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녀와 만난지 2년째 되는 날.
작년의 오늘은 까맣게 잊고 넘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깨질 뻔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잊을게
따로 있지, 하겠지만 신제품 런칭 일정 맞추느라고 잠도 못자고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던 상황 속에서
힌트 한번 주지 않고서야 사람이 잊는게 어쩌면 더 당연하지 않느냐고 변명해 본다.
사실 그리고 원래 평소에 기념일 같은 거 안 챙기는 그녀 아니었던가. 그녀가 그토록이나 화를 냈던 것
은 기념일 따위가 아니라, 소원해진 관계 그 자체에 대한 불안 때문임을 내 모르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름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진작부터 끝내주는 뷰의 텐텐 붙여 인당 9만원짜리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저번에 보고 예쁘다고 했던
그 36만원짜리 시계도 지르고, 드라이빙 코스까지 미리 그저께 한번 미리 돌아보고. 완벽히 준비했다.
그리고 항상 뭔가 제대로 마음 먹고 준비하면 꼭 아주 제대로 어그러지는 개좆같은 내 삶의 징크스를
이번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무교 주제에 어딘가에 기도까지 해놓고.
그렇게 출발한 하루. 오전부터 날씨도 좋다.
"난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녀 집 앞까지 차를 몰고 가서 태우노라니 왠지 컨디션이 별로인 그녀.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옷도
대충 입고 나온 것을 보니 이번에는 그녀가 오늘이 우리의 2년째 되는 날임을 모르는 것 같다. 허허,
뭐 차라리 잘 됐다. 쌤쌤인 거 아닌가.
"왜?"
"아냐, 이뻐서"
"참나…뭐 잘못 먹었냐"
연상의 그녀는 오늘도 시크한 한 마디를 날린다. 뭐, 첫 끝발이 개끗발이니 외려 지금부터 바닥치고
쭉쭉 연상가면 된다 생각하며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마음 다잡고 음악 틀고 출발.
"음악 별로다, 그냥 라디오 듣자"
"…그럼 다음 곡 들을까?"
"그냥 라디오 듣자"
어제, 몇 시간을 고민해서 짠 드라이브 뮤직 리스트는 그렇게 바로 짬 당하지만 좋아, 아직 기회는
많다 생각하며 라디오로 전환하며 드디어 큰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간만의 날씨 좋은 주말… 길은 과연 꽉꽉 막히고 오늘따라 씨발 좆같이 대가리부터 들이미는
끼어들기 차량 왜 이렇게 많냐. 개좆같은 택시 새끼들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생각하지만 오늘도
운전하며 욕했다간 또 쌈 날테니 아랫배 인덕심으로 꾹꾹 눌러참으며 웃는 얼굴 유지하며 살살 간다.
"아 차 진짜 많네"
"그러게"
은정이도 조금 짜증이 나는 것 같다. 다행히 다음 신호 제대로 받아서 쭉쭉 치고 나간다. 아 그래, 참
저 동네는 신호가 병신인지 꼭 저기만 지랄같이 막힌다. 여튼 붕붕싱싱 다시 기분좋게 가고 있노라니
그녀가 묻는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가?"
"밥 먹으러"
점심도 괜찮은데고, 저녁은 진짜 끝내주는데야. 하고 속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왠일로 오늘따라 얘가
"나 오늘은 밥 먹고 싶어" 하고 먼저 음식 주제를 선정한다. 어? 거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그래? 스파게티 어때? 나 디게 맛있다고 소문난데 한 군데 알아냈는데"
"아 됐어, 밥 먹자. 나 어제도 면 먹고 속 별로 안 좋았단 말이야. 요새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 하면 꼭
속이 더부룩해"
"음… 오케이"
뭐 점심 예약은 취소하면 되지. 그리고 머릿 속에서 저번 날에 데이트 코스 짰던 곳 중 한식의 리스트
를 뽑아본다. 그리고 한수옥을 떠올린다. 거기 좀 가격이 세긴 한데.
