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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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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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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그에 반해 거기에다 모르는 척,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둔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무덤덤함까지 타고 났다. 눈치가 빠르다는 것은 아차하면 예기(銳氣)를 밖으로
뿜어내기 쉬운 법. 그 예기를 덮어줄 무덤덤함까지 갖고 있었으니 이는 보검에 명갑이었다.

게다가 단순히 미시적인 눈치만 빠른 것이 아니었다. 적당히 굴러가는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이게 되는
일인가, 망하는 일인가, 저 놈이 될 놈인가 안 될 놈인가, 나한테 득이 될 사람인가 독이 될 사람인가, 난
보였다.

모두가 으쌰으쌰하며 될 거다, 이건 되는거야 하고 축제 분위기를 낼 때 그 이면의 위험을 나는 엿보았고
대부분의 경우 역시나 그들은 그 위기에 처참하게 좌초되곤 했다. 그래도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목소리 높여 그들을 구하려 노력해봤자, 사람들은 눈 앞의 환상을 쫒을 따름이지 주의에 귀를 기울여서
흥을 깨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 위험이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애써 현실을
부정하는게 대부분의 사람이니까.

심지어 뒤늦게 처참하게 실패한 뒤에도, 그들은 진작에 경고음을 냈던 이에게 귀기울이지 않아서 미안하
다는 사과를 하는 대신, 오히려 목소리 높여서 "너 때문에 재수없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하고 소리치며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잘 아니까.

그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항상 침묵이었다.

그들이 불나방처럼 불을 향해 뛰어들어가는 것이 보이면, 적당히 그 즈음해서 내 한 몸 사리고 피한 뒤에
날개 잃고 추락하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멀찌감치서 비웃으며 바라보는 그 맛은 참으로 각별했다.




"올 것 같아?"

반대로 영리한 녀석도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내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오늘 밤에 분명히 연락올거야. 절대 화내거나 헛소리 말고 무조건 보고 싶다고만 말해. 알았어?"
"후우, 알았어. 근데 이번 만큼은 너 틀릴 거 같다. 진짜로"
"맘대로 생각해"

해진은 유일한 나의 친구였다. 창백한 피부에 운동이라곤 잼병인데다 내성적인 성격에 친구가 아무도
없었던 나와는 달리, 녀석은 항상 어딜가나 무리의 중심이고 빛이 났다. 저절로 사람이 곁에 모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 역시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하면 담백하게 사과했고, 잘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공이 남에게 있다면 남에게 공을 돌릴 줄도 알
았다. 그러니 사람이 곁에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굳이 그의 멋진 외모가 아니라도 말이다.

은근히 덜렁거리는 녀석을 나는 몇 번이나 구해주었다. 아니었다면 장담컨데 그의 19년 인생 중에
최소한 나와 알고 지낸 동안 5년간 두 번은 교통사고가 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연희와도 아마
이미 중학교 때 헤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내 연애조언은 거의 95% 이상의 적중율을 보였고(그 작은
미스는 대부분 해진이 내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부끄러운 마음에 중요한 뭔가를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녀석은 나를 항상 신뢰했다.

나는 나대로 얻는 것이 있었다.

연희는 특별한 아이였다. 대부분의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가 나는 보였다. 심지어 그가 나중에 어떤 식
으로 살게 될 지조차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 핸섬한 윤성이가 30년 후 뚱뚱한 대머리가 될 것도,
저 새초롬한 영은이도 20년 쯤 뒤에는 마귀할매 스타일의 아줌마가 될 것이라는 것도 나는 보였다.

