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대단하십니다"
"별 말씀을"
오늘도 인터넷 격전지에서 화려한 글치로 상대를 완벽하게 농락한 김박스에게, 그의 추종자이자 PC방
사장이자 그의 유일한 오프라인 지인인 윤일진이 다가와 축하의 한 마디를 건내었다. PC방에서 컵라면
하나로 배를 채우고 밤을 새워가며 처절한 토론을 한 끝에 번들거리는 개기름을 대충 물티슈로 닦아내며
김박스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이제 댁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윤일진의 질문에 김박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간밤의 그 현란한 필치는 대단했습니다. 존경합니다"
"하, 별말씀을.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하하, 살펴 가십시오"
김박스는 PC방을 나와 잠시 노곤한 몸으로 터덜터덜 걷다가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김박스. 당금의 인터넷 무림에서 단기필마로 그 확연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인터넷 그 어디를
가던 그 명성이 자자했다.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드높은 이름이며, 싫어하는 이에게는 경멸하고픈 이름
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의 화법은 양측 모두에게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뛰어들어가 여유있게 상대를 조소하는 듯 아닌 듯 자연스럽게 흥분을
이끌어내면서 상대 논리의 바늘구멍만한 미진한 약점조차도 철저하게 파고들며 팩트와 대중의 일반론으
로 어설픈 반박을 차단하는데다 그 논리의 전개 과정이 사람들의 공감을 절로 불러 일으키는 유려한 문장
으로 포장되니 그는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천하의 얄미운 키보드 워리어도 지금은 그저 텅 빈 버스 구석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여친
네 집으로 향하는 멍청한 한 남친일 따름이었다.
"으음…"
밤을 세운 논쟁과 라면 탓에 초췌한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소매로 얼른 슥슥 입가의 침을 닦아내고는
멍한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 밖으로 믿음 약국이 보이는 순간 그는 서둘러 버스 벨을
누르고 소리쳤다.
"아저씨! 내려요!"
"밥 먹었어?"
소연의 질문에 박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먹었어. 너는?"
"나두 안 먹었어. 밥도 없는데. 라면 먹을래?"
속이 부대끼는 통에 또 라면을 먹자니 별로 땡기지 않았지만 굳이 밥까지 새로 지어 먹는 것도 뭐하다
싶어 그는 "그래, 라면 먹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소연은 그 사이 박스의 눈빛을 읽어내곤
"라면 별로 안 땡겨? 그러면 내가 김치찌개 끓여줄께. 밥 금방 지으니까 좀만 TV 보면서 기다려" 하고
쌀을 씻기 시작했다.
"어"
짧게 대답했지만 소연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김박스의 가슴 안에는 새삼 흐뭇한 마음이 피어났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넌 정말 최고의 여친이야"
참 후진 멘트, 후진 타이밍의 닭살 돋는 헛소리였지만 소연은 픽 웃으면서 "너야말로 최고의 남친이야"
하고 가볍게 흘리듯 받아주었다. 김박스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겨우 지우며 TV 대신 PC를 켰다.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는 소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는 다시 인터넷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토론방에서는 간밤의 토론을 놓고 다시 한번 호사가들의 평론이 있었다. 토론 자체는 김박스가 풍청양
독고구검 시전하듯 현란하게 전장을 휘저으며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압도적으로 대세를
밀어붙인 토론이라는게 중론이었지만, 흐뭇하게 그런 평들을 읽고 있노라니 반 나절의 공백 기간 동안
다시 논리를 재무장하기라도 했는지, 상대 측 논객 몇몇이 갑작스레 아예 간밤의 토론 내용 전체가 무
의미하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었다.
"참…"
이미 토론 초기에 간략하게 언급해서 반박이 끝나 버린 이슈를 새삼 들고나와 도배하다시피 그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데 주말 낮 시간대라 그에 적절한 논박을 가해줄 논객이 없었다.
'음'
여자친구의 집에서까지 컴퓨터 앞에 구부리고 앉아 쌀 한 톨, 껌 하나 나올 일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나
쳐하고 있는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간밤의 토론이 무의미할 정도로 헛소리가
다시 토론방 전체를 장악해버리는 꼴을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박스는 잠시 더 망설이다 결국에
로그인 후 급하게나마 짧은 반박글을 시전했다.