"종로에 한수옥이라고 있는데…"
"아 됐어. 무슨 종로까지 가. 그냥 근처에서 먹어"
"아 간만에 주말인데 뭐 어때"
"아 싫어. 피곤해"
허허허, 이거 큰일이네. 이따가 삼성동도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다 어그러지는건데.
"그럼, 근처에 화평당 갈까?"
"아 거기 비싸잖아. 그냥 태평식당이나 가. 백반 먹자"
"…알았어"
아 된장, 옘병. 나는 도대체 왜 지난 일주일간 온 맛집 블로그는 다 돌아다니면서 개헛지랄을 했는고.
허탈했지만… 괜찮아. 하루에 식사는 세 번 하는거잖아? 아침 점심 날려도 저녁이 있잖아?
"짜"
뭔 심술인지 나는 맛만 좋구만 오늘따라 은정은 태평식당의 찌개도 짜다고 큰 소리로 말한다. 단골이
그러니까 아줌마가 더 민망해한다. 듣고는 다가와서 "짜요? 음… 제가 감기에 걸려서 간을 제대로 못
봐서, 짠가보네. 미안해요" 하고 사과까지 한다.
오늘 그녀의 심기가 별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잘못 건드리면 터질 분위기다. 에효. 그래 2주년
은 무슨 놈의 2주년이냐. 그래 씨발 그냥 저녁도 대충 짬스러운거나 쳐먹고 땡치자. 니나 내 팔자에
무신 놈의 고급 레스토랑이여.
짜증나고 지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본다. 오늘이 그 날인가? 그런가? 암만 그래도… 아 씨발 됐어.
뭔 씨발 생리를 온 세상 여자 중에 지 혼자 해? 라고 독하게 생각해보다가도 그냥 거동하기 싫은가,
보다 하고 대충 말 없이 밥을 떠먹는다.
사람이 밥을 한 끼 먹어도, 맛나고 기분좋게 먹으면 돈 10만원을 써도 하나도 안 아깝지만 좆같은
분위기 속에서 밥을 코로 먹는지 똥구멍으로 먹는지 모를 지경으로 먹으면 일원 한장도 아까워지는
법이다. 이번엔 내가 짜증이 났다.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짜증이다. 계산을 하고 나와 말
한마디 없이 차에 올랐다.
"어디 갈꺼야?"
내 표정이 찌그러진 것을 보고서야 그녀도 조금 말투가 누그러진다. 넌 꼭 다른 사람 속을 뒤집어
놔야 니 속이 좀 풀어지냐? 하는 말을 꿀꺽 속으로 삼킨다. 사실 그녀가 뭐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영화나 볼까?"
"…그래"
나는 차를 돌려 다시 동네 집 근처 베가박스로 향했다. 그래, 차라리 음악보다는 라디오가 나을 것
같다. 다른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싶었다.
영화는 뭐 그냥 쏘쏘. 딱히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할 게 없었다. 시계는
아직 4시. 밥 먹으러 어디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예약해놓은 것도 오후 7시고. 원래 계획대로였
으면 지금 우리는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었겠지만…
"까페나 가자"
"그래…"
아직도 내 머릿 속에는 벌써 많이 어그러진 오늘의 2주년 데이트를 한방에 멋지게 역전시킬, 55층
스카이뷰 레스토랑에서의 끝내주는 저녁식사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 흐름대로라면 뭐 커피나
마시고… 대충 동네 저기 번화가에서 뭐 아무거나 쳐먹고 그러다 말겠지.
흐, 그래, 그게 우리 연애지.
"뭘 혼자 웃어?"
"아니야"
혼자 씁쓸하게 웃는 나에게 그녀는 물었고, 난 고개를 저으며 까페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우리는 둘 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까페 안에 들이치는 겨울 낮의 환한 햇살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잡지를 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허무하게 한 시간을 보냈다.
시계를 슥 보니까 4시 58분. 벌써 다섯 시다. 그리고 난 당연히 안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저녁은 맛있는거 먹자"
"뭐 먹을건데? 먹을 것도 없잖아"
역시나 시큰둥한 그녀. 난 말했다.
"지금 집에 들어가서, 이쁘게 꾸며"
"왜?"
"근사한데 갈거야"
"어디 가는데?"
