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소개팅 어땠어?"
정윤이의 물음에 솔직하게 "그냥 그랬어"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윤은 "왜? 별로야?" 하고 물었고
"잘 모르겠어. 싫진 않은데 뭐 딱히 좋지도 않아. 그냥 착해" 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정윤은
"착하면 됐네 뭐. 생긴건 어때?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다른 질문들은 연이어 던졌다.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잘 모르겠어. 싫지는 않아. 나쁜 느낌은 아니야. 그렇지만 딱히 설레이는 감정도
없어. 몇 번 더 만나봐. 대화는 그럭저럭 통하는 것 같다면서. 그나저나 나 웨딩 촬영 때문에 마사지
받으러 갈건데 너도 갈래? 그래? 같이 가면 좋을텐데.
결혼을 앞둔 정윤의 행복한 표정을 보니 더 싱숭생숭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왠지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만날 수는 없잖아. 어떻게 할까.
정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자가 카톡을 했다.
[ 집이에요? ]
[ 아니에요, 친구랑 간만에 놀다가 이제 들어가는 길이에요 ]
[ 아 네 전 집이에요 하하 ]
그래…
[ 네ㅎㅎ 뭐하고 계세요 ]
[ 그냥 있어요 밥 먹고, 컴퓨터 하고 ㅎㅎ ]
…역시, 재미없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차에 남자가 또 메세지를 보냈다.
[ 이번 주말에 영화 어때요? ]
무어라 답장을 보낼까 꽤 고민했다. 거절할까.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번 주말이 프리했다.
걸으면서 거의 5분을 고민하다가 나는 답변을 보냈다.
[ 좋아요 ]
두 번째 만남도 썩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을 보고 알아왔음직한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셨다.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흠 잡을 곳 없이 무난했다.
그의 참 어색한 핏의 청바지만 빼고.
남자는 참 솔직했다. 조금 맞장구를 쳐주면 흥분해서 말이 많아지는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동안 따스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앞서 말한대로, 여자를 몇 번 안 만나본 남자들 특유의 긴
장한 티가 역력했던 첫 소개팅 자리에서의 모습보다는, 좀 더 여유가 느껴져서 좋았다.
따뜻했다. 그 아기자기한 까페의 실내 온도만큼이나. 겨울 낮의 따스한 햇볕 같은 느낌. 신경도 많이
써주고, 섬세한 배려의 자세가 느껴졌다. 특히 그가 환하게 웃는 순간의 모습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
이 흘러나올 정도로.
그때 처음으로 '이 남자,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곧바로 나도 모르게 '에이' 하며 고개를 저었
지만.
세 번째 만남은 조금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퇴근하던 길에, 마침 근처라며 잠깐 시간 되냐는 그의
물음에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조금 루즈해졌다. 살짝 피곤하기도 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한 짜증이 났다. 만나서 얼마간 이야기하다 짜증과 피곤에 나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신경질적이 되었다. 남자의 눈에서 낭패한 기색이 보였다. 나도 조금 너무… 이유 모를 나의 이
태도가, 내 스스로가 싫었다.
하지만 내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잘 받아주는 그 모습에
아,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듯이 말이다.
그래, 좋은 남자, 라기보다는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제 3자 같은, 관조적인 자세가 되었다. 그냥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혼자'
라는 생각을 해보니 허전했다. 순간 스스로에게 놀랐다. 생각보다 나 꽤 이기적이구나, 하고.
이미 그 누가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아니,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달 조금 넘게 만났다. 우리는 주중에 한번, 주말에 한번, 정도의 빈도로 만났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번 보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락은 꼬박꼬박했다.
언제나 남자의 패턴은 뻔했다. 뭐해요?, 밥 먹었어요?, 일 끝났어요?, 자요? 잘자요. 후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사귀는 관계는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은 다 놀랐다. 아직까지 남자가 뭐하고 있는 거냐고. 그냥, 좋은 친구처럼 지내는 중이다, 라고
말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랬다. 막상 그가 고백을 하면 어떤 답을 하면 좋을지 확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백조차 하지 않고 어영부영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허무했다.
"너네 무슨 초딩 연애하냐?"
경미의 말에 웃으면서 "아 몰라~" 하고 넘겼지만 속으로 생각해보니 문득 부끄러웠다. 도대체 뭐야.
그리고 솔직히 진부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전시회 한번 가고, 서점에서 서로 책 선물하고…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사람 별로 안 탄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차들의 헤드라이드 불빛을 보며 좀
피곤함을 느꼈다. 다 귀찮았다. 그리고 휴대폰이 가볍게 떨려왔다.
[ 자요? ]
난 처음으로 그의 메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이제 뭐할까요?"
회사 끝나고 만나 밥 먹고 나오니 8시 반.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이 으실으실했다. 문득 뜨끈한
오뎅탕 한 그릇이 생각났지만 배가 불렀다. 남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남자는 당혹스러워하며 "음,
글쎄요"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에서는 더이상 할 것이 없다. 추웠다. 가뜩이나 얇게 입고 와서 엄청 추운데.
