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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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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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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종 4년, 나이 서른여섯에 벌써 별좌 자리에 오른 하평 차씨 13대손 차 아무개는 위로는 영의정과 동지사,
좌찬성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계자로, 본인도 그 인품이 덕이 있으면서 절도가 있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
하며 밖으로는 자애로운 나라의 관원이자 안으로는 자상한 지아비로서 그 능력과 됨됨이가 참으로 훌륭한
군자 중의 군자라 할만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미 진즉 나이 스물 하나에 역시 명문가 고단 한씨 가문 둘째 딸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그 이후로 무려
15년에 이르도록 손을 잇지 못하고 있었으니 이는 가문에 큰 죄요, 한 사내의 미완이라 할 수 있었다.

차 아무개가 과거에 급제한 것도, 이름만 드높았을 뿐 쇠하여 가던 가문의 기가 흥하게 된 것도 모두 한씨가
시집을 온 이후였으니 칠거지악의 형을 면할 수 있었고 고단 한씨 가문을 보아서라도 감히 그녀를 내칠 순
없었지만 이제는 슬슬 집안 어르신들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른 상황이었다.

급기야 가문의 중종에서 차 아무개의 중신을 직접 주선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야 비루한 가문에, 그것도 후실 자리에 귀한 딸을 보낼 반가가 존재할 리 없던데다 그에 반해 워낙에
차씨 집안 중종의 눈이 높아 별 실속이 없었지만 차 아무개가 젊은 나이에 별좌 자리까지 오르자 서서히 사
정이 달라졌다. 한씨 가문 또한 10년이 넘도록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는 그 무거운 죄에 대하여 더이상은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운 지경이 된데다 차 아무개 또한 가문의 압박과, 위아래에서 쏟아지는 '어디에 문제
있는 것 아니냐' 라는 시선 때문에라도 더이상은 원앙의 예(禮)을 논할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하야 차 아무개가 곧 후실을 들이는 것이 기정사실이 된 마당에 한씨 부인에게 한줄기 빛이 내렸다.







치성







며칠 전 한씨 부인의 친정에서 가마를 보내왔다. 한씨의 어머니가 중한 병에 걸렸단다. 출가외인의 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나 너무나 애절히 딸을 그리는 부모의 마음이 안타까워 큰 실례를 무릅쓰고 이리 가마를
보낸다고 직접 외숙부가 오셔서 시부에게 간곡히 말을 올렸다. 시부 역시

"허어, 큰일입니다. 사부인께서 병을 얻으셨다고 하니 어찌 제가 모질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가야,
얼른 너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 병 나으실 때까지 이 집 일일랑 생각치도 말고 밤낮으로 어머님을 보살펴
드리도록 하거라"

라며 쾌히 귀가를 허하였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외숙부는 아녀자가 오래 시댁을 떠나 있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반드시 백일이 이르기 전에 그녀를 돌려보내겠다고 약조하였다. 어머니가 위중하시다
하는데 어찌 그리 기한을 딱 정해놓는가, 싶어 서운하던 한씨 부인이었으나 언뜻 달리 생각해보니 너무
오래 집을 비우면 그렇잖아도 후사 문제로 말이 많은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것을 염두한
외숙부의 배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둘러 짐을 싸 황망히 집으로 향하는 가마 안에서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그칠 길이 없었으나 외숙부가
그 훌쩍이는 소리를 듣고는 가마 곁에서 조용히 말했다.

"울지 말거라"

외숙부가 하인들과 함께 들고 온 가마가 향한 곳은 중평의 고향집이 아니라 집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충도의 당악산이었다. 그나마도 산 초입에 이르러서는 가마꾼도 가버리고, 숙부의 인도를 따라 산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은아, 듣거라"
"예"
"나는 네 어머니의 명으로 이곳까지 너를 데리고 온 것이다. 네 아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산에는
미륵을 모시는 당금사가 있다. 그 당금사에 딸린 작은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너와 같은 처지의
많은 부인네들이 밤낮으로 불공에 치성을 드려 큰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구나. 너 역시 그곳에서 당분간
머물며 소원을 반드시 이루도록 하거라. 그리하여 네 서방와 가문에 아이를 선물하고 너 역시 당당하게
두 발 쭉 뻗고 살거라"
"네, 외숙부님"