"이런 기회 자주 안 와. 1년에 한 두번이야. 결정해. 싫음 말고. 싫으면 이렇게 우거지상하고 대충
뒹굴대다 대충 또 맛없는거나 먹고 배 채우고 졸려서 집에 자러가야 될거야"
내 말에 그녀는 픽 웃더니 "아 귀찮은데 왜 그래… 어디 갈건데" 하고 또 묻는다. 난 웃으며 "빨리
결정해. 6천원짜리 밥집 가서 배나 채울거야, 아니면 간만에 바람도 쐬고 맛나는 것도 먹을래?"
하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알았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을 해낸 것일까.
"화장이 다 붕 떴어.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아 안 갈래"
1시간 동안 샤워에 화장에 옷 고르기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다 꾸며놓고서는 또 우는 소리를 한다.
이번에는 나도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아 세상에서 제일 이쁘니까 대충하고 나와. 어휴, 그냥 마녀가 독사과 들고 쫒아오겠네"
"됐어. 넌 어쩜 그렇게 후진 멘트를 잘도 하냐"
"좀 받아줘라.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아 진짜 무뚝뚝해"
말은 그래도 우리 둘 다 좀 신이 났다. 그래, 나도 기운이 난다. 나도 그녀의 집 화장실에서 바람에 흐트
러진 머리를 다시 이쁘게 세팅하고 나니 좀 간지가 나는 것도 같다. 해는 기울었고 우리는 삼성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막히지는 않았다.
"치…"
서울시의 야경이 다 보이는 끝내주는 뷰의 예약석에 인도받은 그녀는 "와" 하는 감탄사 대신에 또 그
치, 하는 코웃음부터 낸다. 나도 너털웃음이 난다.
"야, 너는 어떻게 콧방귀부터 뀌냐. 와, 하고 놀래는게 정상적인 반응 아니냐?"
은정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야효, 우리 꼬맹이 그냥 오늘 하루 나 여기 데려오고 싶어서 안절부절한게 귀여워서 그런다, 왜. 난
니가 하루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길래 뭐 있나 했지. 그게 이거였구만."
그런가. 그래, 티는 났겠지. 아 그러면 너도 좀 맞춰주면 안되냐? 에휴. 그래도 뭐 꼭 싫진 않다.
"어쨌든, 좋지?"
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좋다. 근데 여기 비싼데 왜 이런데를 데리고 왔어. 돈도 못 벌면서"
"아 내가 너 제대로 된 데서 밥 한끼 사줄 돈이 없을까 봐?"
"어"
화사하게 꾸민 그녀와 멋진 곳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는다…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데 이게 참
쉽지가 않았다. 입으로야 장난스레 툴툴대도 벌써 표정부터가 밝은 그녀를 보노라니 나까지 기분이
좋다. 진작 자주 이런 데나 다닐걸. 동네 돈까스집 열 번 갈 돈 모으면…아 그래도 솔직히 10번이면
그게 더 낫긴 낫겠지. 음.
"맛있지?"
"어"
"난 해산물 요리가 정말 좋아"
맛나게 먹어주는 그녀를 보노라니 내가 절로 배가 부른 기분이다. 그리고는 스윽 선물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포장을 보며 깜짝 놀라는 그녀.
"2주년 선물이야. 작년에 깜박하고 넘어가는 바람에 올해는 좀 근사한 걸로 했어"
어디 영화 속 주인공들이야 이렇게 프로포즈라도 하겠지만, 그건 아니고. 일단 나는 결혼할 준비도
안 됐고 말이지. 선물도 또 더 비싼 진짜 쥬얼리들이야 무리고, 이렇게 준명품 급의 시계로…
아 근데 씨발 솔직히 36만원이 어디 애 이름은 아니잖아.
"뜯어봐도 돼?"
"어"
포장을 뜯어본 그녀는 "참…넌 꼭…에휴 에휴. 그래, 고마워, 잘 쓸께" 하면서 연신 한숨을 쉬고는
웃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 본 그녀는 꼭 맞는다면서 잘 쓰겠노라고 했다.
