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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좀 그만 말려라"
태훈의 언질에 선우는 그제서야 또 자작하는 진경의 손길을 제지했다.
"그만 마셔, 평생 마실 술 오늘 다 마실 생각이야?"
하지만 진경은 "히힛" 하는 웃음과 함께 "뭐 어때요, 한잔만 더요" 하고 선우의 손길을 뿌리치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선우는 태훈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야속하게도 그는 "나 먼저 들어간다, 너도 쟤 택시 태워서
보내고 얼른 집에 들어가" 하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난데없이 만취한 여후배의 뒤치닥거리를 하게 생긴 선우는 난감했지만, 어쨌든 "네, 들어가세요" 하는 인사와
함께 진경의 잔을 빼앗아 마시며 바로 제지했다. 그리고 힐끔 태훈이 나간 것을 확인하곤 바로 독설을 날렸다.
"야, 니가 뭐 술 취한다고 팀장님이 너 잡아주기나 할 거 같아? 저 사람 그런 사람 아니야. 지금도 봐라"
그렇다. 진경이 오늘 선배고 뭐고 없이 대놓고 달리며 만취한 이유는 바로 태훈 때문이었다. 그녀는 엊그제
그에게 고백을 했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당했고, 오늘은 낮부터 일로 심하게 까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선우…선배, 끅, 나요, 그렇게 매력 없어요?"
진경의 말에 선우는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아 누가 매력이 없대. 근데 팀장님은 널 안 좋아
하는거야. 그 뿐이야. 야, 그리고 솔직히 팀장님 눈에 니가 여자로 보이기나 하겠냐? 서른 여덟 홀애비가
스물여섯을 여자로 보면 그건 임마 범죄지 범죄" 하고 애써 달래주었다.
그리고 속으로 또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기집애야, 바로 옆에 니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떡하니 있는데, 뭐가 부족해서 홀애비를…'
하지만 곧바로 선우는 태훈의 매력도 인정했다.
'남자답긴 하지'
담배와 소주에 쩔어 사는 남자들 열 세명이 일하는 이 수컷냄새 진동하는 회사에 여자가, 그것도 스물 여섯
짜리 이쁜이가 들어왔으니 모두의 시선이 틈만 나면 그녀에게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게다가 강단있고
똘똘한데다 싹싹하기까지 하니 급기야 입사 한달만에 그녀는 사귀자는 대시만 일곱 번을 받는 사태가 벌어
졌다.
"진경이가 너네 다 아웃이랜다. 상식적으로 니네가 여자면 술담배에 쩔어사는 배불뚝이 아저씨인 너네들을
좋아하겠냐? 다 꿈깨고 일이나 똑바로 해. 회사에 연애하러 와?"
결국 부사장 겸 취재팀장인 태훈의 일갈에 모두들 깨갱하고 현실로 돌아왔지만, 의외로 진경의 마음이 쏠린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태훈이었다. 나이 서른 여덟의 홀아비이기는 해도, 남자다운 스타일과
이 어려운 시기에도 유명무실한 사장을 대신해 회사를 사실상 이끌어가는 수완가로서의 면모는 어린 처녀
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단번에 거절당했지만 말이다.
"선배 미안해요"
결국에는 길거리에서 시원하게 뱃 속의 내용물을 다 게워내고서야 진경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알딸
딸한 표정이기는 해도, 아까처럼 정신 못 차리는 상황은 아닌 듯 했다. 선우는 그녀를 부축해서 골목길을 빠
져나온 다음 큰길로 향했다.
'후우'
솔직하게 말해서 그녀가 만취했을 때, 조금은 묘한 생각을 하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어차피 내일은 1월 1일
이고, 뻗어버린 그녀를 적당히 어르고 달래어서 어떻게 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역시 행동으로 옮기
기에는 법과 현실의 제약이 너무 많았다.
"미안하기는, 니 마음 다 안다"
씁쓸하게 진경의 사과를 받아주었지만, 진경은 그 말에 되물었다.
"선배도 비슷한 경험 있어요?"
그리고 선우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진경아…"
하지만 잠깐의 공백을 두고, 선우는 말을 얼버무렸다.
"어어, 아휴, 언제 집에 가냐. 지금 가면 11시는 되야 도착하겠네"
"선배"
진경은 선우의 손을 잡아끌며 다시 물었다.
"혹시 선배 나 좋아해요?"
그동안 그렇게나 티를 냈는데, 몰랐다면 참 그것도 답답한 이야기다, 하고 선우는 생각했지만 곧이어 진경의
말에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미안해요. 선배는 좋은 사람이지만… 남자로선, 매력 없어요. 미안해요"
그 말에 선우는 대답 대신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일 따름이었고, 곧이어 다가온 빈 택시를 보며 "택시 왔다. 얼른
가" 하며 문을 열어줄 따름이었다. 진경은 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곧이어 "그럼 선배도 잘 들어가요,
고마웠어요" 하면서 문을 닫고 출발했다.
저 멀리 택시 후미등의 어른거림이 사라질 때까지, 그저 멍하니 눈이 시리도록 바라만 보았지만, 선우도 곧
택시를 잡으려 손을 뻗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30분도 넘게 걸려야 겨우 잡힐까 말까하지만, 우울한 마음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금방 빈 택시가 잡혔다.
"어디로 모실까요"
선우는 "영등포…" 하고 집 방향을 말하려다가 곧 "선릉이요, 선릉역 근처로 가주세요" 하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곧 휴대폰을 열어 [ 박 상무님 ] 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선릉의 풀살롱 업소 '강남 야구장'의 박지성
영업상무의 번호를 찾았다.
근 두어 달간, 마음의 허전함을 멀리서나마 달래주던 이쁘장한 인연 하나가 오늘로 완전히 선을 그었으니까.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그리고 2012년의 마지막을 술과 섹스로 떠나보내기에 가장 좋은 장소를 골랐다.
잠시 후 "안녕하십니까, 박지성 상뭅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하는 굵은 박지성 상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실연 아닌 실연을 당한 한 남자의 표정에서는 곧 씁쓸함이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편 보러가기] -> [박지성 상무의 강남 야구장]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