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실로 들어서자 귀와 가슴을 쿵쿵대며 울리는 음악이 잦아들며 귀가 조금 편안해진다.
"후우…"
새삼 저 밖이 얼마나 시끄러운 곳인지 느끼게 된다. 여기 화장실 안은 오늘 밤의 욕망을 제대로 풀어
내기 위해 심기일전하는 수컷들이 거울을 바라보며 여자들 못지않게 열성적으로 스타일을 정리하고
있다.
일부는 이미 아까부터 참아온 배설욕을 시원하게 콸콸 풀어내고, 역시 몇 시간 뒤의 더 짜릿한 배설을
위해 손을 씻으며 머리를 정돈한다.
나 역시 오줌을 한 바가지 쏟아낸 다음 거울을 힐끗 바라보며 스타일을 다듬었다. 그리고 나가려고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다시 쿵쿵 거리는 엄청난 볼륨의 음악이 저 복도 너머에서부터 가슴을 울렸다.
난 새삼 재킷을 고쳐 입으며 밖으로 향했다. 피곤했다.
"운전해도 돼?"
"나 술 안 마셨는데"
"술 말고…"
그녀의 말에 난 대답 대신 그저 픽 한번 웃고 안전벨트를 매었다. 그녀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눈치
였지만 말을 꿀꺽 삼키고 잠자코 벨트를 맨다. 난 음악을 틀었고, 우리는 곧 출발했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
전신이 쿵쿵 울리도록 '쎈' 음악을 듣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려니 뭔가 힘이 빠지는 듯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가뜩이나 지금 상황에 음악까지 빠른 음악 들었다가는 사고칠지도 모른다. 승아는 말없이
전방만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오빠 집에서 나 자고 갈까?"
"그래"
피곤한 탓인지 다운된 내 기분에 승아는 은근히 내 눈치를 본다. 난 그녀의 불안을 걷어내주기 위해서
한마디 했다.
"너 자고 간다니까 좋네"
승아의 "후후" 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난 책을 좀 더 보다가 자야겠다고 하고선 술 때문에
피곤해하는 그녀를 재우곤 책상에 앉아 조용히 노트북를 켰다. 잠에 빠져든 승아를 모니터 옆으로 바라
보며 나는 오늘도 재윤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그리고 전자담배를 빨며 죽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댓글을 달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그대로 죽 스킵해내려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3시 반.
노트북을 덮고 다시 곤히 잠에 빠져든 승아의 란제리 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예쁘고 섹시했다. 심지어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마저도 섹시했다.
그녀는 유학 시절 마지막 학기에 실연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학점에 대대적인 빵구가 났고, 결국에는
한 학기를 다시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갑작스레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그냥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방황케 한 실연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
나로서는 그저 유학 시절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가벼운 연인으로 생각했던 것 뿐이었는데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달, 클럽 근처의 포차에서였다. 승아가 먼저 나를
알아봤고,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게 인사를 나눈 우린 합석을 했고, 그 다음 날 따로 만나서
끊어진 인연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식 연인은 아니다. 그저…
'아니, 가볍게 생각하는건 이번에도 나 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부담스러워졌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살짝 깬 그녀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품을 파고 들었다. 난 그런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끌어안았다. 가볍게 아랫도리가 반응했지만 무시했다.
문득 승아에 대한 내 감정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보았다.
정말 예쁘고, 착하고, 내 말이라면 끔뻑 죽는 그녀가 고맙고 편하지만, 그 뿐이다. 설레임도, 특별한
감정도 없다. 마치 그냥 길거리의 예쁜 여자를 보고 순간 혹하기는 해도, 그 이상의 감정이 없는 뭐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만 왠지 말 수가 많이 줄고, 그저 철없이 어리기만 한 것 같았던 그녀의 눈빛 속에서 이유 모를 애틋
한 감정을 자꾸 느끼게 된다는게 좀 더 스페셜한 것의 전부랄까.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잔정이 남은 섹스파트너 수준이다. 아니, 그렇게 말하자면 또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긴 한데…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보다 재윤에게는 남자가 생긴 모양이다. 송재윤. 두 달 전에 헤어진 내 또다른 전 여자친구. 예술가
삘 넘치고 말 잘하고 재미있는 애. 무엇보다 밤에 장난 아닌 애.
