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뜻밖이었다. 7년이나 그 번호를 유지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그냥… 이유없이
문득 떠오른 옛 여자친구의 휴대폰에 찌질하게 전화를 걸고
"방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입니다"
멘트를 안주삼아 깊은 밤 홀로 찌질찌질 술 한잔 하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섯 번의 통화대기음에
이어 들려온 그 목소리는 오랜 기억을 새삼 일깨우는, 아주 그리운 목소리였다.
"…뭐야 대뜸"
다시, 또 한번
"이 가게는 아직까지 그대로네"
그 옆의 가게들, 맞은 편은 아예 건물까지 다 새로 바뀌었지만, 그 쭈꾸미 가게만큼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드릴까?"
"항아 쭈꾸미 두 개 주세요"
"네에"
난 시원한 콩나물 냉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현정 역시 한 숟가락 떠먹고는 날 향해 말했다.
"살 많이 쪘네"
나에게 하는 말인 줄은 알았지만 "그러게, 저 아줌마도 참…" 하고 말을 한번 흘렸다. 현정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건 그대로다"
이번에는 콩나물 냉국으로 받을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겨우 참아냈다.
"넌 하나도 안 변했다. 팔자주름 좀 깊어진거 빼고는"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특유의 상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저 웃음이 그렇게 좋았었지. 그 톡 쏘는
맛은 아무래도 세월의 빛에 바래어 미간과 팔자주름으로 조금 텁텁해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상큼하다.
"쭈구미 나왔습니다"
남자 알바생이 무쇠 후라이팬 위에 쭈꾸미 2인분과 불을 올렸다. 현정은 집게로 쭈꾸미를 조금 뒤적이다
말했다.
"와 너 독설한다. 살 쪘다고 해서 삐쳤냐? 완전 막말하네"
그렇지만 역시나 조금 신경 쓰였던지 잠시 후 입을 한번 빼쭉 내밀더니 물었다.
"근데 나 정말 그렇게 늙어보여?"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런 말에 민감해지고 그래. 그럴 나이긴 하지만"
뭔가 농담으로 던진다는게 자꾸 정색하게 만들 정도로 기분 나쁜 병신 개드립이 되어간다 싶어 "쏘리"
하고 사과하고는 나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넌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내가 많이 변했지. 완전 아저씨잖아"
"어, 너 완전 아저씨 됐어. 관리 좀 하지, 완전 실망이다. 너 뱃살 관리 안 해?"
자조적인 내 말에 위로는 커녕 바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그녀를 보며 난 웃었다. 그리고 나
역시 괜히 쭈꾸미를 뒤적였다. 현정은 곧이어 씁쓸하게 웃으며 오이를 베어물었다.
"그래도 넌 외모만 아저씨지, 난 법적으로 아줌마도 해봤잖아"
"오늘 소주 잘 받는데?"
"그러게"
벌써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다. 그나저나 오늘 쭈꾸미 왜 이렇게 매워.
"여기 이렇게 매웠나? 쓰으, 하아"
"그래? 난 먹을만한데. 이거 먹어라"
"아 근데 맛있긴 맛있다 진짜"
소주가 잘 받는 날. 꽤 빨리 반 병을 비웠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다. 쭈꾸미는 유난히 맵다. 말라 비틀
어진 당근을 씹으며 매운 입 안을 달랜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은 쭈꾸미로 향한다. 소주잔도 몇 차례나
오고간다.
슬슬 속도를 조절해도 놓으련만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진다. 매운 맛으로 한참 달아오른 혓바닥에 드디어
씁쓸함이 진해진 소주를 털어넣는다. 아직 밥도 볶기 전인데 3병째 접어들면서 우리는, 아니 나는 슬슬
벌써 뒷 일 걱정을 마음 속으로 시작한다.
'어쩌지'
상관없지 뭐. 현정이가 임자 있는 몸도 아니고, 어젯 밤 전화 속 그녀의 표현을 빌어 '갔다 왔는데' 뭘.