그런데 연희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미래 역시도. 그녀와 좀
어떻게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이라도 해보려고 하면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면
난 그저 멍해졌고, 그녀가 활짝 웃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 가슴이 먼저 두근거리는데 어떻게 그녀를 읽
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곧 연희는 해진과 연애를 시작했다. 반에서 가장 예쁜 애와, 반에서 가장
애의 커플은 그 누가봐도 잘 어울렸고, 나는 해진의 옆에서 웃고 있는 연희를, 해진의 친구라는 이유로
그래도 다른 애들보다는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나는 더 좋은 학교에 갈 수도 있었음에도 해진, 연희와 같은 대학교로
진학했다. 물론 나는 보았다. 더 좋은 학교를 갔더라면 나는 더 멋진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가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는 씁쓸하고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래, 분명 서운하고 왠지 씁쓸할 때도 있었다. 분명히 내가 옆에 앉아있는데도 그 둘이 벤치에서
대놓고 키스를 나눈다던지, 연희에 대한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해진이 나로 하여금 굴욕적인
장난을 치기도 한다던지 할 때.

그래, 해진은 가끔 나를… 언제부턴가 조금씩 하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연희와 함께 있을 때면 더욱
그랬다. 장난의 이름이라 하기에는 조금 치졸한 구석이 엿보이는 짓이었다. 가끔 그것이 거슬렸지만,
그저 나는 혼자 속으로 이게 해진이라는 녀석의 한계구나 하고 씁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괜스럽게
말렸다가 더 어색해질까봐 그랬는지 차마 말리지는 못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진을
나무라며 인상을 찌푸리곤 하던 연희의 눈을 바라보면 그런데로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해진은 항상 나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나 역시 다소 회의감을 느꼈다는 이유로
유일한 친구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곧 이별 아닌 이별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창수야"
"어"
"나 다녀올 때까지 니가 옆에서 연희 좀 챙겨줘라"
"니가 잘 챙겨야지"
"…창수야, 믿는다"

언젠가부터-연희를 내가 여자로 느낀 시점에서부터- 다소 소원해진 사이이기는 했지만, 내 두 팔을
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탁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나서는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난
해진을 대신해서 연희의 보조 남친 노릇을 많이 해주었다. 해진이 첫 휴가를 나왔을 때는 심지어 내가
셋의 술값을 내기도, 몰래 해진에게 모텔비를 쥐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창수야"
"왜"
"너 나 좋아하지?"

연희를 집까지 바래다 주는 길. 마지막 언덕길을 앞두고 불쑥 그녀는 나에게 그런 질문을 했다.

"참나, 무슨…너 뭐 잘못 먹었냐?"

난 어색하게 웃으며 대화를 돌리려 했지만, 연희의 표정은 상상 이상으로 진지했다.

"나 보고 이야기 해. 윤창수, 너 나 좋아하잖아"

그녀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 얼굴을 그 차가운 두 손으로 잡고는 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발짝 뒤로 물러섰지만, 연희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말했다.

"넌 아니라고 하겠지만 난 알아. 너 나 좋아하잖아. 맞잖아"

하기사, 모를 리가 없지. 난 그제서야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그런데 그게 뭐? 갑자기 왜?"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지난 몇 달간,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나를 남자로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 변해서, 나를 좋아하게 된 건가? 하지만 그 짧은 설렘은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희
의 심상찮은 표정을 보고서, 그녀가 내민 한 통의 편지와 "그러니까 나 좀 도와줘" 라는 말 앞에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내민 편지는, 해진이 연희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편지였다.

사실 나는 해진이 연희에게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해진이 군대에 입대하기도 전부터, 이미 그는 다른 여자애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까지
나는 알고 있다. 수희, 이수희. 무용학과 신입생. 해진은 연희 몰래 나간 소개팅에서 수희와 첫 만남에
모텔까지 직행했고, 연희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정신적 사랑이라기보다는 육체적 사랑에 가까웠지만.

이미 해진은 연희에게 많은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군 입대 후 자연스러운 이별을 기대했지만 연희의 마음은 해진의 생각처럼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2년의 세월을 기다리기라도 할까봐, 그래서 더더욱 이별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올까봐 해진은
먼저 연희에게 이별을 통보한 것이었다. 간간히 면회 오는 수희와의 외박으로 육체적인 아쉬움마저
해소할 수 있게 된 이상, 해진은 더이상 연희를 애틋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미안해…"

나는 차마 연희를 도와줄 수 없었다. 내가 해진을 달래서 다시 연희에게 돌려보냈을 때의 미래가 엿보
였기 때문이다. 연희는 지독하게 비참한 슬픔 속에서 울고 있었고, 해진은 적반하장식으로 연희를 욕
하고 있었다. 난 그 둘과의 인연을 끊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해진의 마음을 돌려달라'는 연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연희를 위해서.