당혹스럽고 황당한 이야기였으나, 오죽 딸이 딱하였으면 어머니가 그런 걱정을 다하셨을까 싶은 한씨
부인은 새삼 또 어머니 생각에 눈물만 솟았다. 산 중턱에 올라 저 산 밑을 내려다보니 고향집 떠나오던
생각이 나 가슴이 죄어왔다.

"내 이미 말은 다 해놓았으니 부디 몸 건강히 잘 지내거라"

외숙부는 암자까지 그녀를 인도하곤 그저 백일이 되기 전 돌아오겠다는 말 한 마디와 함께 곧바로 하산
해버렸다.



"아미타불. 말씀은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예, 스님"

당악산 입구의 당금사를 지나 심유곡 안쪽으로도 한참을 들어가야 되는 작은 암자. 이 심산유곡의 작은
암자에서 앞으로 한씨 부인은 정확히 백일간 밤낮으로 치성을 드리게 될 것이다.

"비록 이 곳이 좁고 낡아 누추하지만, 산이 바르고 잡인의 오감이 드무니 오로지 이루고자 하시는 것만을
생각하며 불공을 드리시면 반드시 부처님이 그 성취를 도우시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암자의 규모는 정말로 작았다. 스스로를 무명이라 일컬은 스님이 거쳐하는 사랑채 하나에 불공을 들이는
안채, 당분간 한씨 부인이 묵을 행랑채, 그리고는 뒷간이 전부였다. 변변한 목간도 없는 수준이었다. 평생
비단 이불 이외에는 덮어본 적이 없던 한씨 부인은 묵을대로 묵은 홑이불을, 그것도 머슴들이나 거처하는
행랑채에서 덮고 자려니 그야말로 눈물이 펑펑 샘솟았지만 아이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이보다도
더한 서러움을 겪게 될 지도 모를 일.

한달간 진심을 다해 치성을 드려보자 하고 생각했다.

불공을 드리는 일 이외의 모든 준비는 무명 스님이 준비하기로 하였단다. 물론 그만큼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불전도 많이 들였을 것이다.

"오늘은 늦었으니 푹 주무시고 내일 새벽, 기침을 하시면 치성을 올리도록 하시지요. 먼 길 오셨을텐데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찬찬히 방을 돌아보았다. 종이도 바르지 않고 창 하나 없는 토방굴 같은 방에 요 한 채 홑이불 한 채,
갈아입을 옷을 쟁여놓는 사람 허리 높이의 작은 농 하나, 누가 가져다놓았는지 사대부 여인들이 썼을
법한 화장대 하나, 그리고는 요강에 불경 한 권.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이 곳에서 많은 아녀자들이 불공을 드리고는 곧 집에 돌아가 아이를 생산했다는 말처럼, 방 안
곳곳에는 아녀자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불의 바느질은 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
었으며 벽 곳곳에 작게 잿가루로 썼음직한 낙서가 남아있었으니 그 하나하나가 모두 집에 대한 그리움
을 담은 것들이었다. 힘든 외지 생활에 약해진 몸, 무거운 몸과 머리, 집 생각과 원망이 담긴 낙서들을
보노라니 그녀까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씨 부인은 긴 한숨과 함께 서둘러 이불을 깔았다. 잠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이미 몸은 고될
대로 고된 상태였다.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곧 잠에 빠져들었다.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 불언 선재선재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금제청 당위여설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여시주
여시항복기심 유연 세존 원요욕문…"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부터 스님의 목탁 소리에 잠을 깬 한씨 부인은 서둘러 세안을 하고 옷을 정갈히
갈아입은 후 불상을 모신 안채로 건너가 향을 피워 올린 후 경 외는 소리에 맞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허튼 생각을 마음에서 비워내고 오로지 이루고자 하는 뜻만 떠올리며 한 마음으로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절을 올리기 전 스님이 말한대로 그저 아이를 생산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마음만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아프고 목이 아프고 등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온 몸에서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하고 스님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씨 부인은 멈추지 않았다.

