀.

"너 요즘도 술 못 마시니?"

그러자 "못 마시는건 아닌데요…" 라더니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 그랬지.

커피 대신 핫초코, 술 대신 아이스크림, 구두 대신 운동화… 아니 오늘은 힐을 신었지만.

"그럼 아이스크림 먹으러가자"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우리 영화 볼래요?" 하고 다른 제안을 해왔다. 나쁠 거 없지.

"좋아"
"그럼 가요, 저기 DVD 방 있네요"



순간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영화관이 아니라 DVD방이라니. 그러니까…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그녀는 아직 버진. 순수한 의미 그대로 버진.

'DVD방에 함께 가는 남녀'가 갖는 또 다른 의미를 그녀에게 대입하기에는 조금은 아귀가 맞지않는 부분
이 있었다. 물론 그래도 벌써 그녀도 알 거 다 알만한 나이고 대학교 1년이 지났으니 그 사이 '많은 것'을
배웠을테니 정말 '버진'이라고 해도 내가 뻘스러운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그녀가 꼭 저 닮은 지 친구들과 함께 정말 순수하게 영화만 보고 온 기억을 떠올려서
정말로 '영화보자'라는 의미에서 한 말은 아닐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를 남자가 아닌 정말로 아는 오빠,
레벨로서 함께 DVD방에 가도 별 일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것일까 등등등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또 다른 생각으로는 '이 나이 먹고 DVD방에서 거시기도 좀' 하는 생각과 '얘는 대학생인데 뭐' 하는 또
다른 앞선 단계의 생각, '남녀가 함께 DVD방 간다고 이상한 생각하는 내가 촌스러운건가? 요즘 트랜드
는 그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지나갔다.

물론 여러 가능성과 선택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저 아는 척 모르는 척 옳거니! 하고 함께 들어가서 좋은 일
은근히 기대하는게 가장 좋은 것이라 생각했기에 위에 언급된 많은 가능성을 단 0.5초만에 빠르게 정리
하고 나는 "좋아" 라는 답변을 제시했다.



…DVD방에 도착하자 혼자 머릿 속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게 조금 민망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열심히
볼 영화를 골랐다.

난 혼자 픽 웃고는 그녀가 고른, 이미 다른 여자애랑 극장에서 한번, 또 다른 여자애랑 언젠가 DVD방에서
다시 한번 본 영화에 "오 그거 재밌겠는데?" 라는 리액션을 취해주었다. 그리고는 녹차 음료를 하나 샀다.

연주를 보며 "혹시 미성년자 아니시죠?" 라고 물어보는 가게 주인의 물음에 난 또 한번 속으로 웃었다.



함께 나란히 누워서 영화를 보았다. 두 번이나 본 영화를 세번째로 보려니 지루했지만 그래도 은근하게
보는 재미는 있는 영화. 그리고 계속 옆의 그녀가 의식되었다.

어느 틈엔가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 뿐이었다. 무슨 사춘기 첫 사랑을 시작한 소년이라도 된 느낌으로 난 그저 손에서 땀이 나도록
그렇게 손을 잡고만 있었다.

'왜 그래 임마'

시간은, 영화는 또 왜 그렇게도 빨리 흘러가는지.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반은 본 것 같다.

"물 마실래?"
"네"

평소 같았으면 이미 물고 빨고 뽕 뽑았을 테지만 왠지 이상할 정도로 어색하고 어려웠다. 너무 오래,
그리고 너무 어릴 때부터 그녀를 지켜봐서였을까.

그녀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하던 시절부터 종종 맛있는 것 사주고, 같이 영화 보고…당연하다면 당연할
이야기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무슨 키다리 아저씨처럼 말이다.

비싼 음식 사멕이고 영화 보여주고 함께 카페가고, 전시회도 데려가고 공연도 보여주고. 당시의 나
조차도 '왜?'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이 어려울 정도의 투자 아닌 투자. 여고딩의 쌓일대로 쌓이는 스트
레스를 종종 그렇게 실컷 먹여주고 보여주며 풀어주고는 9시 10시를 전후하는 시간이면 얼른 집에다
데려다주고. 그랬다.

어린 그녀에게 일찍부터 보였던 예술적인 재능, 그리고 종종 그녀를 통해 엿보이는 그녀 부모님의 높은
교양 수준…그녀는 왠지 나중에 예술적으로 성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무슨 후원자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것일까. 라고 하기에는 좀 이유가 궁색한 듯 한데.


"오빠도 마셔요"

혼자 개 뻘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느껴지는 순간의 공기. 그녀도 나를 의식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마치… 아니 꼭, 어떤 여자와 첫 관계를 맺으러 모텔에 들렀을 때 '그 모텔 냄새'가 코 언저리
에서 아직 맴도는 사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꺼내는 여자의 첫 마디 같은 그 미묘한 떨림이 존재하는
한 마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 씨발, 혼자 무슨 뻘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난 연주가 내민 미니 패트병을 받아들고는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향했다. 물론 그녀의 시선도 곧 내 눈을
따라왔고, 난 가벼운 콧바람과 함께 내가 선물한 립스틱의 첫 시식자가 되었다.



"영화 재밌었죠?"
"후반부는 잘 기억이 안나네"

내 너스레에 연주는 짖궂다며 웃었다. 다 합쳐서 거의 10분은 키스를 했지 싶다. 그러나 '그 이상의 단계'
까진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대규모 폭파씬에 이은 숨막히는 클라이막스, 그리고 "오빠 우리 영화 좀만
더 봐요" 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은 그녀의 말.

그리고 나지막하게 "미안해요. 저 처음이라서… 너무 떨려서, 미안해요" 하고 솔직하게 그녀의 떨림을
설명한 그녀.

DVD방을 나와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난 흘낏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반. 이제부터는
직설적으로 묻기로 했다.

"오늘 꼭 들어가야 돼?"

그리고 의외로 곧바로 튀어나온 대답 "아니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난 서둘러
머릿 속으로 근처의 시설 괜찮은 모텔 위치를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키다리 아저씨의 결말도 비슷했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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