"밥 먹어"
반박글 한 편을 딱 써서 올리자마자 마침 시간맞춰서 소연이 밥 먹으라고 외쳤다.
"어, 알았어"
소연이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얼큰하게 끓어낸 김치찌개 한 숟가락을 맛보자 박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카, 완전 맛있는데? 와, 계란말이까지 했어? 짱짱"
"맛있어? 흐, 많이 먹어"
박스는 흐뭇한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설거지는 박스가 했다. 그 와중에 소연은 새삼 방을 청소기 돌리고 창문 열고 환기 하며 청소를 했다.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고, 박스의 제안에 따라 둘은 개운하게 함께 샤워를 하고는 침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간만의 뜨거운 시간이었다. 펄떡거림은 잦아들었지만 아직까지도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과 발그레
해진 새하얀 목덜미… 가만히 힘 빼고 있노라면 허벅지에서 발 끝까지가 가볍게 떨릴 정도로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 둘은 나란히 누워 이유 모를 나른한 만족감을 만끽했다.
"아, 나른하다. 한숨 잘까?"
"응, 졸려"
낮잠을 푹 자며 부족한 잠을 채워넣은 둘은 그대로 토요일을 방구석에서만 날리기가 아까워 밖으로
나가 영화도 보고 맛난 것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심 '매일 이런 나날이 지속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은연 중에 떠올렸을 정도로.
"잘 들어가"
"응, 이따 전화할께"
데이트를 마치고, 소연을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터넷이나 할까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드니 왠일로 유림이의 부재 중 전화가 와있었다.
'간만이네'
그러고보니 연말도 다 되어가는데 한번 보기는 봐야지, 생각하던 차 일단 막상 전화를 하려니 조금
귀찮아 다시 휴대폰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한 박스는 씻고 개운한 마음으로 PC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문득 낮에 쓴 토론글을 떠올리곤
다시 토론방에 접속했다.
"… …"
난리가 나 있었다. 토론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소연의 사진과 박스의 사진이 게시판에 떠돌고 있었다. 아까 낮에 소연의 PC로 쓴 글이 문제였다.
그동안 김박스 덕분에 여러차례 게시판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던, 그와 사사건건 입장이 부딪히던
논객 '와그너'가, 평소와 다른 김박스의 IP를 보고 그의 뒤를 캔 것이었다.
소연의 집 IP를 따라 추적한 결과, 소연의 인터넷 활동 기록이 몇 개 검색되었고 그 중 박스와 그녀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게시판을 시작으로 실명과 ID등을 알아냈다. 그 아이디를 기점으로 역추적 결과
김박스과 그의 여자친구 신상에 대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와그너'는 그 모든 것을 터뜨렸다.
"맙소사…"
범죄나 그에 준하는 그 어떠한 잘못조차 없이 '신상털이'를 당하고 나니 김박스는 어이가 없을 지경
이었지만 사실 그 마음을 꼭 모를 것도 아니었다.
싫어하는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한번 털어버리고 싶었던 숙적이었을테고, 좋아하는 입장에서도 이래
저래 가십성 흥미로라도 많이 궁금하기야 했을 터. 그 마음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김박스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연에 대해서까지 온갖 험담과 비아냥이 쏟아진 댓글들을 보자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다.
생전 패킷 한번 섞어본 적 없는 눈팅 유저들마저 어디선가 우르르 쏟아져나와 인신공격을 해대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억울렸던 감정을 해방하듯 김박스의 토론 그
자체에 대해서까지 신랄한 비판에 이어 투박한 어조로 온갖 비난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런 비난은 꼭 '반대편'에서만 쏟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박스에 의해 언제나 2인자
3인자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던 이들조차 은근하게 박스에 대한 디스를 가해왔다. 박스가 행동을
취하기 직전, 심각한 수준의 비난과 비판의 게시물들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한번 불붙은
'특정인에 대한 조롱과 디스'가 쉽게 그칠 리 없었다.
박스는 허탈했다.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도 졌는가. 그리도 나에 대한 미움이 컸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복수'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지만, 곧 허무해졌다. 누구를 고소하고 그래봤자 남는
것도 없고 괜히 일을 키워봤자 소연이한테까지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냥 그는 침대로 향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여보세요? 어, 아휴 잠들었네. 지금 몇 시지?"
"지금 인터넷 돼? 내 페이지북 봐봐. 지금 사람들이 뭔 소리 하는거야? 어?"