매달 달거리를 할 때마다 남편의 실망하는 눈빛과 혹여 오늘 또 아이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
매일 바늘방석 같은 시댁 어르신들과의 식사자리, 마을에 아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어느
집 앞에 금줄이라도 걸려있는 것을 보면 한없이 깊어져만 가는 시름.

행동이 느려지고 팔다리가 후들거리긴 해도 한씨 부인은 계속 절을 올렸다. 입술을 앙물게 되고 어느새
몸에서는 비오듯이 땀이 쏟아지고 두 다리가 떨려 서있기도 힘든 그 고됨. 머리가 어지럽고 세상이 그저
원망스럽고 어찌하여 나는 예까지 왔는가. 왜 나는 남과 같지 못하나. 서러움에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쏟아내며, 그 한을 풀어내 듯 그녀는 소리없이 통곡하며 계속 절을 올렸다.


"세상에 쉼없이 절하는 것만큼 힘든 노동도 없습니다. 식사를 하시고, 천천히 탑돌이를 하며 굳어진 몸을
풀어내고 잠시 저 뒷길에서 바람을 쏘이시다가 다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치성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드시지요. 우선 이 탕재로 몸을 보하시고 식사를 하십시오"
"네, 스님"

스님 말마따나 생전에 이렇게 몸이 고된 적이 없었다. 두 팔이 후들거리고 하늘이 노랬다. 온 몸이 무겁고
목이 마르고 기운이 없어 입맛도 없었지만 다시 또 절 올릴 생각을 하니 먹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천근만근 같은 팔을 겨우 들어올렸다. 해는 아직 중천에도 이르지 않았다.

행랑채 뒷 편에서 탑돌이를 하였다. 탑돌이라고 해봐야 층층이 나뉜 탑도 아니고, 그저 석축과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돌탑이었다. 그저 돌 하나 하나마다 사연이 담겼을 것이라 생각하며 뒷마당에서 주워온 고운 돌
하나를 자신도 쌓아올리고 스님을 따라서 하염없이 탑을 돌았다.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생각이 없어졌다. 함께 도는 스님의 모습을 보며 돌탑을 보며
발 밑을 보며 그저 지쳐가는 몸과 앞으로 남은 석 달의 시간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못 이겨낼 것 같은 고된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갈수록 몸이
고되고 어지러움은 갈수록 심해졌지만 그래도 그렇게 버텼다. 아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며. 그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다고. 먹는 것은 부실한데 고된 운동을 열심히 해서일까. 하루종일 머리가 무거웠다.

숙소를 옮겨서일까, 아니면 달걸이 때문인가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것들 때문은 아닌 듯 했다.

"아무래도 몸이 고되어서 그런 것일 겝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하루종일 머리가 무거우니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몸이 쇠약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볼이 살짝 핼쓱해진 것을 빼고는 큰 변화는 없어보였다.


그 날 밤이었다. 언제나처럼 식사를 마치고 저녁 불공을 드리고는 원기를 보하는 탕약을 마시고 지칠대로
지친 몸을 뉘었다. 추운 가을 밤 홑이불을 덮고도 잠에 들 수 있는 것은 스님이 방에 불을 때기 때문이었다.
노곤해진 몸을 뉘이고는 눈을 감으니 세상이 다 뱅글뱅글 노는 듯 하며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상 모르고 그렇게 자고 있는데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불이 뜨거워서인가 몸이 무거워서인가 답답함의
근원을 눈도 뜨지 못하고 찾고 있노라니 어지러운 머릿 속에서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뜨니
자신의 배 위에 왠 사내가 버티고 앉아 배꼽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몸만 파닥거리었지만 이미 사내의 양물은 음양합일을 이룬 다음이었고
그녀가 느낀 답답함과 무거움은 그 사내의 몸뚱아리였다. 겁에 질린 두 팔로 그를 밀어내노라니 그의 민
머리가 느껴졌고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있는 자가 무명승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기가 막히고 분하여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며 그를 해하고픈 마음으로 버둥거렸으나 우악스러운 그의
손아귀 힘을 이겨낼 수 없었고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치욕의 순간이 끝났다.



