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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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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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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서른 셋, 내 통장에 들어있는 현찰 토탈 이십팔만원, 리볼빙으로 버텨가는 카드빚은 392만원, 4월
만기 대출금 1,100만원, 연봉 2500 계약직, 회사 사정으로 인한 정규직 전환 불가 통보 받고 소주 두 병 빨고
침대에 누워.

재취업을 생각하면 눈물만 나. 이제는 도대체 어디로 가야하나.

쿵쿵 뛰는 가슴 속의 가슴 애린 거친 한숨, 샘솟는 눈물에 한심해서 또 울어. 어쩌다가 내이렇게 되버렸나.
잘못 한번 한 적 없고 사고 한번 친 적 없는데.

허리 아픈 엄마와 정년퇴직 아빠, 월급 130에 야간 경비 나가는 아빠에 문구 공장 엄마는 손 끝에 굳은살이
끝없이 박혀.

사랑한다 속삭이던 여우들은 하나둘씩 떠나, 이젠 누가 다가와도 겁이 먼저 나. 떠날 거면 다가오지 말고
나 때문에 소리치고 눈물 흘릴거면 오지도 마.

다시 생각해봐도 미안한 소정이와 지영이,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 어디론가 전화해도 다들 힘들고 피곤해.
힘없이 내려놓는 전화기와 불 꺼진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답답한 공기, 숨 막히는 답답함에 차라리 그대로
숨 끊어지면 좋겠어.



"여보세요"

"왜"

"블로그 글 봤어"

"그래"

"정말 급하면, 내가 좀 빌려줄까"


멍청하디 멍청한 이 기집애야 그 돈 꿔주면 내가 갚을 수나 있니. 뭘 믿고 빌려주려는건데.


"됐어. 너도 사정 빠듯한데 뭔 소리야"

"그냥"

"됐어"


솔직한 마음으로는 받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그 돈 모았는 줄 알아. 내가 4층 오피스텔 구할 때 반지하 방
곰팡이 제거제 뿌려가며 싼 방에서 억척같이 모아가며 내가 택시 타라고 해도 기어코 버스 타던 너.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에 울먹임을 감지하고 말이 없어지는 너.

"끊을께"

니 대답을 듣지 않고 끊어버린 전화.

너와 사귀던 시절이 떠올랐지. 


넌 똑똑하고 재미있었어. 솔직하고 잘 참아주고 싫은 것도 잘 티 안내는 모습이 우리 엄마를 보는 것 같았어.
그래서 좋았어. 그래서 응석받이가 되었어.

어려서 그랬다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쓰레기였어. 알잖아, 그래도 너는 자신감 넘치는 내가 좋다고 했어.
뭘 해도 응원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등신처럼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그저 울기만 했지. 멍청하게.

남들도 다 한번쯤은 그러는거잖아, 그리고 니가 좀 질려, 요즘 관심 가는 다른 여자가 있어, 그래서 헤어졌어.
헤어지고 나서 알았지.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 됐다는거.

그 다른 여자는 여지만 줬을 뿐인데 오바하지 말라며 도망쳤고 잘나가던 외국계 직장은 우리 부서만 사업을
접는대. 어쩌지. 그래도 괜찮았어. 난 잘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여자는 갈아치우면 그만이고 회사는 이직해
버리면 그만이야. 근데 그게 아니야. 

"연봉을 다 맞춰드리기는 힘들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전 회사에서 어떻게 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에요"
"에이, 3차는 기본이지. 어딜 가"
"지금 바쁜거 아는데, 이거는 내일까지 처리해줘요. 아 보고서는 다 됐어요? 기안 처리는 됐고? 빨리요"
"누구는 사정이 없어서 휴가 못 써?"

지쳐가는 나와 연락 안된다며 짜증 피우는 그녀들. 문득 니 생각이 나더라. 너였음 그저 나 한번 안아줬을
텐데. 그리고 기다려줬을텐데. 그래도 연락 안 한건 미안해서 그래. 얼른 재취업해서 사과하며 너랑 다시
잘 해보고 싶었지만, 6개월을 놀고 나니 이야기가 달라졌어. 

전 직장 연봉 삼분의 이, 어느새 500을 넘긴 카드빚에 땜빵 땜빵 하다보니 사정이 급해지더라. 일은 고되고
스트레스는 폭발해. 술은 왜 그렇게 쳐마셔. 

엄마가 쓰러졌어. 수술 해야한대.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의사한테 혼났어. 나는 몰랐어. 그 정도로 엄마가
힘들고 아파했는지. 새하얘진 엄마 얼굴 보니 그저 한없이 눈물 흘리던 니 얼굴이 겹쳐보여.

아빠가 정년퇴임을 했어. 딱 3개월이 부족해서 20년 기념 수당을 못 탔어. 그래도 4천이야. 어떻게든 당분간
되겠구나 생각했지만 사기 당했어. 기술투자를 했대. 생각해보니 두 세 달 전에 얼핏 전화로 그에 대해 영감
이 물었던 것도 같아. 바쁘고 짜증나서 대충 응응 거렸던 것 같아. 사자 같던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방 안에 앉아만 있어. 

적금 깨서 급히 수술비 막고 변호사 비용 대고는 영감 위로하며 밥 한끼 먹고 그 날 저녁 너한테 전화를 했어. 

"나 남친 생겼어"

정말 잘 됐다고 축하해줬지만 왠지 눈가에서 눈물이 흐르더라. 


그리고 3년이야. 너는 갈수록 빛나는데 나는 아무 것도 변한게 없어. 미래도 없어.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속도 쓰려. 생각해보니까 저녁에 감기약도 먹었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차라리 확 다 끝났으면 좋겠어.

이제는 이 찌질이 드라마도 질릴대로 질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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