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 어느 틈엔가 온 거리가 다 성탄 준비로 떠들썩 하다. 화려한 불빛에 밝은
사람들의 표정, 백화점 앞에는 쇼핑백 몇 개를 손에 들고 가는 사람들, 행복하게 웃는 커플들…
일에 지친 마음이 살짝 풀어질 뻔 했으나 마지막의 커플들을 보면서 오히려 새까맣게 타버린, 그래서
그 엉망진창으로 타버리고 들러붙어서 도저히 지워낼 수도 없게 완벽하게 다 '배린' 자신의 가슴 속
그 깊은 곳의 상처가 희미하게 따끔한 나머지 기분은 그렇게 또 어그러지고 만다.
내 나이 서른 넷. 여자 나이 서른 넷의 크리스마스는 더이상 슬픔이나 초조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나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미련, 믿음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아니 아주 솔직
하게,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어떤 이상적인 결혼에 대한 희망은 당연히 남아있다. 마치
복권당첨과 인생 역전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같은 것 말이다.
그래 복권. 딱 복권 수준의 그런 참으로 실낱 같은 기대가 남아있지만, 현실은 훨씬 냉정하고 차가운 놈
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서른 넷이라는 나이가 그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나이는 분명 결코 아니다. 다만 이제 와
우연히 남자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와 또 모든 것을 하나씩 알아나가고, 귀찮은 결혼준비 과정을
거쳐 결혼을 하고 뒤늦게 노산을 하여 그 아이를 키울 것을 생각하자면 모든 것이 다 너무나 아득하게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아니 그 전에 폐경이 오면 어쩌지'
생각해보니 참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까지 흘러나온다.
삑-
남산만한 엉덩이로 엉거주춤 뒤늦게 버스에 올라타서야 지갑을 꺼내느라 부산한 아주머니의 모습에
짜증이 슬슬 날 무렵 기사 아저씨의 "아 아줌마 잠깐 옆으로 비켜서세요. 그래요 뒷 사람들이 타죠"
하는 핀찬에 그제서야 겨우 아줌마는 지갑을 찾아 또 몇 번을 삐빅하는 오류 끝에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탄다.
삑-
그제서야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사람이 차있어서 서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딱 네
명 뿐이다. 괜히 또 짜증이 난다.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참고 휴대폰을 만진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브면 뭐하는가. 전화 한 통 하는 남자가 없는데. 물론 친구들이야 별 의미없는 우정 카톡을 몇 통
날려오지만 그 역시 적당한 응대로 넘긴다. 남편 있는 년들의 배부른 대화는 별로 받고 싶지 않다.
여자 나이 서른 넷의 최대 문제는 '고립'이라는 문제다. 친구들은 이미 거의 전부 시집을 갔고, 덕분에
자주 보기 힘들어지며 통금 시간은 미혼 시절에 비해 2~3시간 이상 앞당겨진다. 게다가 가끔 몇몇이
모여도 애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대화 소재는 아이 이야기, 시댁 이야기가 전부다.
'하아'
오죽하면 차라리 대딩 시절 선배들의 군대 이야기는 재미라도 있지. 이것은 숫제 자기 애 자랑아니면
남편 흉, 시댁 흉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점점 만나기도 꺼려지고 만나서도 예전같은 재미가 아니다.
물론 그나마 애를 시댁에 맡기고 나올 수 있는 정은이 정도면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이 년도 점점
대화 소재나 문화 수준이 '아줌마化' 되어가는 통에 더이상은 친구 삼기가 좀 그렇다.
자리가 생겨서 앉았다. 창 밖을 보니 올해는 길거리의 트리 장식도 별로 없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예년에 비해 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딱히 낫지는 않다. 오히려 크리스마스에 심통내고 남
안 되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노처녀 청승 같아서 싫다.
'집에 갈까'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근무를 자처했다. 물론 특근 수당 7만원이 탐나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크리스마스에 뭐 회사에서 때움으로서 마음을 달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냥 집에다가 "일해"
하고 말하고 안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오후 8시 퇴근길에 버스에 오르노라면, 차라리 그냥
자취방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바에야 집에나 갈까 하는 악마의 충동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승진 오빠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아니 기적이라며 기뻐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지만,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좋아할 일도 아니지.
"어 오빠 왠일?"
이 나이가 되도록 솔직해지지 못하고 뒤늦게 전화를 받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나의
미련함일까.
"어 주희야, 뭐하니"
서른일곱 나이스 돌싱남의 낮은 목소리에 주희는 희미하게 설레임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녀는 맘을
숨기기 바쁘다.