"난 선물 준비 못했어. 미안해"
"괜찮아"
"대신에 내일이라도…"
"됐어 정말로. 아 내가 뭐 바라는거 봤냐. 그저 나는 항상, 항상! 그저 너의 그 육체적…"
"됐거든?"
섹드립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질렸다면서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간만에 맛있게 먹는 은정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좋았다.
"오늘 고마웠어"
집에 가의 다 온 그녀는 내리기 전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나도 좋았어. 종종 그런데 가서 먹고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은정은 "됐어. 니 말 대로 1년에 한 두번이나 가는거지 비싸게 뭐하는
거야. 걍 배나 채우면 되지" 하고는 거절했다. 그래, 사실 자주 가기는 무리지.
"그래"
그 말과 함께 난 한 손을 뻗어 은정의 손을 잡았다. 은정은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거야?"
"뭘?"
"바로 집에 갈거야?"
"나? 아니면 너?"
"아 너"
아 무슨 서운한 질문을 하고 그래.
"당연히 자고 가야지"
"어디서?"
"너네 집에서"
"됐거든?"
은정은 내가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을 항상 꺼려했다.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 답하기도 했지. 너가
자꾸 나 사는 집에 드나들면, 아무리 니가 남자친구라도 너무 벌거벗는 기분이라서 싫다고.
그녀의 표현이 좀 후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넘어가곤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날이 날이잖아.
"은정아"
"왜"
"손만 잡고 잘께"
은정은 내 말에 웃지도 않았다. 그냥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피곤하면 그냥 자고 가던가"
"암만 피곤하고, 더 피곤해지더라도 자고 가야지 당연히"
그렇게 우리는 함께,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사실 별로 그리 멋지지도, 좋지도 않은 2주년의 날이었
지만… 적어도 내가 남자인 이상, 지금 이 순간부터 앞으로의 몇 시간은 정말 좋으리라 확신한다. 그래.
작년의 오늘은 까맣게 잊고 넘어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깨질 뻔 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그래도 잊을게
따로 있지, 하겠지만 신제품 런칭 일정 맞추느라고 잠도 못자고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던 상황 속에서
힌트 한번 주지 않고서야 사람이 잊는게 어쩌면 더 당연하지 않느냐고 변명해 본다.
사실 그리고 원래 평소에 기념일 같은 거 안 챙기는 그녀 아니었던가. 그녀가 그토록이나 화를 냈던 것
은 기념일 따위가 아니라, 소원해진 관계 그 자체에 대한 불안 때문임을 내 모르지 않는다.
바로 그래서…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름을 확인시켜주기 위하여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진작부터 끝내주는 뷰의 텐텐 붙여 인당 9만원짜리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저번에 보고 예쁘다고 했던
그 36만원짜리 시계도 지르고, 드라이빙 코스까지 미리 그저께 한번 미리 돌아보고. 완벽히 준비했다.
그리고 항상 뭔가 제대로 마음 먹고 준비하면 꼭 아주 제대로 어그러지는 개좆같은 내 삶의 징크스를
이번 딱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무교 주제에 어딘가에 기도까지 해놓고.
그렇게 출발한 하루. 오전부터 날씨도 좋다.
"난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녀 집 앞까지 차를 몰고 가서 태우노라니 왠지 컨디션이 별로인 그녀. 화장도 제대로 안 하고 옷도
대충 입고 나온 것을 보니 이번에는 그녀가 오늘이 우리의 2년째 되는 날임을 모르는 것 같다. 허허,
뭐 차라리 잘 됐다. 쌤쌤인 거 아닌가.
"왜?"
"아냐, 이뻐서"
"참나…뭐 잘못 먹었냐"
연상의 그녀는 오늘도 시크한 한 마디를 날린다. 뭐, 첫 끝발이 개끗발이니 외려 지금부터 바닥치고
쭉쭉 연상가면 된다 생각하며 좋게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마음 다잡고 음악 틀고 출발.
"음악 별로다, 그냥 라디오 듣자"
"…그럼 다음 곡 들을까?"