전 여자친구에 대한 설명치고는 부실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 자체가 별로 없고…무엇보다 그녀에게 허언증이 있었다. 헤어진 이유도 그것이었고, 헤어진 이후
뒤늦게 재윤에 대해 좀 알아보다가 그녀가 나에게 말한 자신에 대한 정보 거의 전부가 거짓말이었단
사실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와선 별로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녀에게는 또 다르겠지. 어쨌거나 남자가 생긴
이상 재윤에 대한 내 마음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적막 속에서 승아의 숨소리가 들렸다.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프리랜서라고는 해도 두 달 째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사실상의 백수다. 이제 곧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데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 목표도 없고 무미건조한 삶이다. 여자애들하고 노는 것을 제외
하면 즐거운 것조차 없다. 그것도 좀 질린다.
영원히 한량처럼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것이 없는 삶은 역시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요즘 갖고 싶은게 생기기는 했다. 직업이다. 치열하게 출퇴근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신경
써가며 눈치보고 일에 찌든 하루하루를 잠깐 맛보고 싶긴 하다. 배부른 생각이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피곤한지 뒷 목이 뻐근하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는다. 두통이 슬슬 시작되는 것 같다. 짜증이 난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승아에게는 언제쯤 관두자는 말을 꺼낼까. 며칠 전 그녀가 약을 먹는 것을 보았다. 우울증
약이었다. 집이 생각보다 많이 어려워진 모양이다. 그 와중에 나는 하루에 한번… 아니 어쩔 때는
이틀에 한번 꼴로 잠깐 연락하고…. 그녀의 전화도 무시하기 일쑤.
억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승아는 아마 미치도록 괴롭지 않을까.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에
좀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핑계로 나는 이렇게 그녀와의 새로운 만남을 3개월째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헤어져야 할 것 같다. 이유는 점점 그녀가 더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느껴지기에.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지만, 나는 솔직히 결국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기분 때문에 책임지겠노라고
선언하는 년놈들이 더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변명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를 떠나간 여자애들은 대부분 차라리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들
말했다. 어쨌거나 난 승아를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이 오지 않으니 자기 전에 영화라도 한 편 볼 생각이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승아가 눈을 뜰 무렵 그제서야 피곤에 쩔어 겨우 잠에 빠져들겠지.
난 노트북을 다시 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화장실로 들어서자 귀와 가슴을 쿵쿵대며 울리는 음악이 잦아들며 귀가 조금 편안해진다.
"후우…"
새삼 저 밖이 얼마나 시끄러운 곳인지 느끼게 된다. 여기 화장실 안은 오늘 밤의 욕망을 제대로 풀어
내기 위해 심기일전하는 수컷들이 거울을 바라보며 여자들 못지않게 열성적으로 스타일을 정리하고
있다.
일부는 이미 아까부터 참아온 배설욕을 시원하게 콸콸 풀어내고, 역시 몇 시간 뒤의 더 짜릿한 배설을
위해 손을 씻으며 머리를 정돈한다.
나 역시 오줌을 한 바가지 쏟아낸 다음 거울을 힐끗 바라보며 스타일을 다듬었다. 그리고 나가려고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다시 쿵쿵 거리는 엄청난 볼륨의 음악이 저 복도 너머에서부터 가슴을 울렸다.
난 새삼 재킷을 고쳐 입으며 밖으로 향했다. 피곤했다.
"운전해도 돼?"
"나 술 안 마셨는데"
"술 말고…"
그녀의 말에 난 대답 대신 그저 픽 한번 웃고 안전벨트를 매었다. 그녀는 무어라 한 마디 하려는 눈치
였지만 말을 꿀꺽 삼키고 잠자코 벨트를 맨다. 난 음악을 틀었고, 우리는 곧 출발했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
전신이 쿵쿵 울리도록 '쎈' 음악을 듣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려니 뭔가 힘이 빠지는 듯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가뜩이나 지금 상황에 음악까지 빠른 음악 들었다가는 사고칠지도 모른다. 승아는 말없이
전방만을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오빠 집에서 나 자고 갈까?"
"그래"
피곤한 탓인지 다운된 내 기분에 승아는 은근히 내 눈치를 본다. 난 그녀의 불안을 걷어내주기 위해서
한마디 했다.
"너 자고 간다니까 좋네"
승아의 "후후" 하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도를 조금 높였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난 책을 좀 더 보다가 자야겠다고 하고선 술 때문에
피곤해하는 그녀를 재우곤 책상에 앉아 조용히 노트북를 켰다. 잠에 빠져든 승아를 모니터 옆으로 바라
보며 나는 오늘도 재윤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그리고 전자담배를 빨며 죽 글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댓글을 달까
말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그대로 죽 스킵해내려갔다.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3시 반.