불을 켜고 잠이 들어 눈을 찌르는 형광등 빛에 대단한 피곤함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당황하고 짜증
스러운 소연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어? 뭔 소리야"
"지금, 내 페이지북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너 욕하고 막 이상한 소리하고 그래. 이거 뭐야?"
"뭐?"
다시 한번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주된 플레이 타임은 역시 심야. 살짝 잦아
들었던 떡밥이 밤을 넘어 새벽이 되자 새삼 불타올랐고, 이번에는 선을 넘은 놈들이 소연의 페이지북
에까지 '논객' 김박스에 대한 온갖 비아냥과 조롱, 그의 글 중 일부만 악의적으로 편집한 짤방 등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나 니가 쓴 글 다 봤어…"
"아니 그건…"
"나 지금 되게 혼란스러워. 너 만나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소연아"
"지금, 나 많이 충격 받은 상태야. 나중에 이야기 하자. 생각 정리되면 연락할께. 연락하지마"
…하아"
토론 게시판 뿐만 아니라 잡담 게시판에서 남긴 온갖 뻘글을 보고, 인터넷 문화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소연은 많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새삼 과거의 많은 자신의 논쟁글들과
뻘글들을 새삼 읽어본 박스는 당장 망치로 손 모가지를 내려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함을 느꼈다.
그 많은 글들이 다 개헛지랄로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간 낭비였는가…'
더이상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계제도 아니었다. 가장 병신은 자기 자신이었다. 너무나도 한심
스럽고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자신에 대해 온갖 비난을 날려댄 이들보다도, 박스 본인이 자신에
대해 더한 욕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탈함에 전신이 무기력해졌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김박스씨, 잠시 4층 C회의실로"
"네? 아…네"
일요일도 허탈하게 날리고 월요일에 힘이 다 빠진 얼굴로 출근을 하자마자, 처음 보는, 아니 오다가다
회사에서 얼굴을 보기야 했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를 따라 4층의 C회의실
로 가자 전산팀 대리와 인사부장, 팀장님이 앉아있었다.
"그럼"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를 안내한 사람은 인사팀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나를 회의실까지 인도해주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회의실의 분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박스씨, 지금 앞에 있는 인터넷 로그 기록 중에서… 빨간 색으로 표시해놓은 곳 보이시죠. 본인이
접속한 곳 맞습니까? 작성하신 글 내용도?"
신상털이 과정에서 정말 독한 누군가가, 김박스의 회사에까지 그의 게시글 중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캡쳐해서 모조리 회사에 제보한 것이었다. 자세히 따져보면 별로 문제가 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전후
사정을 일일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맥락없이 그 문구들만 보노라면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내용들
이었다. 게다가 마침 바로 얼마 전, 전직 직원의 거짓으로 점철된 양심선언에 의해 회사가 대외적으로
큰 이미지 실추를 입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놀랍게도 인사팀장은 최고 수준의 징계, '퇴사'를 권유해왔다. 누가 그랬는지 윗선에까지 투서를 해서
아침임원 회의시간에까지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김박스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박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다 허무해졌다. 인터넷의 논쟁이 다 뭐라고,
나는 그토록 인생을 낭비하고, 또 누군가들은 나를 이다지도 몰아대는가, 하는 생각에 피식피식하는
웃음이 다 터져나왔다.
"허허, 참"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상황이었지만 그저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풍경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가에 눈물이 괴괴하게 고였다. 세상이 밉고, 또
세상에 미안했다. 무엇보다 소연이에게. 소연에게 다시금 한번 전화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우고 잔잔히 음악을 들었다. 기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인지도 모르겠지만 비지스의
Night Fever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회사도 짤리고, 여자친구도 떠났다. 모두 인터넷 때문이다. 돈
한 푼 안되는 인터넷이 내 삶을 잡아먹었다.
아니,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쓴 하등 쓸모없는 뻘글'들이 내 삶을 집어삼켰다. 증오도 미움도
분노도 억울함도 허탈함도 아닌, 그저 공허한 감정이 머릿와 가슴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제사 마음을 다스리고는 마지막으로, 인터넷 어디에선가 긁어온 글 한편을, 그 어떤
군더더기나 덧말 없이 '인터넷 무림'에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아이디 탈퇴를 눌렀다.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이긴 자는 누구이며 진 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하지 않네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다시금 허탈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있노라니 전화가 왔다. 소연의 전화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유림이었다.