"그냥 라디오 듣자"
어제, 몇 시간을 고민해서 짠 드라이브 뮤직 리스트는 그렇게 바로 짬 당하지만 좋아, 아직 기회는
많다 생각하며 라디오로 전환하며 드디어 큰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간만의 날씨 좋은 주말… 길은 과연 꽉꽉 막히고 오늘따라 씨발 좆같이 대가리부터 들이미는
끼어들기 차량 왜 이렇게 많냐. 개좆같은 택시 새끼들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생각하지만 오늘도
운전하며 욕했다간 또 쌈 날테니 아랫배 인덕심으로 꾹꾹 눌러참으며 웃는 얼굴 유지하며 살살 간다.
"아 차 진짜 많네"
"그러게"
은정이도 조금 짜증이 나는 것 같다. 다행히 다음 신호 제대로 받아서 쭉쭉 치고 나간다. 아 그래, 참
저 동네는 신호가 병신인지 꼭 저기만 지랄같이 막힌다. 여튼 붕붕싱싱 다시 기분좋게 가고 있노라니
그녀가 묻는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가?"
"밥 먹으러"
점심도 괜찮은데고, 저녁은 진짜 끝내주는데야. 하고 속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왠일로 오늘따라 얘가
"나 오늘은 밥 먹고 싶어" 하고 먼저 음식 주제를 선정한다. 어? 거기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그래? 스파게티 어때? 나 디게 맛있다고 소문난데 한 군데 알아냈는데"
"아 됐어, 밥 먹자. 나 어제도 면 먹고 속 별로 안 좋았단 말이야. 요새 밀가루 음식만 먹었다 하면 꼭
속이 더부룩해"
"음… 오케이"
뭐 점심 예약은 취소하면 되지. 그리고 머릿 속에서 저번 날에 데이트 코스 짰던 곳 중 한식의 리스트
를 뽑아본다. 그리고 한수옥을 떠올린다. 거기 좀 가격이 세긴 한데.
"종로에 한수옥이라고 있는데…"
"아 됐어. 무슨 종로까지 가. 그냥 근처에서 먹어"
"아 간만에 주말인데 뭐 어때"
"아 싫어. 피곤해"
허허허, 이거 큰일이네. 이따가 삼성동도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다 어그러지는건데.
"그럼, 근처에 화평당 갈까?"
"아 거기 비싸잖아. 그냥 태평식당이나 가. 백반 먹자"
"…알았어"
아 된장, 옘병. 나는 도대체 왜 지난 일주일간 온 맛집 블로그는 다 돌아다니면서 개헛지랄을 했는고.
허탈했지만… 괜찮아. 하루에 식사는 세 번 하는거잖아? 아침 점심 날려도 저녁이 있잖아?
"짜"
뭔 심술인지 나는 맛만 좋구만 오늘따라 은정은 태평식당의 찌개도 짜다고 큰 소리로 말한다. 단골이
그러니까 아줌마가 더 민망해한다. 듣고는 다가와서 "짜요? 음… 제가 감기에 걸려서 간을 제대로 못
봐서, 짠가보네. 미안해요" 하고 사과까지 한다.
오늘 그녀의 심기가 별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잘못 건드리면 터질 분위기다. 에효. 그래 2주년
은 무슨 놈의 2주년이냐. 그래 씨발 그냥 저녁도 대충 짬스러운거나 쳐먹고 땡치자. 니나 내 팔자에
무신 놈의 고급 레스토랑이여.
짜증나고 지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본다. 오늘이 그 날인가? 그런가? 암만 그래도… 아 씨발 됐어.
뭔 씨발 생리를 온 세상 여자 중에 지 혼자 해? 라고 독하게 생각해보다가도 그냥 거동하기 싫은가,
보다 하고 대충 말 없이 밥을 떠먹는다.
사람이 밥을 한 끼 먹어도, 맛나고 기분좋게 먹으면 돈 10만원을 써도 하나도 안 아깝지만 좆같은
분위기 속에서 밥을 코로 먹는지 똥구멍으로 먹는지 모를 지경으로 먹으면 일원 한장도 아까워지는
법이다. 이번엔 내가 짜증이 났다.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모르는 짜증이다. 계산을 하고 나와 말
한마디 없이 차에 올랐다.