눈치볼 사람도 없고, 내숭 뺄 사이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그런데 참 좋다"
"뭐가?"
"너랑 이렇게 다시 술 마시고 있다는게. 참 새삼스럽다"
말 그대로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현정이는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후우"
뒤늦게 생각났다. 현정이는 뒤늦게 술이 확 오르는 스타일이다. 쭈꾸미 다 먹고 밥 두 개를 볶았는데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후우…" 하고 볼이 빵빵해지도록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벌겋다.
"나 속 안 좋아"
토하는건가 싶어서 바로 화장실이 어디냐고 여자 알바생한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팔을 붙잡았다.
"급한거 아니야"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물 한잔 마신 그녀가 말했다.
"그만 먹고 일어서자"
뜬금없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현정이는 손으로 벌개진
얼굴을 부채질 하면서 계속 입으로 바람을 불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겨우 8시 반.
하지만 속 안 좋다는데 2차 가자고 하기도 뭐하고, 배 터지겠는데 커피 마시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렇게 들여보내기도 아쉽고, 피차 누구 눈치 볼 일 없고. 7년 만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 속 안 좋은데, 쉬러 가자"
현정이는 픽 하고 코웃음을 친 후 "너 나랑 잘려고?" 하고 물었다. 약간의 힐난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뉘앙스의 질문. 왠지 모르겠지만 그 질문에 괜히 '어? 그러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1초간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애도 없고, 넌 돌싱이고, 난 노총각이고,
무엇보다 꼭 거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 뭐 다른거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도 뭐하고…"
"아, 됐어, 이거 놔"
실실 웃으며 손을 빼는 그녀. 황당하고 난처한 요구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뒷머리 긁적
이며 "아 그런가? 미안" 하기도 싫었다. 아니 그리고 진짜 정말로, 거시기 때문이 아니라…
"씻고 편하게 누워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그 말에 현정이가 쿡쿡 웃었다. 내 말이 너무 유치했나. 야 근데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너한테
뭐 진짜 그거 때문에 징징대겠니. 그냥…
조용히 깊은 정, 또 다른 그 누구에게는 못할 마음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 남녀가 단둘이 밤새도록…
"…내가 이혼녀라고, 너도 내가 쉬워보여?"
순간 좀 당혹스러웠다. 얘가 지금 정색을 하려다가 겨우 참고 한마디 던진건지, 아니면 무언가의 확인을
해두고 싶은 것인지. 그저 흔한 "너 내가 쉬워보여?" 라는 말과, 돌싱의 한 마디는 무게감이 달랐다.
만약 전자라면 내가 서운했다.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보였나. 하지만 곧 나 혼자서
헛지랄에 김치국 배터지게 말아먹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운 '그녀', 묻어둔 정을 다시 간만에
애틋하게 나누어보고 싶은건 그저 내 생각이고, 그녀 입장에선 그냥 간만에 연락 닿은, 이제는 그냥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희석된 오래 전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잖는가.
그게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그보다 생각보다 현정이에게 이혼의 상처가 꽤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도' 라는 말을 보니
차마 말 못할 구질구질한 일도 몇 번 겪었겠고. 그런 상황이면 방금 전의 내 말들이 얼마나 유치하고 뻔
하게 느껴졌을까.
어쨌든, 만에 하나 때문에라도 확실히 해두자.
"7년 전 여자친구 번호를 아직도 못 잊고 전화하는데 그게 널 쉽게 보는 거겠냐…"
"…"
문득 7년 전 그 날이 생각났다. 지금과도 비슷했다. 그때도 같이 모텔로 향하던 길이었지. 모텔을 향해
가던 길에서 그녀는 문득 밑도 끝도 없이 "우리 헤어지자" 라고 말했었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인데 벌써
그게 7년 전이다.
"그래서 뭐"
현정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편하게 술 한병 사가서 이야기하자. 자고 가"
내 말에 현정은 길게 한숨을 쉬다가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하여간 모텔 고르는 센스하고는…어쩜 나이 먹고도 한 개도 안 늘었냐"
현정의 농담 어린 핀찬에 난 웃으며 변명했다.