"어 유림아, 간만이다"
"어 오빠, 지금 회사에요?"
"아니야, 집이야"
"어? 왜요? 오늘 노는 날이에요?"
"회사 관뒀거든"
씁쓸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대박! 나랑 타이밍 딱 맞아!" 하고 좋아라 했다. 그 밝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항상 너는 밝은 에너지가 넘쳐서 좋았지.
"오빠 나 사실 어제 남친이랑 헤어졌거든요. 그 바람둥이 새끼. 오빠도 알죠? 여튼, 완전히 정리하고
완전 기분 꿀꿀해서 오빠한테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할라고 했는데. 지금 집이면 딱이네. 나 오빠네 근처
놀러가도 돼죠?"
"어… 그래"
그리고 그제서야 유림은 내 기분을 눈치챈 듯 했다.
"오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
"어, 사실 나 회사도 그렇고, 여자친구랑도 좀 그렇거든. 어쩌면 깨질지도 몰라"
유림은 내 말에 또 뭐가 그리 웃긴지 빵 터져서 웃더니 다시 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웃기다. 오빠 진짜 웃기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위로해줄께요. 오빠는 나 위로해주고. 우리 서로
위로해줘야겠네. 그리고 걱정마요, 나 이제 솔로잖아. 진짜로 오빠 여친이랑 깨지면 내가 여친해줄께.
여튼 집 쪽으로 갈께요"
"어, 알았어"
참 속 없는 기집애다. 피식 웃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분명히 한숨의 무게는 전화하기 전
보다 가벼워져있음을 느꼈다.
"별 말씀을"
오늘도 인터넷 격전지에서 화려한 글치로 상대를 완벽하게 농락한 김박스에게, 그의 추종자이자 PC방
사장이자 그의 유일한 오프라인 지인인 윤일진이 다가와 축하의 한 마디를 건내었다. PC방에서 컵라면
하나로 배를 채우고 밤을 새워가며 처절한 토론을 한 끝에 번들거리는 개기름을 대충 물티슈로 닦아내며
김박스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이제 댁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윤일진의 질문에 김박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요"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간밤의 그 현란한 필치는 대단했습니다. 존경합니다"
"하, 별말씀을.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하하, 살펴 가십시오"
김박스는 PC방을 나와 잠시 노곤한 몸으로 터덜터덜 걷다가 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랐다.
김박스. 당금의 인터넷 무림에서 단기필마로 그 확연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인터넷 그 어디를
가던 그 명성이 자자했다. 추종하는 이들에게는 드높은 이름이며, 싫어하는 이에게는 경멸하고픈 이름
이었으나, 확실한 것은 그의 화법은 양측 모두에게 대단히 깊은 인상을 남긴다는 점이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뛰어들어가 여유있게 상대를 조소하는 듯 아닌 듯 자연스럽게 흥분을
이끌어내면서 상대 논리의 바늘구멍만한 미진한 약점조차도 철저하게 파고들며 팩트와 대중의 일반론으
로 어설픈 반박을 차단하는데다 그 논리의 전개 과정이 사람들의 공감을 절로 불러 일으키는 유려한 문장
으로 포장되니 그는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천하의 얄미운 키보드 워리어도 지금은 그저 텅 빈 버스 구석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며 여친
네 집으로 향하는 멍청한 한 남친일 따름이었다.
"으음…"
밤을 세운 논쟁과 라면 탓에 초췌한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소매로 얼른 슥슥 입가의 침을 닦아내고는
멍한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 밖으로 믿음 약국이 보이는 순간 그는 서둘러 버스 벨을
누르고 소리쳤다.
"아저씨! 내려요!"
"밥 먹었어?"
소연의 질문에 박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먹었어. 너는?"
"나두 안 먹었어. 밥도 없는데. 라면 먹을래?"
속이 부대끼는 통에 또 라면을 먹자니 별로 땡기지 않았지만 굳이 밥까지 새로 지어 먹는 것도 뭐하다
싶어 그는 "그래, 라면 먹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소연은 그 사이 박스의 눈빛을 읽어내곤
"라면 별로 안 땡겨? 그러면 내가 김치찌개 끓여줄께. 밥 금방 지으니까 좀만 TV 보면서 기다려" 하고
쌀을 씻기 시작했다.