"어디 갈꺼야?"
내 표정이 찌그러진 것을 보고서야 그녀도 조금 말투가 누그러진다. 넌 꼭 다른 사람 속을 뒤집어
놔야 니 속이 좀 풀어지냐? 하는 말을 꿀꺽 속으로 삼킨다. 사실 그녀가 뭐 잘못한 것도 없지 않나.
"영화나 볼까?"
"…그래"
나는 차를 돌려 다시 동네 집 근처 베가박스로 향했다. 그래, 차라리 음악보다는 라디오가 나을 것
같다. 다른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싶었다.
영화는 뭐 그냥 쏘쏘. 딱히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할 게 없었다. 시계는
아직 4시. 밥 먹으러 어디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예약해놓은 것도 오후 7시고. 원래 계획대로였
으면 지금 우리는 인사동 거리를 걷고 있었겠지만…
"까페나 가자"
"그래…"
아직도 내 머릿 속에는 벌써 많이 어그러진 오늘의 2주년 데이트를 한방에 멋지게 역전시킬, 55층
스카이뷰 레스토랑에서의 끝내주는 저녁식사를 그리고 있긴 하지만, 이 흐름대로라면 뭐 커피나
마시고… 대충 동네 저기 번화가에서 뭐 아무거나 쳐먹고 그러다 말겠지.
흐, 그래, 그게 우리 연애지.
"뭘 혼자 웃어?"
"아니야"
혼자 씁쓸하게 웃는 나에게 그녀는 물었고, 난 고개를 저으며 까페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우리는 둘 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까페 안에 들이치는 겨울 낮의 환한 햇살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잡지를 보았다. 그렇게 말없이 허무하게 한 시간을 보냈다.
시계를 슥 보니까 4시 58분. 벌써 다섯 시다. 그리고 난 당연히 안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저녁은 맛있는거 먹자"
"뭐 먹을건데? 먹을 것도 없잖아"
역시나 시큰둥한 그녀. 난 말했다.
"지금 집에 들어가서, 이쁘게 꾸며"
"왜?"
"근사한데 갈거야"
"어디 가는데?"
"이런 기회 자주 안 와. 1년에 한 두번이야. 결정해. 싫음 말고. 싫으면 이렇게 우거지상하고 대충
뒹굴대다 대충 또 맛없는거나 먹고 배 채우고 졸려서 집에 자러가야 될거야"
내 말에 그녀는 픽 웃더니 "아 귀찮은데 왜 그래… 어디 갈건데" 하고 또 묻는다. 난 웃으며 "빨리
결정해. 6천원짜리 밥집 가서 배나 채울거야, 아니면 간만에 바람도 쐬고 맛나는 것도 먹을래?"
하고 물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는 "알았어"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가 오늘 처음으로 웃음다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을 해낸 것일까.
"화장이 다 붕 떴어.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아 안 갈래"
1시간 동안 샤워에 화장에 옷 고르기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다 꾸며놓고서는 또 우는 소리를 한다.
이번에는 나도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아 세상에서 제일 이쁘니까 대충하고 나와. 어휴, 그냥 마녀가 독사과 들고 쫒아오겠네"
"됐어. 넌 어쩜 그렇게 후진 멘트를 잘도 하냐"
"좀 받아줘라. 넌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아 진짜 무뚝뚝해"
말은 그래도 우리 둘 다 좀 신이 났다. 그래, 나도 기운이 난다. 나도 그녀의 집 화장실에서 바람에 흐트
러진 머리를 다시 이쁘게 세팅하고 나니 좀 간지가 나는 것도 같다. 해는 기울었고 우리는 삼성동으로
향했다. 다행히 그렇게까지 막히지는 않았다.
"치…"
서울시의 야경이 다 보이는 끝내주는 뷰의 예약석에 인도받은 그녀는 "와" 하는 감탄사 대신에 또 그
치, 하는 코웃음부터 낸다. 나도 너털웃음이 난다.
"야, 너는 어떻게 콧방귀부터 뀌냐. 와, 하고 놀래는게 정상적인 반응 아니냐?"
