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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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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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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갤러리아의 고메이494에 들어섰다.

"배고프다"
"나도. 얼른 맛있는거 먹자"

작년 가을부터 각 백화점간의 이른바 '식품관 전쟁'이 발발하면서 체인점을 내지 않는 소문난 맛집 음식들을
백화점 식품관에서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별로 맛있지도 않잖아"

'그래봐야 좀 더 나은 푸드코트'라는 신랄한 표현으로 그녀는 백화점들의 새로운 시도를 평가절하했다.



가히 '베이직 메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마마스의 라코타 치즈 샐러드에, 매운게 땡긴다며 속초 코다리 냉면에
만두까지 곁들여 먹으며 우리는 고메이494에서 늦은 점심을 만끽했다.

"배고팠단 말이야"

내가 빤히 바라보는 것이, 자신이 너무 허겁지겁 먹어서 그런 것인 줄 알았는지 문주는 조금 부끄러워했지만
난 그저 흐뭇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뭘 웃어"
"니 뺨에 묻은 고춧가루 때문에"
"정말?"

난 대답 대신 냉면 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보이는데? 어디?"

휴대폰으로 얼른 비춰보는 그녀. 그리고 그제서야 싱거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문주는 "유치해"라며
나를 힐난했지만 사실 고춧가루가 아니라 비빔냉면 국물이 그녀의 뺨에 살짝 튄 것은 사실이었다.



우린 갤러리아에서 쇼핑은 하지 않고 나와서 바로 까페로 향했다.

"잠깐만"

다만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이 문주는 중간에 맥 매장에 들러 또 립스틱을 하나 샀고, 사는 김에 리퀴드
타입의 아이쉐도우도 같이 샀다.

"무슨 넌 콜렉션 모으냐"
"잃어버렸단 말이야. 쓰던거. 그리고 내가 뭘. 몇 개나 있다고"
"한 7~8개 되지 않아?"
"그 정도 없는 여자가 어딨어"
"울 엄마"

내 헛소리에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그녀는 덤으로 화장 수정 서비스도 받고, 난 지루하게 옆에 앉아 그녀의
또다른 변신을 지켜봤다. 항상 여자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게, 어쩌면 일면식 없는 두 사람이 저렇게 친근
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약 10여 분 간의 기나긴 외톨이 시간이 지나가고 기분좋게 매장을 나와 까페로
향한 우리.

"뭐 마실거야?"
"아메리카노 마일드"
"오케이, 난…팬텀 브루니. 가토 쇼콜라 케익도 하나 먹자"
"좋아, 내가 계산할께. 윗층에서 기다려"

흘낏 보니 앞에 주문하는 커플이 셋, 진동벨 없는 매장, 조금 걸리겠군. 싶어서 2층으로 올라가며  미니 책장
에서 잡지 몇 권을 집어들었다. 잡지를 펴놓고 잠깐 휴대폰을 주물딱 거리고 있노라니 수진의 카톡이 왔다.

[ 오빠 우리 이번 주말에 스키장 안 갈래요? ] 

흠, 생각 좀 해보고. 답장은 보류했다. 



"이거 봐봐, 이거 어때"
"좋긴 한데, 내 방에 안 어울릴 것 같아"
"그런가?"

잡지를 넘기며 이런저런 상품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는다. 난 여행지를, 문주는 패션지를 본다. 잡지를 보다
힐끔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잡지를 열심히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크하다. 그리고 난 시계를 확인
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한 9시 반? 10시쯤?"

역시.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겨우 7시 반 밖에 안 됐어"
"정말? 대박"
"거의 두 시간 번 기분이야"
"왜 그렇지?"
"아까 3시에 밥 먹고, 딱히 따로 뭐 한 거 없으니까"

두 시간을 번 듯한 느낌에 그녀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난데없는 제안을 했다.

"그럼 우리 맛있는거나 먹을까?"
"뭐"
"뜨신 국물 먹으러 가자"
"오케이, 굿"

얼른 잡지를 덮고 일어섰다.



문주와 내가 향한 곳은 바로 근처의 오리엔탈 스푼. 어니언 치킨에 퍼보 하나 시켜서 먹고 나온다. 사실 배가
좀 불렀지만 그래도 기어코 다 비우고 나왔다. 배도 부르고 몸도 나른하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기로 한다. 

주차비가 만만찮다. 계산해보니 오늘 먹는데 은근 돈 많이 썼다. 딱히 대단히 뭘 엄청난걸 먹은 것도 아닌데…
문주는 피곤했는지 잠에 꾸벅 빠져들었다. 난 라디오를 끄고 올림픽 대로를 탔다. 

