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분투기
직장인의 꽃이라 불리는 '임원직', 그리고 최소한의 신뢰와 영업상의 이유로 인한 일부 영업직의 '가라 대리'를
제외하면, 직장 생활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승진의 때는 바로 '대리 승진' 때가 아닐까. 드디어 말단 사원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요 아직 가정을 꾸리지 않아 경제권이 제 손에 있는 시점에 쏠쏠하게 오르는 연봉, 무엇
보다 업무적으로도 가장 자신이 붙는 바로 그 시점이 바로 대리 승진을 전후한 시기니까.
관성으로 일하는 과장, 감각 무뎌진 차장, 실무는 이미 손 놓은지 오래인 부장을 올려다보면서 '에휴, 나 없으면
진짜 우리 팀 어떻게 돌아갈꼬' 싶은 생각에 혀를 끌끌 차게 되는 이 자신감의 시기!
하지만 사실 말단 시절, 제대로 일을 배워놓지 않았다면 가장 많은 벽에 부딪히며 난감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병이 빵꾸내는거야 몰라서 그렇다고 이해해주지만, 꺾인 일병이 빵꾸내면 선임들 눈에 살기가 감도는 것과
비슷한 이치. 이제부터는 정말로 '실전'인 것이다.
이제와서 뒤늦게 누구한테 뭘 물어보기도 민망한데, 위에서는 "이제 대리 달았잖아" 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숙련된 업무처리를 요구하고 아래서는 툭하면 "대리님" 하면서 칭얼대기 일쑤! 잠깐 정신 팔았다가는 업무에
치어죽는다! 게다가 이제는 더이상 말단사원 스킬 '모르는 척 눈치 안 보기'가 더이상은 통하지 않는 시기, 부서
분위기에 따라 적당히 눈치도 봐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회사에 인생 저당 잡힐 것 아니지 않는가? 내 인생 제대로 앞가림도 해야 할 시기.
달리 말해 '결혼'을 슬슬 준비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업무는 매일 산더미처럼 쌓여가는데 전화기 저 편 여친은 내 속도 모르고 그저 지만 바라봐주기를 바라며 빽빽
거리고, 잠깐 달래주러 전화 한 통 하고 오면 사내 메신저에는 독촉 메세지가 가득하다.
'아 씨발 뒤지겠네 진짜'
하고 삭막한 회사 천장 한번 바라보고 다시 집중해서 하나 겨우 끝내놓고 보면 어느새 시계는 오후 8시를 가리
키고 여자친구 년의 밴댕이 같은 소갈딱지는 이미 배배꼬여
[ 그래, 됐어. 관둬. 오빠도 똑같애 ]
하는 차가운 메세지나 날아오고 너무 기가 막혀서 허탈웃음 지으며 복도로 나와 커피 한잔 뽑아 마시니 복도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어느새 왜 이렇게 늙었는가.
겨우 일을 마치고-절반쯤은 내일로 미루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길. 한참을 고민하다 여친에게
전화를 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입에서는 절로 쌍욕이 터져나온다. 너무 짜증나고 속상해서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다가 문득 간만의 친구에게 전화 한 통 하노라니…
'그러고보니 요새 친구들한테 전화연락조차 뜸했구나' 하는 생각에 삶의 무게가 새삼 느껴져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어 간만이다"
반가운,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조금은 어색한 친구와의 인사. 그러나 곧 다시 허물없이 개소리를 주고받다
조만간 술이나 하자면서 그 기약없는 약속을 남긴 채 전화를 끊는다. 집에 도착하여 씻고 혹시나 하는 마음
으로 여친에게 또 한번 전화를 거노라니 옳다꾸나 전화를 받네.
…하지만 화해할 생각으로 한 전화는 어느새 피차 피곤한 감정 소모전에 돌입하고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고 피곤에 쩔어서야 겨우겨우 대화 마무리. 전화 끊고 시계를 보며 '몇 시간이나 잘 수 있지?'
조금 계산해보다가 내일의 주간 회의와 보고서, 기획안 등등을 떠올려 보고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 짓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카드값 채워넣고 다가올 대출만기일 앞에 내 청춘의 마지막은 이미 회사 것이나 마찬
가지인 것을.
…알람 소리와 함께 죽음에서 깨어나듯 짜증 속에 아침을 맞이하노라면 몸은 이미 천근만근, 목 뒤는 이미
무슨 철사를 감아놓은 것마냥 뻐근하다. 비몽사몽간에 씻고 출근길에 올라 하루 인내심 반을 소모하며 출근
하노라면, 뭐… 샤방샤방한 이쁜이 여직원의 생긋 웃는 아침 인사가 그나마의 위안이 된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아침부터 머리는 띵하고 업무에는 집중이 안 되고 심지어 졸음까지 쏟아지는데
이래서 담배와 커피를 끊을 수가 없다.
겨우겨우 버티며 점심 시간을 맞이하고는 점심 식사 맛나게 먹고 입가심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노라니
또 문득 여친 생각에 카톡 메세지 하나 슥 보내보는데 그래도 간밤에 그 지랄을 떨었더니 조금은 누그러
졌는지 답장이 제대로 온다.
조금은 기분이 좋아지고 오후 근무에도 탄력이 붙으며 어제부터 계속 내내 마음 한 구석의 찌뿌둥했던 그
좆같은 먹구름이 걷혀가고 슬그머니 오늘은 칼퇴근을 고민해본다.
몸은 피곤하지만, 여친과의 화해 데이트를 추진하면서 말이다.
* '레진닷컴'에 기고했던 글을 뒤늦게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