"어찌하여 그러셨습니까…"

몸을 추스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한스러운 눈물만 펑펑 흘리고 있노라니 스님이 입을 열었다.

"봄에 씨앗을 뿌려도 싹이 트지 못하고 가을에도 수확할 것이 없는 것은 밭이 돌밭이거나 종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두 달의 시간을 지켜본 바…외람된 말씀이오나 부인께선 몸은 호리호리할지언정
흉부와 골반이 크고 사지가 긴 체형이라 아이를 생산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월경의 혈도 살펴본 바 부인
과의 질환도 없으니 그것은 뿌리는 종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종자를 부처의 뜻으로 대신하니 이
를 개인과 가문의 수치라 느끼지 마시고 부디 큰 뜻으로 생각하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스님이, 아니 파계를 범한 중이 방을 나서니 한씨 부인은 차마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내며 그제사 한없이 소리도 없는 통곡을 하였다.

어마어마한 분통과 수치의 마음은 그 머릿 속을 불로 지지는 듯 하였고 가슴을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눈물이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억장이 무너지는 그 엄청난 한은 영원히 온 세상을 저주하고
씻어내지 못할 큰 죄를 진 것은 무거운 마음이 전신을 짓눌러왔다.

그리고는 이 암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이는 부부의 정이 하늘의 뜻을 받아 세상의 연을 이어주는 것인데 어찌 부처가 홀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온 천하에 암자가 몇이며 중이 몇인데 어찌하여 이 암자에서만 부처가 아이들을 점지
해 준다는 말인가.

비록 사대부가라고는 하나 사연 있는 아녀자가 불공을 드리는 것은 큰 흠이 아닐 지언데 어찌하여 외숙
부와 어머니는 시댁에 큰 거짓까지 고하면서 나를 이런 곳으로 안내한 것인가.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집 근처도 아니고 이렇게 멀고 외딴 곳의 암자에 자신
을 묵게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 온 세상에 다 정이 떨어졌다. 아니다, 어머니만큼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외숙부는 진실을 알았을지 몰라도 어머니만큼은 아닐 것이야, 하고 마음을 겨우
추스려보았지만 그렇다고는 하나 자신이 욕을 보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하는 것이 없었다.

이윽고 흐르는 중의 그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무서운 생각을 몇 번이고 떠올렸지만 그러기에는 자상한
남편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고 다시 한번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저 몸을 부르르 떨며 속으로 한을
삭힐 따름이었다.



시간이 또 흘러갔다. 그 날 이후로도 치성을 올리는 일은 그침이 없었으며 두 번의 욕을 더 보았다.
매번 죽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두 번 째 욕을 볼 때 중이 말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저를 벌하셔도 좋습니다. 제가 죽고 나면 전 영원한 시간동안 억겁의 지옥불 속에서
태워질 것 입니다. 이미 몇 번이고 파계를 범한 저는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는 원래 중이 아니라고 했다. 남선 고을의 도련님이던 그는 우연히 연이 닿은 마을의 어여쁜 처자와
정분을 쌓았지만 천한 신분의 그녀와 귀한 신분의 그가 맺어질 수야 없는 노릇. 머잖아 마음에도 없는
장가를 들고 그녀도 어디론가 팔려가 인연은 일단락 되었지만 쇠심줄보다 질긴 것이 인연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집안이 사화에 휘말려 풍지박산 나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홀로 도망쳤으나 도망치는 길에 서방님을
애타게 찾던 마누라를 보고도 눈을 돌렸지만은 그녀가 대신 포졸들의 다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겨우 그렇게 도망에 성공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 마누라는 옥중에서 죽었다고 했다.