은정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야효, 우리 꼬맹이 그냥 오늘 하루 나 여기 데려오고 싶어서 안절부절한게 귀여워서 그런다, 왜. 난
니가 하루종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길래 뭐 있나 했지. 그게 이거였구만."
그런가. 그래, 티는 났겠지. 아 그러면 너도 좀 맞춰주면 안되냐? 에휴. 그래도 뭐 꼭 싫진 않다.
"어쨌든, 좋지?"
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좋다. 근데 여기 비싼데 왜 이런데를 데리고 왔어. 돈도 못 벌면서"
"아 내가 너 제대로 된 데서 밥 한끼 사줄 돈이 없을까 봐?"
"어"
화사하게 꾸민 그녀와 멋진 곳에서 근사한 저녁을 먹는다…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데 이게 참
쉽지가 않았다. 입으로야 장난스레 툴툴대도 벌써 표정부터가 밝은 그녀를 보노라니 나까지 기분이
좋다. 진작 자주 이런 데나 다닐걸. 동네 돈까스집 열 번 갈 돈 모으면…아 그래도 솔직히 10번이면
그게 더 낫긴 낫겠지. 음.
"맛있지?"
"어"
"난 해산물 요리가 정말 좋아"
맛나게 먹어주는 그녀를 보노라니 내가 절로 배가 부른 기분이다. 그리고는 스윽 선물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포장을 보며 깜짝 놀라는 그녀.
"2주년 선물이야. 작년에 깜박하고 넘어가는 바람에 올해는 좀 근사한 걸로 했어"
어디 영화 속 주인공들이야 이렇게 프로포즈라도 하겠지만, 그건 아니고. 일단 나는 결혼할 준비도
안 됐고 말이지. 선물도 또 더 비싼 진짜 쥬얼리들이야 무리고, 이렇게 준명품 급의 시계로…
아 근데 씨발 솔직히 36만원이 어디 애 이름은 아니잖아.
"뜯어봐도 돼?"
"어"
포장을 뜯어본 그녀는 "참…넌 꼭…에휴 에휴. 그래, 고마워, 잘 쓸께" 하면서 연신 한숨을 쉬고는
웃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 본 그녀는 꼭 맞는다면서 잘 쓰겠노라고 했다.
"난 선물 준비 못했어. 미안해"
"괜찮아"
"대신에 내일이라도…"
"됐어 정말로. 아 내가 뭐 바라는거 봤냐. 그저 나는 항상, 항상! 그저 너의 그 육체적…"
"됐거든?"
섹드립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질렸다면서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간만에 맛있게 먹는 은정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좋았다.
"오늘 고마웠어"
집에 가의 다 온 그녀는 내리기 전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나도 좋았어. 종종 그런데 가서 먹고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은정은 "됐어. 니 말 대로 1년에 한 두번이나 가는거지 비싸게 뭐하는
거야. 걍 배나 채우면 되지" 하고는 거절했다. 그래, 사실 자주 가기는 무리지.
"그래"
그 말과 함께 난 한 손을 뻗어 은정의 손을 잡았다. 은정은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거야?"
"뭘?"
"바로 집에 갈거야?"
"나? 아니면 너?"
"아 너"
아 무슨 서운한 질문을 하고 그래.
"당연히 자고 가야지"
"어디서?"
"너네 집에서"
"됐거든?"
은정은 내가 그녀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을 항상 꺼려했다.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 답하기도 했지. 너가
자꾸 나 사는 집에 드나들면, 아무리 니가 남자친구라도 너무 벌거벗는 기분이라서 싫다고.
그녀의 표현이 좀 후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넘어가곤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날이 날이잖아.
"은정아"
"왜"
"손만 잡고 잘께"
은정은 내 말에 웃지도 않았다. 그냥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피곤하면 그냥 자고 가던가"
"암만 피곤하고, 더 피곤해지더라도 자고 가야지 당연히"
그렇게 우리는 함께, 그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사실 별로 그리 멋지지도, 좋지도 않은 2주년의 날이었
지만… 적어도 내가 남자인 이상, 지금 이 순간부터 앞으로의 몇 시간은 정말 좋으리라 확신한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