"그냥, 퇴근하는 길이에요"
사실은… 이미 지난 주, 승진은 미리 전화를 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초대. 하지만 그때는 왠지,
이브에 승진의 영화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러면 결국 이브의 유혹에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 두려웠어. 싫고, 자존심도 굽히는 것 같고. 너무너무 싫었어'
서른 넷 노처녀와 서른 일곱 돌싱남의 크리스마스 만남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주희는 그 다음날 바로 회사에 가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근무를 자처했고 그
렇게 그와의 만남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이 없는 외로운 그녀의 전화기에 울린 단비같은 전화 한 통화는
그녀의 냉랭한 마음을 녹였고 그렇게 전화를 받은 것이다. 뒤늦게 머리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엄마의
"주희야, 이 엄마는 니가 으뜬 남자를 데리오건간에 즐대로 반대 안 한다. 어디 베냇빙신만 아니면
괜찮다"
하는 말과 '과연 돌싱남도 이해할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 이승진, 솔직히 이혼남만 아니라면
지금의 주희로서는 감히 언감생심할 그런 남자다. 키도 훤칠하지, 인물도 번듯하지, 대기업 과장에
원래 집안 배경도 적당히 있는 집안이지… 심지어 애도 없다. 이혼 사유 역시 여자 쪽의 불륜이니까
솔직히 남자는 흠 될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래. 그래도 나는… 나는 첫 결혼인데. 그저 남들보다 두어살 더 먹었을 뿐인데. 그랬을 뿐인데 더이상
행복하고 애틋한, 알콩달콩한 새내기 부부의 신혼 느낌을 맛보아선 안된단 말인가. 뭔가 억울했다. 그게
싫고 그래서 승진의 전화도 다 받기 싫고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억울했고 눈가에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혹시… 아직, 영화 볼 생각… 없어?"
승진의 조심스러운 말에 주희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스스로의 버스 안 추태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그 좋아요, 라는 대답이 결국 자신을, 아득히 멀고도 행복한, 하지만 그래도 영원히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찜찜한 새 인연으로 이끌어 줄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설레이지만 설레이지 않는, 그래
아주 멋진 중고 제품을 구입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게 너무 마음 아프면서도, 그래도 더이상은
외로움에 떨지 않을 수 있음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
사람들의 표정, 백화점 앞에는 쇼핑백 몇 개를 손에 들고 가는 사람들, 행복하게 웃는 커플들…
일에 지친 마음이 살짝 풀어질 뻔 했으나 마지막의 커플들을 보면서 오히려 새까맣게 타버린, 그래서
그 엉망진창으로 타버리고 들러붙어서 도저히 지워낼 수도 없게 완벽하게 다 '배린' 자신의 가슴 속
그 깊은 곳의 상처가 희미하게 따끔한 나머지 기분은 그렇게 또 어그러지고 만다.
내 나이 서른 넷. 여자 나이 서른 넷의 크리스마스는 더이상 슬픔이나 초조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나이다.
사실 그녀는 이미 마음 속으로 결혼에 대한 환상이나 미련, 믿음 따위는 잊은지 오래다. 아니 아주 솔직
하게,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어떤 이상적인 결혼에 대한 희망은 당연히 남아있다. 마치
복권당첨과 인생 역전에 대한 부질없는 희망같은 것 말이다.
그래 복권. 딱 복권 수준의 그런 참으로 실낱 같은 기대가 남아있지만, 현실은 훨씬 냉정하고 차가운 놈
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물론 서른 넷이라는 나이가 그 정도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나이는 분명 결코 아니다. 다만 이제 와
우연히 남자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와 또 모든 것을 하나씩 알아나가고, 귀찮은 결혼준비 과정을
거쳐 결혼을 하고 뒤늦게 노산을 하여 그 아이를 키울 것을 생각하자면 모든 것이 다 너무나 아득하게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아니 그 전에 폐경이 오면 어쩌지'
생각해보니 참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까지 흘러나온다.
삑-
남산만한 엉덩이로 엉거주춤 뒤늦게 버스에 올라타서야 지갑을 꺼내느라 부산한 아주머니의 모습에
짜증이 슬슬 날 무렵 기사 아저씨의 "아 아줌마 잠깐 옆으로 비켜서세요. 그래요 뒷 사람들이 타죠"
하는 핀찬에 그제서야 겨우 아줌마는 지갑을 찾아 또 몇 번을 삐빅하는 오류 끝에 카드를 찍고 버스에
올라탄다.
삑-
그제서야 버스에 올랐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사람이 차있어서 서있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딱 네
명 뿐이다. 괜히 또 짜증이 난다.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참고 휴대폰을 만진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브면 뭐하는가. 전화 한 통 하는 남자가 없는데. 물론 친구들이야 별 의미없는 우정 카톡을 몇 통
날려오지만 그 역시 적당한 응대로 넘긴다. 남편 있는 년들의 배부른 대화는 별로 받고 싶지 않다.