사람과 일의 성패 여부를 알아보는 눈이 있기야 했지만, 그것을 돈 버는데 이용하려고 하면 족족 모두
허탕으로 돌아갔다. '되는 사업'을 시도하는 회사의 주식을 사들이자 중국발 증시폭락으로 주가 전체가
풍지박산 났고, 예감이 오는 마필에 돈을 걸려고 하자 기수가 낙마를 하기까지 했다. 부모님의 사업
이나 주식도 마찬가지였다.

"고맙다 창수야. 짜식. 내 오늘 맛있는거 쏘마"
"회라도 쏘냐?"
"새끼. 알았다 임마"

…그래도 여전히 나는 해진과 친구였다. 해진과 연희가 그렇게 헤어지고 자신의 사춘기와 가장 아름
다웠던 스무살을 함께 한 남친을 잃은 연희는 학교를 자퇴했다. 그렇게 연희와 우리의 인연은 끊어졌
지만, 해진은 여전히 나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겉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이미 나 역시 속으로는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더이상 해진은 숨김없이 내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아니었다.

해진은 나 덕분에 삶에서 많은 재미를 보았다. 내가 망하고 손절매 한 주식을 뒤늦게 사들였다가 대박
이 터지지를 않나, 함께 지원한 회사에서 그는 붙고 나는 떨어지지를 않나. 난 그 이후로 중소기업 계
약직을 전전하는데 녀석은 고속승진으로 벌써 나이 서른 둘에 과장 타이틀을 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나 덕분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고 그의 성취겠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 열등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뭔가 묘하게 억울했다. 나에게는 분명히 능력이 있다.
그것이 어떤 '능력'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초과학적인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법한,
최소한 뛰어난 예측력과 분석력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단순히 '눈치나 감' 그 이상의 무엇 말이다. 

'그래봤자…'

하지만 그 능력은 항상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위해 쓰이거나 아니면 '그 능력이 있어봐야 내가
특별히 손을 쓸 수 있는 것이 없어 그저 멍하니 바라보다 당할 뿐'이었다. 그게 싫었고, 괜히 점점 더 
해진이 싫어졌다. 그가 나같은 놈을 친구로 두는 것이 꼭 이용하기 위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해진이 쏘는 술을, 그래서 더 퍼마셨다. 해진이 음주운전을 하며 데려다 주겠다는걸 겨우겨우 뿌리
치고 난 그를 대리운전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난 버스에 올랐다. 마침 빈 자리에 앉아 가볍게 눈을
붙였다. 너무나도 노곤했다.

"너… 창수 아니니?"
"어, 연희?!"

얼마를 갔을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그것도 여자가. 익숙한 목소리가. 내 무거운 눈꺼풀은 가볍게
틔운 그 목소리는 연희였다. 집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나는 정말로 우연히 연희와 만났다. 그녀는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정말 반갑다"
"어, 어. 정말 반갑다…"

나이를 먹었어도 내 가슴은 사춘기, 대학 신입생의 그것에서 변하지가 않았고 여전히 쿵쾅대기만
했다. 멍청하게도. 하지만 연희는 많이 변해있었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예쁘게 변해있었다.

"집에 바로 가야되는거 아니면, 우리 집에 가서 술 한잔 더 할래? 옛날 이야기도 하고, 요즘에 서로
뭐하고 지내나도 이야기하고"



지난 십수년간의 짝사랑이 비로소 결실을, 아니, 짧은 보상을 받았다. 벌거벗은 몸을 끌어안고 우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최고의 순간이었다. 정말로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좋았다. 난 다시
풀썩 침대에 누웠고, 연희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물었다.