노트북을 덮고 다시 곤히 잠에 빠져든 승아의 란제리 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예쁘고 섹시했다. 심지어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마저도 섹시했다.
그녀는 유학 시절 마지막 학기에 실연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학점에 대대적인 빵구가 났고, 결국에는
한 학기를 다시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갑작스레 어려워진 집안 형편 때문에 그냥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방황케 한 실연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
나로서는 그저 유학 시절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가벼운 연인으로 생각했던 것 뿐이었는데 그녀는
그게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기억에서 사라졌던 그녀를 만난 것은 지난 달, 클럽 근처의 포차에서였다. 승아가 먼저 나를
알아봤고,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쿨하게 인사를 나눈 우린 합석을 했고, 그 다음 날 따로 만나서
끊어진 인연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식 연인은 아니다. 그저…
'아니, 가볍게 생각하는건 이번에도 나 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또 부담스러워졌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 살짝 깬 그녀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품을 파고 들었다. 난 그런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끌어안았다. 가볍게 아랫도리가 반응했지만 무시했다.
문득 승아에 대한 내 감정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보았다.
정말 예쁘고, 착하고, 내 말이라면 끔뻑 죽는 그녀가 고맙고 편하지만, 그 뿐이다. 설레임도, 특별한
감정도 없다. 마치 그냥 길거리의 예쁜 여자를 보고 순간 혹하기는 해도, 그 이상의 감정이 없는 뭐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다만 왠지 말 수가 많이 줄고, 그저 철없이 어리기만 한 것 같았던 그녀의 눈빛 속에서 이유 모를 애틋
한 감정을 자꾸 느끼게 된다는게 좀 더 스페셜한 것의 전부랄까.
아주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잔정이 남은 섹스파트너 수준이다. 아니, 그렇게 말하자면 또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긴 한데… 미안하지만 그렇다.
그보다 재윤에게는 남자가 생긴 모양이다. 송재윤. 두 달 전에 헤어진 내 또다른 전 여자친구. 예술가
삘 넘치고 말 잘하고 재미있는 애. 무엇보다 밤에 장난 아닌 애.
전 여자친구에 대한 설명치고는 부실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 자체가 별로 없고…무엇보다 그녀에게 허언증이 있었다. 헤어진 이유도 그것이었고, 헤어진 이후
뒤늦게 재윤에 대해 좀 알아보다가 그녀가 나에게 말한 자신에 대한 정보 거의 전부가 거짓말이었단
사실을 알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와선 별로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녀에게는 또 다르겠지. 어쨌거나 남자가 생긴
이상 재윤에 대한 내 마음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적막 속에서 승아의 숨소리가 들렸다.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잠에 빠져든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는다.
프리랜서라고는 해도 두 달 째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고 있다. 사실상의 백수다. 이제 곧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데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다. 목표도 없고 무미건조한 삶이다. 여자애들하고 노는 것을 제외
하면 즐거운 것조차 없다. 그것도 좀 질린다.
영원히 한량처럼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것이 없는 삶은 역시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요즘 갖고 싶은게 생기기는 했다. 직업이다. 치열하게 출퇴근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신경
써가며 눈치보고 일에 찌든 하루하루를 잠깐 맛보고 싶긴 하다. 배부른 생각이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피곤한지 뒷 목이 뻐근하다. 그래도 잠은 오지 않는다. 두통이 슬슬 시작되는 것 같다. 짜증이 난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승아에게는 언제쯤 관두자는 말을 꺼낼까. 며칠 전 그녀가 약을 먹는 것을 보았다. 우울증
약이었다. 집이 생각보다 많이 어려워진 모양이다. 그 와중에 나는 하루에 한번… 아니 어쩔 때는
이틀에 한번 꼴로 잠깐 연락하고…. 그녀의 전화도 무시하기 일쑤.
억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승아는 아마 미치도록 괴롭지 않을까.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에
좀 타이밍이 좋지 않은 것 같다는 핑계로 나는 이렇게 그녀와의 새로운 만남을 3개월째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헤어져야 할 것 같다. 이유는 점점 그녀가 더 나에게 의지하는 것이 느껴지기에.
참으로 무책임한 말 같지만, 나는 솔직히 결국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기분 때문에 책임지겠노라고
선언하는 년놈들이 더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변명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를 떠나간 여자애들은 대부분 차라리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들
말했다. 어쨌거나 난 승아를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잠이 오지 않으니 자기 전에 영화라도 한 편 볼 생각이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승아가 눈을 뜰 무렵 그제서야 피곤에 쩔어 겨우 잠에 빠져들겠지.
난 노트북을 다시 펴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