"어"
짧게 대답했지만 소연의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김박스의 가슴 안에는 새삼 흐뭇한 마음이 피어났다.
그리고는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넌 정말 최고의 여친이야"
참 후진 멘트, 후진 타이밍의 닭살 돋는 헛소리였지만 소연은 픽 웃으면서 "너야말로 최고의 남친이야"
하고 가볍게 흘리듯 받아주었다. 김박스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겨우 지우며 TV 대신 PC를 켰다.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는 소연의 소리를 들으며 그는 다시 인터넷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토론방에서는 간밤의 토론을 놓고 다시 한번 호사가들의 평론이 있었다. 토론 자체는 김박스가 풍청양
독고구검 시전하듯 현란하게 전장을 휘저으며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과 함께 압도적으로 대세를
밀어붙인 토론이라는게 중론이었지만, 흐뭇하게 그런 평들을 읽고 있노라니 반 나절의 공백 기간 동안
다시 논리를 재무장하기라도 했는지, 상대 측 논객 몇몇이 갑작스레 아예 간밤의 토론 내용 전체가 무
의미하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었다.
"참…"
이미 토론 초기에 간략하게 언급해서 반박이 끝나 버린 이슈를 새삼 들고나와 도배하다시피 그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데 주말 낮 시간대라 그에 적절한 논박을 가해줄 논객이 없었다.
'음'
여자친구의 집에서까지 컴퓨터 앞에 구부리고 앉아 쌀 한 톨, 껌 하나 나올 일 없는 소모적인 논쟁이나
쳐하고 있는 그런 한심한 짓거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간밤의 토론이 무의미할 정도로 헛소리가
다시 토론방 전체를 장악해버리는 꼴을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박스는 잠시 더 망설이다 결국에
로그인 후 급하게나마 짧은 반박글을 시전했다.
"밥 먹어"
반박글 한 편을 딱 써서 올리자마자 마침 시간맞춰서 소연이 밥 먹으라고 외쳤다.
"어, 알았어"
소연이 끓인 김치찌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얼큰하게 끓어낸 김치찌개 한 숟가락을 맛보자 박스는
탄성을 터뜨렸다.
"카, 완전 맛있는데? 와, 계란말이까지 했어? 짱짱"
"맛있어? 흐, 많이 먹어"
박스는 흐뭇한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설거지는 박스가 했다. 그 와중에 소연은 새삼 방을 청소기 돌리고 창문 열고 환기 하며 청소를 했다.
청소와 설거지를 마치고, 박스의 제안에 따라 둘은 개운하게 함께 샤워를 하고는 침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간만의 뜨거운 시간이었다. 펄떡거림은 잦아들었지만 아직까지도 두근거리는 그녀의 심장과 발그레
해진 새하얀 목덜미… 가만히 힘 빼고 있노라면 허벅지에서 발 끝까지가 가볍게 떨릴 정도로 격정의
시간이 지난 후 둘은 나란히 누워 이유 모를 나른한 만족감을 만끽했다.
"아, 나른하다. 한숨 잘까?"
"응, 졸려"
낮잠을 푹 자며 부족한 잠을 채워넣은 둘은 그대로 토요일을 방구석에서만 날리기가 아까워 밖으로
나가 영화도 보고 맛난 것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심 '매일 이런 나날이 지속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은연 중에 떠올렸을 정도로.
"잘 들어가"
"응, 이따 전화할께"
데이트를 마치고, 소연을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터넷이나 할까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꺼내드니 왠일로 유림이의 부재 중 전화가 와있었다.
'간만이네'
그러고보니 연말도 다 되어가는데 한번 보기는 봐야지, 생각하던 차 일단 막상 전화를 하려니 조금
귀찮아 다시 휴대폰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한 박스는 씻고 개운한 마음으로 PC 앞에 앉았다. 그리고 문득 낮에 쓴 토론글을 떠올리곤
다시 토론방에 접속했다.
"… …"
난리가 나 있었다. 토론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소연의 사진과 박스의 사진이 게시판에 떠돌고 있었다. 아까 낮에 소연의 PC로 쓴 글이 문제였다.
그동안 김박스 덕분에 여러차례 게시판에서 웃음거리가 되곤 했던, 그와 사사건건 입장이 부딪히던
논객 '와그너'가, 평소와 다른 김박스의 IP를 보고 그의 뒤를 캔 것이었다.
