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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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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감독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사드려"
"안녕하세요"

성북동 인근의 한 고급 음식점 별실로 신생 연애기획사 샘빛 엔터테인먼트의 정은동 이사와 신인 여배우
한은우가 들어섰다.

"어어, 얼른 들어와"

그들을 맞이한 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2012 카랑탕 황금물개상 수상 감독 이동수였다. 그는 전성기
시절 '흥행을 거머쥔 예술감독'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던 감독이었지만 2천년대 접어들며
연이은 흥행 실패로 한동안 침체기를 맞이했다. 슬슬 퇴물 다 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올 무렵 그에게 또
기회가 찾아왔다.

돈 빨로 시장을 교란시키는 기업이라는 이미지 재고를 위해 '작품성 있는 작품'에 목말라 있던 대기업 JK의
후원 하에 만든 새 영화 '잊혀지기 전'의 성공으로, 이동수는 그 자신 역시 잊혀지지 않는데 성공했다.

"어휴 어찌나 막히던지. 정말 죄송합니다. 큰 실례를 했습니다. 우선 술부터 한잔 받으시지요"
"아냐, 뭐 그럴 수도 있지 뭘"
"감독님은 갈수록 더 젊어지시는 것 같습니다"

청주를 한잔 따르며 정은동 이사가 아부의 멘트 한 마디를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아부가 아니었다.
나이는 정은동 이사가 마흔 넷, 이동수가 쉰이었으니 이동수가 훨씬 더 많은 나이지만, 얼굴에 주름 한 점
없는 대단한 동안 덕분에 이동수가 오히려 훨씬 더 젊어보였다. 보통은 부러운 일이겠지만 지나치게 젊은
얼굴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게 하는데가 있었다.

"그나저나 이쪽은 소개 안 시켜주나?"
"아, 예. 뭐하고 있어, 은우야 얼른 인사 올려, 대한민국 최고의 거장, 이동수 선생님이셔"
"허이구 사람도 참"

얌전히 앉아있던 신인 여배우, 한은우가 다소곳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한은우입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하긴, 내가 감사해야지. 내 영화 출연할 식군데. 안 그런가 정 이사?"
"암요, 암요…어, 아아니, 저희가 감사하죠. 어휴 참"

그렇다. 이들이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이동수 감독의 새 영화, 가칭 '덕수궁 길'의 캐스팅을 위해서이다.
사실 이 모임은 좀 특별했다. 현재 아침 드라마에 별 비중 없는 조역으로 출연하고 있고, 과거 모 과자 CF
에서 '몽환소녀' 컨셉으로 잠깐 이슈가 되기는 했지만 영화계에서의 입지를 보자면 그야말로 무명 중인 무명
인 그녀를, 지금 최고로 주가 상승 중인 거장 감독이 그것도 주연급 조연으로 캐스팅하겠다며 직접 컨택을
해온 것이다.

"몇 살이라고 했지?"
"22살입니다"

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 작품은 좀 파격적인 작품이야. 37살 노처녀가 회사에서 짤리고 허탈한 마음으로 옛날 연애하던 시절
생각 떠올리면서 덕수궁 길을 걷는데…중간중간 스쳐지나가는 커플들을 보면서 계속 자신의 과거를 투영
하는거야. 관객은 그 과정을 통해서 아, 이 여자가 과거에 이랬구나, 하는 걸 알아가는데… 그 과거들이
단편적으로만 보여지기 때문에 그 회상 씬에서 중간중간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이 여자가 할거란 말이지.
그러다 영화가 후반부에 가고, 그 단편적인 회상들이 다 조합되고 나면 아, 이래서 이 여자가 그랬구나,
하고 이해가 가게 되는거야. 그래서 관객들이 여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정을 하게될 무렵 여자가 집에
돌아오고, 자살 시도를 하지"

정은동 이사는 잘 이해가 안 가는지, 아니면 별로 재미가 없어보였는지 순간 멍한 얼굴이었지만 곧이어 또
과도한 오버를 하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햐, 시놉시스만 들어도 대박이네요. 뭐 2013년에도 영화제 수상은 다 따논 당상이나 다름없네요. 캬아"

하지만 이동수는 그의 오버스러운 반응보다, "그러면 그 다음은요?" 하고 묻는 은우의 질문이 더 마음에
들었던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주었다.

"이렇게 천장에 목을 매는데, 바로 그 순간 전화가 울려.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딱 영화가 끝나는
거야" 

영업맨 출신이면서도 표정 관리에 능하지 못한 정은동 이사는, 억지 웃음 뒤에 왠지 뒷맛이 구린 영화라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이 빛나는 은우는 달랐다.

"그러면 감독님, 제가 맡게 될 역할은 어떤 거에요?"
"그 여자의 사춘기 시절"



자세한 배역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정은동 이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당대 일류 감독의 
제안이고, 출연만으로도 이슈가 될테니 거절할 이유가 없지만…그래도 당혹스러운 배역이었다. 

"뭐, 쉬운 역할은 아니지. 그래서 아무에게나 기회를 줄 수 없는 자리이기도 하고"

이동수는 턱을 긁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했다. 정은동 이사의 얼굴에 여러가지 표정이 지나갈 무렵
은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 할래요"

동수가 말한, 은우가 맡아줬으면 하는 영화의 배역은 대단히 센 역할이었다. 지병 때문에 항상 누워지
내는 할아버지를 모시는 억척스러운 소녀가장. 생활보조금으로는 할아버지 약값만으로도 부족한 지경
이라, 그녀는 심지어 생리대 살 돈조차 없어서 생리 시즌만 되면 여기저기 생리대 꾸러 다니기 바쁘다.

게다가 그런 그녀의 처지를 이용해서 자꾸 금전적 지원을 바탕으로 한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옆집
아저씨. 거절하다 못해 결국 눈 딱 감고 응락을 하게 되는데, 그 한번이 어느새 지속적, 가학적이 되어
버리고 심지어는 그녀의 집에서, 할아버지가 누워있는데 관계를 갖게 되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씬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옆집 아저씨는 그럼 어떻게 되나요?"
 
침대에 누워 나른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은우. 동수 감독은 짧게 "죽어" 하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위해서 죽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인도 얻어맞은게 잘못되서 죽지"

은우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을 친 모텔의 창문 틈으로 한줄기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쳤다.



음식점에서의 1차 미팅이 끝나고, 정은동 이사는 "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돌아가보겠습니다"
하고 슬그머니 빠졌다. 그러면서 은근하게 은우에게 "잘해" 하고 귓속말 한 마디만 남긴 채 황황히 떠나
버렸다. 당혹스러웠지만 은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저 올 게 온 것이고, 기왕 언젠가
그래야 할 것이라면 차라리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감독님, 저랑 오늘 뭐하고 싶으세요?"

그녀는 먼저 감독의 손을 잡았다. 아빠 뻘 되는 그의 손을, 연인처럼 깍지까지 끼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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