여자 나이 서른 넷의 최대 문제는 '고립'이라는 문제다. 친구들은 이미 거의 전부 시집을 갔고, 덕분에
자주 보기 힘들어지며 통금 시간은 미혼 시절에 비해 2~3시간 이상 앞당겨진다. 게다가 가끔 몇몇이
모여도 애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대화 소재는 아이 이야기, 시댁 이야기가 전부다.
'하아'
오죽하면 차라리 대딩 시절 선배들의 군대 이야기는 재미라도 있지. 이것은 숫제 자기 애 자랑아니면
남편 흉, 시댁 흉이 전부다. 그러다보니 점점 만나기도 꺼려지고 만나서도 예전같은 재미가 아니다.
물론 그나마 애를 시댁에 맡기고 나올 수 있는 정은이 정도면 사정이 좀 나은 편이지만 이 년도 점점
대화 소재나 문화 수준이 '아줌마化' 되어가는 통에 더이상은 친구 삼기가 좀 그렇다.
자리가 생겨서 앉았다. 창 밖을 보니 올해는 길거리의 트리 장식도 별로 없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예년에 비해 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딱히 낫지는 않다. 오히려 크리스마스에 심통내고 남
안 되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노처녀 청승 같아서 싫다.
'집에 갈까'
그녀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근무를 자처했다. 물론 특근 수당 7만원이 탐나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크리스마스에 뭐 회사에서 때움으로서 마음을 달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냥 집에다가 "일해"
하고 말하고 안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오후 8시 퇴근길에 버스에 오르노라면, 차라리 그냥
자취방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바에야 집에나 갈까 하는 악마의 충동이 들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승진 오빠의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아니 기적이라며 기뻐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지만,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좋아할 일도 아니지.
"어 오빠 왠일?"
이 나이가 되도록 솔직해지지 못하고 뒤늦게 전화를 받는 것은 여자의 자존심일까 아니면 나의
미련함일까.
"어 주희야, 뭐하니"
서른일곱 나이스 돌싱남의 낮은 목소리에 주희는 희미하게 설레임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녀는 맘을
숨기기 바쁘다.
"그냥, 퇴근하는 길이에요"
사실은… 이미 지난 주, 승진은 미리 전화를 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초대. 하지만 그때는 왠지,
이브에 승진의 영화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러면 결국 이브의 유혹에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 두려웠어. 싫고, 자존심도 굽히는 것 같고. 너무너무 싫었어'
서른 넷 노처녀와 서른 일곱 돌싱남의 크리스마스 만남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유발하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주희는 그 다음날 바로 회사에 가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근무를 자처했고 그
렇게 그와의 만남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이 없는 외로운 그녀의 전화기에 울린 단비같은 전화 한 통화는
그녀의 냉랭한 마음을 녹였고 그렇게 전화를 받은 것이다. 뒤늦게 머리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엄마의
"주희야, 이 엄마는 니가 으뜬 남자를 데리오건간에 즐대로 반대 안 한다. 어디 베냇빙신만 아니면
괜찮다"
하는 말과 '과연 돌싱남도 이해할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 이승진, 솔직히 이혼남만 아니라면
지금의 주희로서는 감히 언감생심할 그런 남자다. 키도 훤칠하지, 인물도 번듯하지, 대기업 과장에
원래 집안 배경도 적당히 있는 집안이지… 심지어 애도 없다. 이혼 사유 역시 여자 쪽의 불륜이니까
솔직히 남자는 흠 될 것이 별로 없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래. 그래도 나는… 나는 첫 결혼인데. 그저 남들보다 두어살 더 먹었을 뿐인데. 그랬을 뿐인데 더이상
행복하고 애틋한, 알콩달콩한 새내기 부부의 신혼 느낌을 맛보아선 안된단 말인가. 뭔가 억울했다. 그게
싫고 그래서 승진의 전화도 다 받기 싫고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 억울했고 눈가에 눈물을
흐르게 만든다.
"혹시… 아직, 영화 볼 생각… 없어?"
승진의 조심스러운 말에 주희는 서둘러 눈물을 닦고, 스스로의 버스 안 추태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그 좋아요, 라는 대답이 결국 자신을, 아득히 멀고도 행복한, 하지만 그래도 영원히 마음
한 구석이 조금은 찜찜한 새 인연으로 이끌어 줄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설레이지만 설레이지 않는, 그래
아주 멋진 중고 제품을 구입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그게 너무 마음 아프면서도, 그래도 더이상은
외로움에 떨지 않을 수 있음에 깊은 안도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