소연의 집 IP를 따라 추적한 결과, 소연의 인터넷 활동 기록이 몇 개 검색되었고 그 중 박스와 그녀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게시판을 시작으로 실명과 ID등을 알아냈다. 그 아이디를 기점으로 역추적 결과
김박스과 그의 여자친구 신상에 대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와그너'는 그 모든 것을 터뜨렸다.
"맙소사…"
범죄나 그에 준하는 그 어떠한 잘못조차 없이 '신상털이'를 당하고 나니 김박스는 어이가 없을 지경
이었지만 사실 그 마음을 꼭 모를 것도 아니었다.
싫어하는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한번 털어버리고 싶었던 숙적이었을테고, 좋아하는 입장에서도 이래
저래 가십성 흥미로라도 많이 궁금하기야 했을 터. 그 마음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김박스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연에 대해서까지 온갖 험담과 비아냥이 쏟아진 댓글들을 보자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 했다.
생전 패킷 한번 섞어본 적 없는 눈팅 유저들마저 어디선가 우르르 쏟아져나와 인신공격을 해대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억울렸던 감정을 해방하듯 김박스의 토론 그
자체에 대해서까지 신랄한 비판에 이어 투박한 어조로 온갖 비난이 이어졌다.
게다가 그런 비난은 꼭 '반대편'에서만 쏟아진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박스에 의해 언제나 2인자
3인자 역할 밖에 할 수 없었던 이들조차 은근하게 박스에 대한 디스를 가해왔다. 박스가 행동을
취하기 직전, 심각한 수준의 비난과 비판의 게시물들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한번 불붙은
'특정인에 대한 조롱과 디스'가 쉽게 그칠 리 없었다.
박스는 허탈했다. 도대체 무슨 죄를 그리도 졌는가. 그리도 나에 대한 미움이 컸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복수'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지만, 곧 허무해졌다. 누구를 고소하고 그래봤자 남는
것도 없고 괜히 일을 키워봤자 소연이한테까지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냥 그는 침대로 향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여보세요? 어, 아휴 잠들었네. 지금 몇 시지?"
"지금 인터넷 돼? 내 페이지북 봐봐. 지금 사람들이 뭔 소리 하는거야? 어?"
불을 켜고 잠이 들어 눈을 찌르는 형광등 빛에 대단한 피곤함을 느꼈지만, 그보다는 당황하고 짜증
스러운 소연의 목소리에 가슴이 뛰었다.
"어? 뭔 소리야"
"지금, 내 페이지북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너 욕하고 막 이상한 소리하고 그래. 이거 뭐야?"
"뭐?"
다시 한번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키보드 워리어들의 주된 플레이 타임은 역시 심야. 살짝 잦아
들었던 떡밥이 밤을 넘어 새벽이 되자 새삼 불타올랐고, 이번에는 선을 넘은 놈들이 소연의 페이지북
에까지 '논객' 김박스에 대한 온갖 비아냥과 조롱, 그의 글 중 일부만 악의적으로 편집한 짤방 등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나 니가 쓴 글 다 봤어…"
"아니 그건…"
"나 지금 되게 혼란스러워. 너 만나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소연아"
"지금, 나 많이 충격 받은 상태야. 나중에 이야기 하자. 생각 정리되면 연락할께. 연락하지마"
…하아"
토론 게시판 뿐만 아니라 잡담 게시판에서 남긴 온갖 뻘글을 보고, 인터넷 문화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소연은 많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새삼 과거의 많은 자신의 논쟁글들과
뻘글들을 새삼 읽어본 박스는 당장 망치로 손 모가지를 내려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함을 느꼈다.
그 많은 글들이 다 개헛지랄로 느껴졌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간 낭비였는가…'
더이상 누군가를 욕하고 미워할 계제도 아니었다. 가장 병신은 자기 자신이었다. 너무나도 한심
스럽고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자신에 대해 온갖 비난을 날려댄 이들보다도, 박스 본인이 자신에
대해 더한 욕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허탈함에 전신이 무기력해졌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김박스씨, 잠시 4층 C회의실로"
"네? 아…네"
일요일도 허탈하게 날리고 월요일에 힘이 다 빠진 얼굴로 출근을 하자마자, 처음 보는, 아니 오다가다
회사에서 얼굴을 보기야 했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를 따라 4층의 C회의실
로 가자 전산팀 대리와 인사부장, 팀장님이 앉아있었다.