훈훈한 시트 덕분에 식곤증이 몰려와 나도 졸립다. 다행히 일요일 밤이라 그런지 차는 많이 막히지 않는다.
왠일인지 끊었던 담배가 괜히 땡겼지만 난 그저 말없이 운전만 계속했다. 나를 믿고 곤히 자는 문주의 옆
모습이 귀여웠다.



"다 왔어"

그녀의 자취방 앞. 잠에서 깬 그녀가 "…응" 하고 눈을 깜박이며 기지개를 편다.

"미안, 나 완전 푹 자버렸네"

머리를 대충 추스린 문주는 내리려다가 문득 나를 보며 "자고 갈래?" 하고 물었다. 난 잠깐 고민하다 그러겠
노라고 했다. 여친을 데려다주고 혼자 집으로 향하는 길의 심야 드라이브도 나름 좋아하지만 피곤하기도 했
고 오늘은 왠지 함께 있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나면 꼭 외로웠다. 

…아마도 꼭 데이트 후에 올림픽대로만 타면 잠에 빠져드는 누구씨 덕분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근데…우리 라면 먹고 잘까?"

좀처럼 여자 입에서, 그것도 일요일 밤에 듣기는 어려운 말. 굉장히 까칠하면서도 은근히 헐렁한 데가 있는
문주다운 말이다. 

"왜, 아직도 배가 덜 찼어?"
"몰라, 나 식욕 폭발하나 봐"

그녀의 생리 시즌인가 하고 잠깐 생각해봤지만 아마 지지난 주에 했던 것 같은데. 여튼 나도 사실 뭔가 입이
심심하긴 하다.

"좋아"

그러자 "아싸!" 하며 좋아하던 그녀는 "너가 끓여. 난 화장 좀 지울께" 라면서 일방적으로 라면 끓이는 것을
나에게 떠넘겼다. 



라면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샤워까지 하고, 시계를 봤는데 뜻밖에 아직도 겨우(?) 11시 반
밖에 되지 않았다.

"뭔가 자기에는 좀 시간이 아까운데"

라는 뻔한 멘트와 함께 벌써 옆으로 돌아누워 잠에 빠져들기 직전의 문주 어깨를 툭툭 쳤지만 문주의 답은 
"나 생리해" 였다.

난 픽 웃으며 "지지난 주에 했잖아. 어디서 그짓말을" 라고 말했고, 그 말에 쿡쿡 대던 문주는 "미안, 이번이
진짜야" 하고 대답했다. 기가 막혀서 얼른 손을 뻗어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야 너는…어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냐?" 

사실,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지금 꽤 피곤해서 거시기도 귀찮다. 하지만 뭔가 손해보는 기분이 참
어쩔 수가 없다. 간만의 여친 자취방에 와서 자고 가면서 잠만 푹 자고 출근하는 것도 좀 아깝지 않은가.

그래도 피 철철 흐르는 처자를 붙잡고 씨름하자고 하기도 뭣한 노릇이니 마음을 접는데, 문주는 벌써부터
잠에 빠져드는지 "그냥 자. 미안, 담에 해줄께. 잘자" 하고 돌아누웠다.

"알았어" 하고 나도 돌아누우며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추노라니, 문득 아까 수진의 카톡이 생각났다. 난
얼른 답장을 보냈다.

[ 미안, 요즘 오빠가 좀 바빠서ㅜㅜ 나중에 시간나면 맛있는거나 사줄께  ]

아, 1년 전만 같았어도 이 얼마나 꿈만 같은 제안이냐 하면서 춤까지 췄겠지만… 흐. 불꺼진 방에서 휴대폰
빛이 좀 신경쓰이지 않을까 싶어 뒤를 힐끔 보았지만 이미 문주는 몸을 돌리고 푹 녹아내리듯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아침에 교회 다녀오고, 오전에는 일했고, 오후에 나들이에 포식까지 했으니 잠이 안 올 수가
없겠지.

시원하게 거시기를 한판 안 해서일까. 바로 옆에서 여자친구가 쌔근쌔근 자고 있는데도, 귀여운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내 마음은 흐뭇하게 그녀와 스키장을 달리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물론 그런 날은
문주와 헤어지기 전에는 오지 않겠지만.

"흐흐"

난 잠에 빠져들어가는 그녀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었고, 문주는 "아이 자는데 귀찮게 좀 하지마!"
하고 돌아보지도 않고 짜증부터 피웠지만 그런 그녀가 귀엽다.

이제는 나도 눈을 감는다. 이번 달은 카드값이 빠듯하고, 이제부터라도 돈 좀 아까쓰다가 다음 달에 문주
와 함께 스키장에나 다녀와야겠노라고 다짐한다. 노곤하다. 내일은 칼퇴근하고 집에 와서 자야겠노라고
언제나처럼 이룰 수 없는 다짐을 하며, 이번에야말로 진짜 잠 속으로 정신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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