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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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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첫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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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아 됐어, 자! 피곤해죽겠어. 잘 하지도 못하는게 만날 밝히기는!"
"지미…됐다, 궁뎅이나 치워라. 푹 퍼져 가지고 남산만 해가지고는. 여자가 이게이게…요즘엔 다들 미시
미시하는데 말이야…"
"어이고, 사돈 남말 하네. 오줌 쌀 때 그게 보이기나 해? 뱃살 좀 빼. 민망해죽겠다"
"크, 에효, 됐다, 됐어"
 
간만에 봉사 한번 해줄까 싶어 마누라 옆구리를 쿡 찔러보았지만 본전도 못 찾았다. 픽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내가 불쑥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서자 화라도 난 줄 알았는지 마누라가 묻는다.

"어디 가"
"아 물 한잔 마실란다, 왜? 한잔 줘?"
"…됐어"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쉰 김치 냄새가 확 피어오른다. 어휴, 망할 놈의 집구석. 여편네라고는
게을러서 생전에…에휴. 한숨을 쉬며 끓여놓은 보리차나 물병째로 입대고 마시노라니 거실 책장 구석의
대학교 졸업앨범이 순간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십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머리가 벗겨지지도, 배가 나오지도,
입에 욕을 달고 살지도, 밑도 끝도 없이 불뚝 서서 마누라 옆구리나 쿡 찌르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때 그 시절, 아버지는 군청의 주사였다. 암만 주사 직급이래도 공무원 월급이야 뻔하니 풍족할 것도
없지마는, 그래도 딱히 우리 삼남매는 크게 남 부러울 것 없이 컸다. 큰 누나, 둘째 누나가 공장 일을
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집에 돈 벌어오는 사람이 셋이나 되니 서서히 집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주판 튕기는 것보다 눈으로 암산하는게 더 빠를 정도로 기가 맥힌 아버지의 머리와 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운 부기 실력이 이제는 아버지보다도 나은 데가 있는 어무이의 눈치코치를 물려받았는지 나는 딱히
넘들마냥 코피 빵빵 터뜨려가며 공부 한번을 한 적이 없는데도 당당히 한국대 '농과'에 입학했다. 

사실은 고진대 상과에 가고 싶었다만 점수가 조금 부족하기도 했고, "니 무슨 농꽈 가면 농사 짓는 주
아나? 아이다. 농사는 농꾼이 짓는기고, 농대 나오문 농업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게 농꽈다" 하면서
어떻게든 한국대 입학생을 만들고 싶었던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 어머니를 꼬셔가 만든게 우리 주철고
첫 한국대 입학생인 나다. 

동리에 난리가 났고 현수막에 돼지까지 잡아 동네잔치를 했다. 그렇잖아도 원체 쓸데없이 목 뻣뻣한
우리 아버지 목은 아예 철판을 두르셨고, 술만 들어갔다 하면 나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 제 2의 우장춘
박사로 거듭나곤 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말씀을 하셔서 그 말만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예
태어나기를 한국대 농대에 들어가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로 유학을 오던 날 아버지는, 본인 지갑에 있던 돈을 몽창 뽑아 내 손에 쥐어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생전에 그 강골인 양반이 두 눈에 눈물을 다 뚝뚝 흘리셨다.

지금도 그 눈물의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서울로 유학을 떠나 보내는 막내 아들에 대한 걱정
과,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머리를 갖고도 끝내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끝까지 학업을 마무리 짓지
못한 자신의 한을 풀어준 아들에 대한 고마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 얼마 동안에야 나 역시 열심히 공부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가 즐거울 리 없었고 서울이란
도시의 매력은 촌놈이었던 나에게는 그 자체가 황홀경이었으니 얼마지나지 않아 나는 '논다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무슨 술이나 마시고 지집들이랑 놀러나 다니는 논다리는 또 아니었다. 술은 반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시뻘개지고 헤롱대는데다, 흥청망청 쓰고 다닐 돈은 정말이지 먹고 죽을래도 없었다. 그러니
여자애들과 어울리며 놀곤하는 흔한 논다리들과는 달리, 그저 수업을 빼먹고서는 서울 여기저기를 혼자
하염없이 돌아다니곤 하는 것이 전부였던 '외로운 논다리'였다.

요즘 말로 하면 아웃사이더였던 셈이다. 

그것도 멋부리고 다니는 아웃사이더는 아니고, 꾀죄죄한 행색으로 그저 하루는 종로, 하루는 동대문,
하루는 명동하는 식으로 빨빨 거리고 하루죙일 돌아다니곤 했다. 그저 서울의 공기를 마시는 바로 그
자체만으로 신이 나곤 했던 것이었다. 서울 깍쟁이들은 이해를 못할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난 내 콧
구녕으로 '서울 공기'가 들낙거리는 그 자체가 좋았다. 



"어? 윤승락?"