남자는 발을 구르다가 말했다.
"커피라도 마실까요?"
"배 부른데…"
내 거절에 남자는 그저 거리를 두리번 거릴 뿐이었고, 우린 말 없이 한참을 그 추운 길에 서있었다.
나는 말했다.
"추운데 그냥 집에 갈까요?"
남자는 아쉬움이 역력한 눈으로 "음, 영화라도 볼까요?" 하고 뒤늦게 다른 제안을 꺼냈지만 별로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다.
"추운데, 오늘 일찍 들어가기로 해요 우리. 피곤하기도 하고"
피곤하다는 말에 남자는 "아…" 하고 탄성을 내고는 "그래요 그럼. 얼른 들어가요, 추운데" 하고는
대답했고, 우리는 큰 길을 향해 걸어갔다. 왠지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분위기에 대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잘 들어가요"
"네, 그럼 영광씨도 잘 들어가요"
나는 택시 안에서 손을 흔들어주며 웃는 표정을 지어주었고, 그는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카톡 메세지가 날아왔다.
[ 오늘 피곤한데 괜히 데리고 다녔나봐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연락할께요 ]
난 [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영광씨도 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ㅎㅎ ] 하고 답장을 보내고는 긴
한숨과 함께 폰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후우…"
집에 돌아와서 씻고나니 몸은 엄청나게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가만히 일어나 앉아서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가 책상으로 가서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책 속에 끼워놓은 편지를 그에게 건냈다.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했다. 편지의 의미를 오해한 듯한
남자의 설레여하는 표정을 보며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가슴 한 구석이, 어제 편지를 쓸 때처럼 쿡
하고 아파왔다.
"잘 들어가요"
"네, 그럼… 잘 들어가요, 영광씨"
아직까지도 그 편지의 의미를 오해한 듯한 그의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며 오만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더이상 성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를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어설프게 만남을 이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또
이 관계를 더 진지하게 발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시작되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남자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 이 글을, 메일로 상담해오신 영광씨에게 바칩니다.
정윤이의 물음에 솔직하게 "그냥 그랬어"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윤은 "왜? 별로야?" 하고 물었고
"잘 모르겠어. 싫진 않은데 뭐 딱히 좋지도 않아. 그냥 착해" 하고 그에 대한 인상을 말했다. 정윤은
"착하면 됐네 뭐. 생긴건 어때? 뭐하는 사람이야?" 하고 다른 질문들은 연이어 던졌다.
…커피를 마시며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잘 모르겠어. 싫지는 않아. 나쁜 느낌은 아니야. 그렇지만 딱히 설레이는 감정도
없어. 몇 번 더 만나봐. 대화는 그럭저럭 통하는 것 같다면서. 그나저나 나 웨딩 촬영 때문에 마사지
받으러 갈건데 너도 갈래? 그래? 같이 가면 좋을텐데.
결혼을 앞둔 정윤의 행복한 표정을 보니 더 싱숭생숭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왠지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만날 수는 없잖아. 어떻게 할까.
정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자가 카톡을 했다.
[ 집이에요? ]
[ 아니에요, 친구랑 간만에 놀다가 이제 들어가는 길이에요 ]
[ 아 네 전 집이에요 하하 ]
그래…
[ 네ㅎㅎ 뭐하고 계세요 ]
[ 그냥 있어요 밥 먹고, 컴퓨터 하고 ㅎㅎ ]
…역시, 재미없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할까 고민하던 차에 남자가 또 메세지를 보냈다.
[ 이번 주말에 영화 어때요? ]
무어라 답장을 보낼까 꽤 고민했다. 거절할까.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번 주말이 프리했다.
걸으면서 거의 5분을 고민하다가 나는 답변을 보냈다.
[ 좋아요 ]
두 번째 만남도 썩 나쁘지 않았다. 인터넷을 보고 알아왔음직한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셨다.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흠 잡을 곳 없이 무난했다.
그의 참 어색한 핏의 청바지만 빼고.
남자는 참 솔직했다. 조금 맞장구를 쳐주면 흥분해서 말이 많아지는 것이 흠이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있는 시간동안 따스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앞서 말한대로, 여자를 몇 번 안 만나본 남자들 특유의 긴
장한 티가 역력했던 첫 소개팅 자리에서의 모습보다는, 좀 더 여유가 느껴져서 좋았다.
따뜻했다. 그 아기자기한 까페의 실내 온도만큼이나. 겨울 낮의 따스한 햇볕 같은 느낌. 신경도 많이
써주고, 섬세한 배려의 자세가 느껴졌다. 특히 그가 환하게 웃는 순간의 모습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
이 흘러나올 정도로.
그때 처음으로 '이 남자,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곧바로 나도 모르게 '에이' 하며 고개를 저었
지만.