"그럼"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를 안내한 사람은 인사팀이었던 것 같다. 그는 나를 회의실까지 인도해주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회의실의 분위기는 상상 이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박스씨, 지금 앞에 있는 인터넷 로그 기록 중에서… 빨간 색으로 표시해놓은 곳 보이시죠. 본인이
접속한 곳 맞습니까? 작성하신 글 내용도?"
신상털이 과정에서 정말 독한 누군가가, 김박스의 회사에까지 그의 게시글 중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캡쳐해서 모조리 회사에 제보한 것이었다. 자세히 따져보면 별로 문제가 될 내용은 아니었지만 전후
사정을 일일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맥락없이 그 문구들만 보노라면 문제가 있어 보이는 내용들
이었다. 게다가 마침 바로 얼마 전, 전직 직원의 거짓으로 점철된 양심선언에 의해 회사가 대외적으로
큰 이미지 실추를 입은 상황에서 이런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였다.
놀랍게도 인사팀장은 최고 수준의 징계, '퇴사'를 권유해왔다. 누가 그랬는지 윗선에까지 투서를 해서
아침임원 회의시간에까지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김박스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을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박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다 허무해졌다. 인터넷의 논쟁이 다 뭐라고,
나는 그토록 인생을 낭비하고, 또 누군가들은 나를 이다지도 몰아대는가, 하는 생각에 피식피식하는
웃음이 다 터져나왔다.
"허허, 참"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상황이었지만 그저 웃음만이 흘러나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풍경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눈가에 눈물이 괴괴하게 고였다. 세상이 밉고, 또
세상에 미안했다. 무엇보다 소연이에게. 소연에게 다시금 한번 전화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어폰을 끼우고 잔잔히 음악을 들었다. 기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인지도 모르겠지만 비지스의
Night Fever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회사도 짤리고, 여자친구도 떠났다. 모두 인터넷 때문이다. 돈
한 푼 안되는 인터넷이 내 삶을 잡아먹었다.
아니, 인터넷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쓴 하등 쓸모없는 뻘글'들이 내 삶을 집어삼켰다. 증오도 미움도
분노도 억울함도 허탈함도 아닌, 그저 공허한 감정이 머릿와 가슴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그제사 마음을 다스리고는 마지막으로, 인터넷 어디에선가 긁어온 글 한편을, 그 어떤
군더더기나 덧말 없이 '인터넷 무림'에 올렸다. 그리고 곧바로 아이디 탈퇴를 눌렀다.
푸른 파도에 한바탕 웃는다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이긴 자는 누구이며 진 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하지 않네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사나이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다시금 허탈한 마음에 침대에 누워있노라니 전화가 왔다. 소연의 전화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유림이었다.
"어 유림아, 간만이다"
"어 오빠, 지금 회사에요?"
"아니야, 집이야"
"어? 왜요? 오늘 노는 날이에요?"
"회사 관뒀거든"
씁쓸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대박! 나랑 타이밍 딱 맞아!" 하고 좋아라 했다. 그 밝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항상 너는 밝은 에너지가 넘쳐서 좋았지.
"오빠 나 사실 어제 남친이랑 헤어졌거든요. 그 바람둥이 새끼. 오빠도 알죠? 여튼, 완전히 정리하고
완전 기분 꿀꿀해서 오빠한테 술이나 한잔 사달라고 할라고 했는데. 지금 집이면 딱이네. 나 오빠네 근처
놀러가도 돼죠?"
"어… 그래"
그리고 그제서야 유림은 내 기분을 눈치챈 듯 했다.
"오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기분 안 좋아요?"
"어, 사실 나 회사도 그렇고, 여자친구랑도 좀 그렇거든. 어쩌면 깨질지도 몰라"
유림은 내 말에 또 뭐가 그리 웃긴지 빵 터져서 웃더니 다시 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웃기다. 오빠 진짜 웃기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위로해줄께요. 오빠는 나 위로해주고. 우리 서로
위로해줘야겠네. 그리고 걱정마요, 나 이제 솔로잖아. 진짜로 오빠 여친이랑 깨지면 내가 여친해줄께.
여튼 집 쪽으로 갈께요"
"어, 알았어"
참 속 없는 기집애다. 피식 웃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분명히 한숨의 무게는 전화하기 전
보다 가벼워져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