그 날은 날씨도 좋아서 학교를 파하고는 얼른 출발해서 다리가 뻣뻣해질 무렵 종로를 찍고, 슬슬 뱃 속
까지 허해질 무렵에는 삼청동 근처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즈음에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배미숙?"

과 정원 60명에 여학생이 다섯이 있었는데 남학우들이 꼽기로 그 중에 제일 외모가 나은 것은 최미연
이고 그 다음이 한지미고 다음이 바로 이 배미숙이었다. 하지만 최미연처럼 너무 있는 티 내는 아이는
애시당초 나한테는 눈 밖으로 난 것이고 한지미야 이쁘기야 이쁘다만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니 나에
게는 이 배미숙이 남바 쓰리지만 남바 원인데 그 배미숙이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이다.

"여기는… 웨, 웬일이야?"
"웬일은. 바로 근처가 우리 집인데. 너야말로 이 동네는 뭔 일로 왔어? 이 재미없는 동네를" 

이 근처 살았구나. 그러나 나는 답이 궁했다. 암만 촌놈이라해도 서울구경 하느라 여기까지 걸어왔다
하면 어느 누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겠으며, 믿으면 믿는대로 내 꼴이 우습게 될 것은 뻔했다. 난
그제서야 그 밑도 끝도 없는 서울구경을 처음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난 반년 간의
발품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도가니탕 먹으러 왔어. 이 동네에 끝내주는 도가니탕집이 하나 있지. 너도 같이 먹으러 갈래?"
"맛집? 이 동네에?"

사실은 대충 둘러댄 것이었다. 아 물론 오다가다 점심시간에 서울의 빼입은 돈 많은 영감쟁이들이
몇 번 먹으러 가는 것을 우연찮게 보고는 '저 집이 맛이 있나보구나' 생각하기야 했지만 그게 전부
였고, '서울구경' 하며 당최 배 채우고 돌아다닌 적이 없을만치 돈 아끼던 내가 허투루 하숙집 밖
에서 밥을 먹을 이유가 결단코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그리 둘러대고도 내심 빙시같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미숙의 반응은 꽤 호의적이었다.

"넌 어쩜 나도 모르는 이 동네 식당을 다 알아? 너 특이하다. 재밌어"

까르르 웃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상큼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생전 처음으로, 여자애를 보고서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누나 둘을 끼고 사노라니 생전에 여자 신기할 일이야 없는 법이고, 그 촌동네의 시커먼 넘의 집
기집애들이야 어릴 적부터 같이 멱 감던 사이니 설랠 일이 없고 남중남고를 나왔으니 여자 만날
일도 없거니와 보수적인 아버지 말마따나 그 시절에는 참으로 여자를 돌맹이처럼 보았다.

서울에 와보이 이쁜 얼라들이야 수도 없지만은 촌놈의 자격지심으로 말 한번 붙여볼 일이 없고
학교에서도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니 연분이 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하게 배미숙이랑
말을 붙이노라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럼 앞장 설래? 나 밥 안 먹었는데"

내 등을 툭 치는 그녀의 손길에 난 그만 바르르 떨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가 놀라는 모습
까지는 보지 못한 듯 했다.




"정말이네? 맛있다, 여기. 혼자 오기는 좀 그렇지만"

미숙은 국밥을 좋아라했다. 사실은 나도 처음 오는 가겐데. 식사 때가 아니라서 가게 안은 한적
했지만 그만큼 우리 둘이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하긴, 젊은 여자 혼자 국밥 먹으러 오는건 그림이 좀 그렇긴 하다"
"그치"

우리 둘은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미숙은 붙임성이 좋은 애였다. 남동생이 둘이나 있어서 그런
것일까. 덕분에 나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마음을 열고 그녀에게 말을 건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학교에서도 목례조차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우연한 곳에서 보았다고 먼저 말까지 걸다니
미숙이는 생각보다 적극적인 여성인 것이다. 

"너 그런데 그거 알아?"
"뭐?"
"우리 과 애들, 너한테 되게 관심 많은거?"
"무슨 관심?"

관심? 나한테? 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미숙은 또 한번 환하게 웃었다. 저 귀여운 눈웃음이 좋았다. 이렇게
보니 최미연이니 한지미니 하는 애들보다 미숙이가 몇 배는 더 예쁜 거 같다. 큰 누나는 내가 서울오기
전에 "눈웃음 짓는 년들은 다 요물이니 조심해야 돼 이 쑥맥아" 하고 조언한 바 있지만 암만 생각해도 
그것은 지가 눈웃음이니 애교니 하는 것을 생전에 못하는 목석 같은 년이니 그런 것이 분명하다. 