역적의 자손이 되었으니 먹고 살 길도 없고, 단 한번을 마음 담아 눈길조차 준 적 없는 마누라의 마지
막 모습이 미안하여 그대로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으나… 그때 만난 것이 불공을 들이기
위해 이 암자를 찾은 과거의 첫 사랑이었다. 천한 신분에 여기저기 팔려다녔으나 운 좋게 나이 많은
사대부가의 셋째 후실로 들어가 씨받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워낙에 손이 귀한 집안이라
미신에라도 기대지 않을 수 없었고 부디 자손을 생산케해달라고 인근의 절에서 치성이라도 들이라는
압력에 그리한 것이 마침 여기였다는 것이다.

적막한 산중암자에 젊은 중과 아이를 만들고자 찾은 부인이 과거의 연정을 가진 채로 만났으니 혹한
에도 꽃이 피지 않을 리 없고 이윽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덜컥 생산하니 경사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고래로 팔삭둥이는 큰 일을 이룰 천재라 하였으니 그 암자의 불공이 과연 신통하다고
소문이 나 알음알음 알던 모르던 반가의 부인네들이 조심스레 이곳을 찾았으나…

"모르긴 몰라도 언젠가는 이 암자의 진실도 밝혀지겠지요. 그때는 이승에서든 저승에서든 제 몸이 성할
리는 없을테지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한씨 부인은 그만 허탈해졌다.




이윽고 백일이 되자 외숙부가 암자를 찾았다. 한씨 부인도 외숙부도 아무런 말없이 산을 내려왔다. 그리
고는 가마를 타고 차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출가외인이 석달 만에 귀가를 하였지만 시부도 시모도 그저 며느리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곤 고생했다며
꾸짖지 않았다. 서방님도 수척해진 각시를 보며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기에 이리도 수척해졌냐며 고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아주었고 한씨 부인은 차마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의 품에서 엉엉 울기만 했다.

태생이 거짓을 고하지 못하는 한씨 부인이었으나 진실을 고해보아야 그 누구 하나 득이 될 리 없었기에
그저 어머님이 이제는 회복을 하였다고만 아뢰었고 그녀의 성품을 모를 리 없는 차씨 가문 그 누구 하나
의심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부부가 간만에 만났으니 운우의 정을 피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고, 죄책감을 느끼기는 하였
으나 한씨 부인이 석달의 시간을 버틴 이유가 무엇인가. 서방님의 온기 그 하나 뿐이었으니 그렇게 둘은
전례없이 불꽃을 피워올렸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씨손을 잉태하였다. 차씨 가문에 경사도 그런 경사가 없었지만 그 씨가 누구의 씨
인지를 알고 있는 한씨 부인은 그저 마음만 불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차씨 가문에 복귀한 지 아홉 달이 아닌 열 달을 채우고 세상에 태어났다. 한씨 부인은
어안이 벙벙하였고 진정으로 그 아이가 서방님의 아이인가 싶어 한없이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으나
그 눈과 귀는 누가보아도 제 아비의 그것을 빼다박은 것이었다.

"장하다, 정말로 장하다"

시부의 칭찬 속에 한씨 부인은 그동안 마음 졸인 시간의 불안과 백일에 이르는 고통의 시간을 떠올리며
끝없이 통곡을 하였으나 어느 누구 하나 그녀를 탓하지 않았고 그저 15년 만의 한이 풀어졌음에 그런 것
이려니 하며 흐뭇하게만 바라보았다.


훗날 아이는 대사헌의 자리에 올라 가문을 크게 빛냈으며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모셨으니, 조정에서도
사가에서도 그 영광된 이름이 만 리에 빛났다.

아울러 한씨 부인은 만년에 다시 한번 그 암자를 찾았지만 흔적을 찾지 못하여 암자의 모 처인 당금사에
들러 연유를 물으니 언젠가 마른 날이었음에도 하늘에 벼락이 쳐 암자에 크게 불이 났고 홀로 그 곳을
지키던 스님은 등신불이 되었다고 하니 그 무섭고도 슬픈 업보에 그저 한씨 부인은 몸서리을 치고 돌아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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