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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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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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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 인경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조심해, 바닥 완전 미끄러워"
"어어, 어"

손을 잡고 걷노라니 순간순간 살짝 미끄러지는 그녀의 움찔거림이 느껴진다. 칼바람이 뺨을 스치고 귀가 얼어
붙기 시작한다. 집에서 나온지 겨우 10분도 안 됐는데. 평소 같으면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하는 카페가 
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질까.

그녀와 내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춥고 싸늘한 날씨가 뒷목 뻣뻣하도록 몸을 움츠리게 만들지만 그래도
맞잡은 두 손에는 어느새 땀이 배인다. 발 끝이 살짝 얼어가는 것을 느낄 무렵 겨우 도착한다.

"어우 추워"
"아 따뜻하다"

같은 느낌, 엇갈리는 표현을 사용하며 카페에 들어선다. 사르르 볼끝과 손끝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면서도
아직까지 시려운 발 끝의 뻣뻣함을 느낀다. 힐을 신은 그녀의 발 끝은 나보다 더하겠지. 

"사람 많다"
"자리부터 맡자. 저기 앉자"

추운 날씨에 사람들이 죄다 카페로 몰렸는지 자리가 없다. 마침 창가의 좋은 자리에 앉아있던 한 커플이 일어
서고, 얼른 그 자리를 맡은 우리는 다시 주문을 위해 카운터에 선다.

"난 아메리카노. 뭐 마실거야?"
"난…카라멜 마끼아또. 휘핑 크림 얹어서요"
"오케이"

이어 주문을 마친 우리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새삼 카페 안의 아늑한 따스함에 노곤한 잠이 몰려온다. 아까
집에서의 후끈한 시간보다 더한 노곤함이다.

"노곤하지?"
"어, 완전 막 잠 오는데?"
"나두"
"그냥 집에서 잠이나 한숨 더 잘 것을 그랬나?"

하지만 인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한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온다. 불과 한 시간여 전만 해도
함께 사랑을 속삭이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모습이 겹쳐져 보이면서 더욱 그녀를
사랑스럽게 한다.

느긋한 여유… 간만의 연휴와 아직까지 그 여운이 느껴지는 기분좋은 시간들, 적당한 배부름과 향긋한 커피,
차분한 음악에 노곤함이 몰려와 잠이 쏟아진다.

"피곤해?"

내가 눈을 비비자 묻는 그녀.

"조금"
"그럼 다시 자러갈까?"

난 피식 웃었다.

"아니야"

무엇이든 남자에게 맞춰주는 타입의 그녀. 나쁜 남자와 만나면 고생 좀 할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더 잘해줘야 겠다고 다짐하지만, 나 또한 다른 의미에서의 나쁜 남자라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해진다. 곧이어
인경의 스마트폰이 울리며 언제나처럼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혜미의 카톡 메세지가 도착한다.

몇 안되는 인경의 친구, 혜미. 오랜 외지 생활 탓인지 주변 사람, 특히 남친에 대해 집착이 조금 심한 듯 보이
는 그녀는 남친과 싸우거나 조금 분위기가 안 좋을 때면 귀찮으리만치 인경에 대해서도 정서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그것도 다 잘 받아주는 인경의 성품 탓이겠지.

"미안"
"아니야"

힐끗 내 눈치를 살피는 인경. 지나가는 말로 "걔 좀 심한 것 같아" 하고 몇 번인가 이야기를 했더니 인경도
"사실… 나도 좀 그래" 하면서 겨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싫은 소리 못하는 타입의 피곤한 면이다.

잠깐 창 밖을 바라보며, 혜미가 내 여친을 강탈해간 몇 초 간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노라니 인경이 곧
"지금 남친이랑 데이트 중이니까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했어" 하고 메세지를 보여주며 웃어보인다.

장족의 발전이다.

"잘했어"

곧바로 [ 어 알았어 미안 ] 하며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을 덧붙인 혜미의 메세지가 도착했지만 인경은 그것도
확인하지 않았다. 그보다, 뭘할까.

"미술관 갈까?"

하지만 말을 뱉은 직후 고개를 저었다.

"너무 춥다, 갈 엄두가 안 나"

그나마 가까운 시립 미술관은 지난 주에 다녀왔지. 혼자 말하고 혼자 거절한 나를 보며 인경은 웃어보였다.

"그…뭐지? 혼자 두 명…이중인격 비슷한거, 그…꼭 그거 같아"
"아수라 백작?"

그러나 내 넘겨짚기는 답이 틀렸다.  

"지킬과 하이드"

아수라 남작 대답하면서 제 2의 대답으로 "골룸"을 생각했지만 그나마 내 두 개의 답보다 훨씬 있어보이는
그녀의 정답이 만족스럽다. 마침 음악이 바뀌고, 한층 더 노곤해지는 가운데 그나마 이번에는 보컬이 있는
곡이라 포근하게 귓가를 감싸안는 와중에 한줄기 정신이 팟하고 들어온다.

"영화관 갈까?"
"좋아"

사실 내가 무어라 대답해도 그녀가 거절할 리 없다. 무슨 죽으러 가자, 이런 개소리 하지 않는 다음에야.
하지만 이번에도 난 스마트폰으로 영화 리스트를 죽 훑어보고는 "그런데 볼 영화가 없다" 라며 스스로 낸
의견을 철회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지난 주에 본 영화, 그리고 내 손톱과 지갑, 무릎의 흉터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까페의 음악 탓일까, 커피 한잔의 포만감 덕분일가, 아니면 추운 겨울날, 따스한 햇살과 아늑한 공기 때문
일까. 아니면 오전의 즐거웠던 시간 때문일까. 그저 마냥 눕고 싶었다. 그렇지만 마냥 환자처럼 눕고 싶지
않았다.

커피잔의 커피를 다 비워갈 무렵, 인경이 "그러면 우리, DVD방 갈까?" 하고 의견을 냈다. 하기사 요사이
한동안 우리 못 본 영화 많지.

"좋아"

시계를 확인하니 3시 40분. 한겨울 어느 추운 날 연휴의 한낮은, 이제 한 편의 시간때우기용 영화와 함께
녹아 사라질 것이고 영화를 보고 나올 즈음이면 일몰과 함께 더욱 추워진 날씨가 우리 둘을 괴롭히겠지만…

그때 즈음이면 우리는 뜨끈하게 있는대로 불을 올려놓은 내 자취방으로 향할 것이고, 그 때 다시 몰려올
노곤함은 우리 둘을 곤한 잠의 행복으로 이끌어주겠지.

그 상상만으로 나는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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