세 번째 만남은 조금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퇴근하던 길에, 마침 근처라며 잠깐 시간 되냐는 그의
물음에 그러자고 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조금 루즈해졌다. 살짝 피곤하기도 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한 짜증이 났다. 만나서 얼마간 이야기하다 짜증과 피곤에 나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신경질적이 되었다. 남자의 눈에서 낭패한 기색이 보였다. 나도 조금 너무… 이유 모를 나의 이
태도가, 내 스스로가 싫었다.
하지만 내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자상하게 잘 받아주는 그 모습에
아,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마치 멀리서 바라보듯이 말이다.
그래, 좋은 남자, 라기보다는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제 3자 같은, 관조적인 자세가 되었다. 그냥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다시 '혼자'
라는 생각을 해보니 허전했다. 순간 스스로에게 놀랐다. 생각보다 나 꽤 이기적이구나, 하고.
이미 그 누가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아니,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달 조금 넘게 만났다. 우리는 주중에 한번, 주말에 한번, 정도의 빈도로 만났다. 바쁠 때는
일주일에 한번 보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락은 꼬박꼬박했다.
언제나 남자의 패턴은 뻔했다. 뭐해요?, 밥 먹었어요?, 일 끝났어요?, 자요? 잘자요. 후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직 사귀는 관계는 아니라고 했다.
친구들은 다 놀랐다. 아직까지 남자가 뭐하고 있는 거냐고. 그냥, 좋은 친구처럼 지내는 중이다, 라고
말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좀 그랬다. 막상 그가 고백을 하면 어떤 답을 하면 좋을지 확신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백조차 하지 않고 어영부영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허무했다.
"너네 무슨 초딩 연애하냐?"
경미의 말에 웃으면서 "아 몰라~" 하고 넘겼지만 속으로 생각해보니 문득 부끄러웠다. 도대체 뭐야.
그리고 솔직히 진부했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전시회 한번 가고, 서점에서 서로 책 선물하고…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사람 별로 안 탄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의 차들의 헤드라이드 불빛을 보며 좀
피곤함을 느꼈다. 다 귀찮았다. 그리고 휴대폰이 가볍게 떨려왔다.
[ 자요? ]
난 처음으로 그의 메세지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이제 뭐할까요?"
회사 끝나고 만나 밥 먹고 나오니 8시 반.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이 으실으실했다. 문득 뜨끈한
오뎅탕 한 그릇이 생각났지만 배가 불렀다. 남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남자는 당혹스러워하며 "음,
글쎄요"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의 데이트 코스에서는 더이상 할 것이 없다. 추웠다. 가뜩이나 얇게 입고 와서 엄청 추운데.
남자는 발을 구르다가 말했다.
"커피라도 마실까요?"
"배 부른데…"
내 거절에 남자는 그저 거리를 두리번 거릴 뿐이었고, 우린 말 없이 한참을 그 추운 길에 서있었다.
나는 말했다.
"추운데 그냥 집에 갈까요?"
남자는 아쉬움이 역력한 눈으로 "음, 영화라도 볼까요?" 하고 뒤늦게 다른 제안을 꺼냈지만 별로
보고 싶은 영화도 없었다.
"추운데, 오늘 일찍 들어가기로 해요 우리. 피곤하기도 하고"
피곤하다는 말에 남자는 "아…" 하고 탄성을 내고는 "그래요 그럼. 얼른 들어가요, 추운데" 하고는
대답했고, 우리는 큰 길을 향해 걸어갔다. 왠지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분위기에 대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잘 들어가요"
"네, 그럼 영광씨도 잘 들어가요"
나는 택시 안에서 손을 흔들어주며 웃는 표정을 지어주었고, 그는 그제서야 안심한 표정으로 또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카톡 메세지가 날아왔다.
[ 오늘 피곤한데 괜히 데리고 다녔나봐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연락할께요 ]
난 [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영광씨도 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ㅎㅎ ] 하고 답장을 보내고는 긴
한숨과 함께 폰을 내려놓았다.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후우…"
집에 돌아와서 씻고나니 몸은 엄청나게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억지로라도 잠을
청했겠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난 가만히 일어나 앉아서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가 책상으로 가서 한 통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책 속에 끼워놓은 편지를 그에게 건냈다.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했다. 편지의 의미를 오해한 듯한
남자의 설레여하는 표정을 보며 조금 미안함을 느꼈다. 가슴 한 구석이, 어제 편지를 쓸 때처럼 쿡
하고 아파왔다.
"잘 들어가요"
"네, 그럼… 잘 들어가요, 영광씨"
아직까지도 그 편지의 의미를 오해한 듯한 그의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며 오만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더이상 성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를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 어설프게 만남을 이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또
이 관계를 더 진지하게 발전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을 시작되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남자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 이 글을, 메일로 상담해오신 영광씨에게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