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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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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게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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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처음부터 외모나 스타일 따윈 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뭘 보냐고 묻자, 픽 웃은 그는 대답했다.

"아저씨는 이미 합격이에요"

사실 첫 인상부터 좋았다. 나보다 아홉살이나 어린 애고, 처음 보는 사이인데다 별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
할만한 건덕지도 없었으며 심지어 외모의 클래스도 나보다는 녀석이 훨씬 위였다. 그래서 머리로는 당연히
안 되겠거니 했지만 왠지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더니만 "나같은 꼰대는 영 좀 그렇지?" 하고 머쓱해하
는 내 질문에 대단히 쿨하게 "합격"을 외친 그. 이 무슨 운수 좋은 날이란 말인가.

배부른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는 저녁 대신 아이스크림으로 때우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조금은
황당했지만 솔직히 신선했다. 그러자고 했다. 함께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손에 들고 걷노라니 웃음이 피식
피식 났다.

"의외로 좋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하는 황당함에 터진 너털웃음이었지만 그는 아이스크림 식사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줄 알고 꽤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좋아라 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깨기 싫어서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자 그가 내 등을 툭 쳤다.

"이래서 오케이 한 거에요"

그의 기준을 살짝 알 듯 모를 듯 했다.

영화라도 보러갈까, 하고 제의했지만 그는 피곤하다며 자기 집으로 날 초대했다. 만난지 불과 4시간만에.
그의 작은 다섯 평짜리 원룸에서 우린 같은 이불을 덮고 맥북에어 1세대를 펴놓고 함께 영화를 봤다. 나도
영화라면 꽤 많이 본 편이지만 그와 함께 본 영화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본 영화였다. 감독 이름도.

"이 옷 이쁘죠?"

그는 두툼한 체크 남방이 잘 어울렸다. 벼룩시장에서 6천원에 산 옷이라고 했다. 아주 마음에 든단다. 난
하나하나 그에 대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했다. 그리고 정리했다.

이름 한준우. 스물 한 살,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혼자 살기 시작한지 4년차, 영화를 전공하던 대학교는 작년
가을에 관두었고 싱글이 된 지는 반 년이 조금 넘었단다. 홈페이지 제작 알바로 연명하며, 오늘따라 너무나
심심해서 간만에 일대일 채팅방에 들어갔는데 딱 이야기 하는 모양새가 만만한 꼰대같아서 오케이 했단다.

"최소한 밥 한 끼 살 돈은 있을 것 같고, 음흉한 생각이야 수시로 하지만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없고, 갑자기
말도 안되는 미친 짓 할 정도의 또라이나 쓰레기도 아니고… 뭐 그 정도면 충분해요"

그러니까 뭐에 대해서 충분하냐는 것이냐고 다시 묻자 "잠깐 만날 남자친구"라고 쿨하게 대답한 그. 순간
그 말에 화를 내야하나, 아니면 애써 쿨한 척 어깨라도 으쓱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난 그저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멍하게 있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그는 거침없이 물었다.

"뽀뽀해도 되요?"

답변을 듣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을 가볍게 깨물 듯 포개었다. 흔한 향수 냄새나 샴푸 냄새 대신, 젊고
어린 애들 특유의 기분 좋은 체향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그 가는 눈으로 똑바로 내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내 입술을 잘근잘근 씹을 때까지도 그저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블라인드를 내려놓은 창 덕분에 아직 5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희미하게 비치는
해질녘의 검푸른 빛에 어렴풋이 알몸이 된 그의 어깨선이 비쳐보였다.

"아저씨 생각보다 잘하네"

아홉살이나 어린 꼬맹이의 칭찬 어린 평가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저씨 전의 아저씨들은 다 디게 못했거든요"

난 대답할 말을 찾다가 병신같은 대답을 했다.

"아침에 마늘 구워 먹었거든. 반찬 대용으로"

그리고 그 말을 기점으로 대화가 변했다.

"반찬으로 마늘을 구워 먹어요?"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만한 재료가 없더라고. 마늘 밖에. 그냥 구운 마늘은 그 자체로 고소하니까. 그래서
밥에다 먹었지"
"아저씨 식성 대박이다. 무슨 구운 마늘을 반찬으로 먹어. 나보다 더 이상해"
"너나 나나"

그리고 그 즈음해서 한 30분 만에 재장전이 완료되었다. 나도 거의 2년 만이다. 그것도 이런 색기 어린 영계
라니. 욕정이 들끓어 오르는게 당연했다. 난 다시 한번 그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둘이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비좁은 화장실에서 함께 샤워를 하고 다시 그 언제 빨았는지 기억이
없다는 이불 위에 누워서 오징어를 씹으며 노트북으로 TV를 보았다.

"디게 좋다"
"뭐가"
"간만에 다른 누구랑 이렇게 함께 누워서 TV보니까"
"친구 없어?"
"아저씨도 친구 없대면서요"

어느 틈엔가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쓰는 그는 내 팔에 머리를 베고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 역시
갑자기 찾아온 이런 행운에, 그리고 간만에 누군가와 함께하는 토요일 밤이라 기분 좋았다. 그는 물었다.

"한달에 얼마나 벌어요?"

내가 너에게 구라나 허세를 피울 이유가 없지.

"세금 떼고, 한 230만원 정도"

그러자 그는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난 아저씨 딱 보고 120이나 받나 싶었는데"

나도 웃었다.

"시급만 따지면 비슷할거야. 그리고 사실은 저번 주에 관뒀어. 나 백수야"
"대박"

어느새 10시가 넘었다. 그는 음악을 틀었고 흥얼거리며 스케치북을 펴곤 그림을 그렸다. 보지도 않고 홍대
거리 풍경을 그려내는데 그 느낌이 꽤 그럴 듯 했다.

"너 그림 잘 그린다"
"영화 전공 안 했으면 저 미대 갔을걸요? 근데 학원 다니기 싫어서 안 갔죠"
"나중에는 뭐 해먹고 살려고"
"글쎄…POP 같은 거라도 그려서 연명하려나?"

미래를 그리지 않는 삶. 하기사 나도 월 30만원 적금 붓는거 빼면 무슨 놈의 미래인가. 누워서 잠이 들기 직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보통…얼마나 사귀었어?"

솔직히 두려웠다. 꿈같은 행운이지만, 그래서 더욱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머지않아 잃을 것이
분명한 행운. 그래서 두려웠다. 얼마나 이 행복을 더 이어갈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함께 했으면 좋겠다"

난 속내를 털어놓았다. 녀석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래가긴 힘들겠죠…"

왜 오래 갈 수 없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잘 알 것 같았다. 난 이유를 묻는 대신
그저 눈을 감았다. 그래서 녀석을 품에 안고 있는 이 느낌을, 이 기분을 뇌리에 새기기 시작했다.

'다음 번'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못나고 매력없는 게이에게 한번 한번의 사랑은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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