"너 그냥, 학교도 대충 다니는 것 같은데 시험은 맨날 거의 1, 2등 할 정도로 잘 보잖아. 거기에다 
수업만 끝나면 어디로 도망치듯 사라지고. 너는 우리 과의 숨은 명물이야, 숨은 명물"

숨은 명물이라는 표현이 묘하게 와닿았다. 거기에다 그녀에게는 내가 '행색은 남루해도 은근하게
서울 곳곳의 숨은 맛집을 잘 아는 묘한 멋쟁이' 같은 이미지가 박혔을테니 뭔가 더 특이하고 신기
했을 것이다. 

"그래…하하.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다들 싱겁구나" 

난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미숙은 여전히 나에게 궁금한게 많다는 눈으로 물었다.

"그럼 주로 학교 끝나면 뭐해? 도대체 어딜 가길래 맨날 수업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가기 바빠?"

미숙의 눈빛을 보노라니 그녀는 나에게 단단히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다. 우리 둘째 누나가 그랬
는데, 지금 생각하면 목쟁이를 돌려놓을 일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 둘째 누나는 내 고추를 보고 
징그러우면서도 신기하다고 지금 저 눈빛으로 툭하면 내 바지를 까놓고 구경하곤 했다. 언젠가
그 모습을 엄마한테 들켜 이유도 모르고 등짝을 수도 없이 얻어맞기 전까지 말이다. 

"나? 그냥 뭐… 여기저기… 바람처럼 돌아다니는거지 뭐. 세상이 하수상하잖아"

어느새 나는 '시골 촌놈의 밑도 끝도 없는 서울구경'을 '답답한 세상에 대한 불만을 천하유람으로
달래는 20세기 김삿갓' 쯤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내 스스로가 기가 찰 노릇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가 찰 노릇은, 미숙이 그런 나를 보고 한 말이었다.

"너 되게 멋있다. 나도 꿈이 맨날 어디 여행다니는건데, 생각해보면 내가 여행이라는걸 너무 거창
하게 생각했나 봐. 너처럼 서울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자체도 여행인데 말이야. 너 정말 멋있다"

박수까지 치며 좋아라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저 헤벌쭉해졌지만, 문득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부산스럽다 생각했는지 미숙은 쑥쓰럽게 웃으며 "나 지금 너무 들떴나?" 하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때 난 확신했다. 난 분명 이 여자애한테 반했다고. 



"나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힘들고, 그럼 우리…모레 같이 남산이라도 같이 갈까?"

밥을 먹고 나와 걷던 도중 그녀의 갑작스러운 제안. 사실 남산은 아직까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데이트 코스라는 생각에. 그보다 얘는 나랑 같이 남산에 둘이 가자고 하는게 무슨 뜻일까. 같이 케이
블카라도 타고… 아, 잠깐만. 아니아니… 음.

내가 잠깐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대답이 늦어지자 미숙은 "하긴, 남산은 좀 너무 정형화 된 코스지?
그럼 좀 어디 색다른 곳, 아는 곳 없어?" 하고 물었다. 

차라리 남산에 가자고 할 것을. 어디로 가지. 사실 맨날 서울 여기저기를 빨빨 거리며 돌아다녔지만
무식하게 걷기나 걸었지 어디 멋지고 숨은 곳을 내가 알 리가 있나. 난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영등포 가자. 의외로, 이런 시가지들이 새로운 눈으로 보면 새롭게 보이기도 해"

허허… 우리 어머니가 봤으면 새끼 무당 헛 점 본다 하며 혀를 끌끌 차셨겠지만, 다행히도 미숙은 
내 말에 아주 좋아라 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또 왠지 새로울 거 같기도 한데? 아 너무 기대된다!" 

미숙이 좋은 것은, 이렇게 풍부한 감정표현이었다. 우리 누나들처럼 울기나 질질 짜면 그저 그게
여자들 감수성인 줄 알았지, 이래 사람 말에 잘 대꾸해주고 좋다 좋다 입 밖으로 표현해주는게 참
진짜 참된 감수성이구나 싶었다. 

"그래, 꼭 가자"

난 그 말과 함께 새끼 손가락이라도 걸까하고 생각했지만 문득 또 너무 속 보이는 짓 같아서 얼른
움찔했던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미숙은 먼저 손을 눈 앞으로 내밀었다.

"약속해"
"어, 어"

나는 미숙의 그 작고 보드러운 손가락을, 함께 걸어 약속 도장을 찍었다. 그 이틀 후의 데이트가 내
인생 첫 데이트이고, 미숙이 바로 저 방 안에서 지금 요란하게 방귀를 뀌는 내 마누라다. 


"어휴, 집이 다 흔들리네 흔들려. 이 놈의 여편네는 무슨 여자가 방구를 그렇게…으휴, 우리 집은 뭐
어째 꺼꾸로야 꺼꾸로"

내 말에 민망한지 마누라, 배미숙은 방 안에서 크게 웃더니 또 웃으면서 말했다.

"너 때문에 속이 다 썩어서 그렇다 왜!"

난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쨌거나 배미숙은 배미숙이다. 내 평생 끼고 살 여자, 배미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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