"요즘에도… 해진이랑 친해?"
"어"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는 다시 물었다.

"걘 어때?"

난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한참을 망설였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잘 지내. 공기업에서 고속 승진 중이고, 사실 회사 일 안 해도 먹고 살만큼 나름 주식으로 돈 좀 손에
쥐었어. 걔 40평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
"그렇구나"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연희의 옆얼굴이 왠지 더 씁쓸해보였다.



이후에도 우리는 몇 번 더 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연희는 우연하게
찾아온 인연을 필연으로 발전시키고 싶어했다. 나에 대한 인연이 아니라, 옛 연인과의 재회를 말이다.

사실 그것은 해진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함께 한 첫 사랑… 그리고 너무나도 어리석고 이기적으로 떠내보낸 그
옛 추억에 대한 아쉬움… 그것을 만회할 기회가 왔는데 놓칠 이유가 없었다. 

둘은 지난 아쉬움의 기억을 지워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너무나도 뜨겁게 불타올랐고, 나는 연희를
위해 평생동안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닫기로 맹세했다. 

하지만 그 맹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속도위반결혼을 했고, 나는 그 둘을 순수하게 축복했다. 태어날 아이에 대해서도 축복했다. 그리고
몇 달 후 태어난 아이는 그러나 뜻밖에 지나치게 나를 닮아있었다. 육손이로 태어난 사실마저. 처음부터
재회의 과정에 대해 뭔가 미심쩍어했던 해진은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고 역시나 그 아이는 내 아이였다.

나와 몇 차례 관계를 가졌을 때 임신을 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해진은 이혼을 선언했다.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친구와 첫 사랑에 대한 마지막 자비
라며 그는 철저히 우리를 저주했다. 양육권도 포기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둘이 이어졌을 때를 상상했던, 그 비참한 결말을 새삼 떠올렸다.
난 뒤늦게나마 연희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도 하지마. 이 아이는 해진씨 아이라고 생각하고 키울거야. 미안해"

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쩌면 내가 끼어드는 것이 혹여라도 그녀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핑계를 대며 우리의 어긋난 관계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언제부턴가… 나의 신묘했던 그 '예측능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내 인간과
세상 일에 대한 분석력은 그리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과거와 같은 '신기' 수준의 무엇은 사라졌다.

그저 당선될 후보 잘 알아맞추는 택시기사, 축구 A매치 결과로 자장면 내기에 능한 순대국집 아저씨
같은 수준의 그 무엇일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차라리 난 홀가분하고 좋았다.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난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빠빠…엄마…아야야, 아팝파. 엄…마, 아야애…"

어린 아이의 옹알이 같은 전화였지만 난 뭔가 몸이 불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전화를 건 아이가 누군지도 알 것 같았다. 난 염치불구하고 즉시 2년 만에 해진에게 전화를 걸어서
연희의 친정을 알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열지 않자 나는 관리실을 통해서 아이의
아빠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하고는 문을 따고 들어갔다.

연희가 쓰러져있었다. 난 즉시 119를 불렀고, 그녀와, 나를 너무나 닮은 연희와 나 사이의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이없지만 연희가 쓰러진 이유는 영양실조와 빈혈에 의한 일시적 혼절
이었다.

"고마워…"

난 연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나간 시간들이 세월이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자리잡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가슴이 설레였다.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고 폰에 저장해둔거야?"
"어?"

문득 떠오른 궁금증이 있어 나는 연희에게 물었다. 기존의 번호와도 연결하지 않은 새 휴대폰인데
어떻게 번호를 알고 애가 나한테 전화를 다 했나 싶었지만… 그 다음 순간 나는 침대 끄트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엄마의 심박수를 중얼거리는 아이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찌빱…찌찌…찔꾸…찔찔"

78…77…79…77… 수치로 표시되는 것보다 아이는 한박자 먼저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
그 놀라운 모습을 볼까 싶어서 얼른 아이를 품에 앉았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 

아이는 너무나 나를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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