"고른게 아니라 와보니 이런 걸,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하지만 그녀는 쟈켓을 벗으며 말했다.
"호텔에 못 데리구 가면 최소한 그럴싸한 모텔은 알아둬라 쫌. 그래야 어린 여자애들이 막 뭐든지 능수능란한
오빠한테 빠져서 홀릴거 아니야. 너 그래야 장가간다."
"어이쿠, 모텔학 박사님 나오셨네"
"나 아직도 생각난다. 그 철산에 그 무슨 고시촌 같은 모텔방. 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 아 그리운 이야기다. 난 한참을 웃다가 모든 것을 다 잊었을 것만 같았던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많이 묘해졌다.
"먼저 씻어"
"어. 아 속 안 좋아"
현정은 타올을 젖은 머리에 두건처럼 둘르고, 바디타올도 몸에 두르고 나왔다.
"너 씻어"
샤워실로 들어서며 새삼 힐끔 본 그녀의 몸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하지만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몸
역시 자랑스럽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관리 좀 할걸,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날이
어디 올 줄 알았나. 화장실 안 가득한 김.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저씨스러웠다.
살짝 좌절감을 느꼈지만 어쨌거나 구석구석 잘 씻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 7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김치국을
퍼마시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서로의 모든 것을 알던 사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가 된 지금. 그 세월의 갭을 오늘 밤 조금은 채워
보고 싶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니 이게 설레발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정말로 다시 한번…
<< 끝 >>
문득 떠오른 옛 여자친구의 휴대폰에 찌질하게 전화를 걸고
"방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입니다"
멘트를 안주삼아 깊은 밤 홀로 찌질찌질 술 한잔 하려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섯 번의 통화대기음에
이어 들려온 그 목소리는 오랜 기억을 새삼 일깨우는, 아주 그리운 목소리였다.
"…뭐야 대뜸"
다시, 또 한번
"이 가게는 아직까지 그대로네"
그 옆의 가게들, 맞은 편은 아예 건물까지 다 새로 바뀌었지만, 그 쭈꾸미 가게만큼은 그대로였다.
"어떻게 드릴까?"
"항아 쭈꾸미 두 개 주세요"
"네에"
난 시원한 콩나물 냉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현정 역시 한 숟가락 떠먹고는 날 향해 말했다.
"살 많이 쪘네"
나에게 하는 말인 줄은 알았지만 "그러게, 저 아줌마도 참…" 하고 말을 한번 흘렸다. 현정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싱거운 건 그대로다"
이번에는 콩나물 냉국으로 받을까 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겨우 참아냈다.
"넌 하나도 안 변했다. 팔자주름 좀 깊어진거 빼고는"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특유의 상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저 웃음이 그렇게 좋았었지. 그 톡 쏘는
맛은 아무래도 세월의 빛에 바래어 미간과 팔자주름으로 조금 텁텁해졌지만, 그래도 충분히 상큼하다.
"쭈구미 나왔습니다"
남자 알바생이 무쇠 후라이팬 위에 쭈꾸미 2인분과 불을 올렸다. 현정은 집게로 쭈꾸미를 조금 뒤적이다
말했다.
"와 너 독설한다. 살 쪘다고 해서 삐쳤냐? 완전 막말하네"
그렇지만 역시나 조금 신경 쓰였던지 잠시 후 입을 한번 빼쭉 내밀더니 물었다.
"근데 나 정말 그렇게 늙어보여?"
"…아니,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런 말에 민감해지고 그래. 그럴 나이긴 하지만"
뭔가 농담으로 던진다는게 자꾸 정색하게 만들 정도로 기분 나쁜 병신 개드립이 되어간다 싶어 "쏘리"
하고 사과하고는 나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넌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도 없어. 내가 많이 변했지. 완전 아저씨잖아"
"어, 너 완전 아저씨 됐어. 관리 좀 하지, 완전 실망이다. 너 뱃살 관리 안 해?"
자조적인 내 말에 위로는 커녕 바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그녀를 보며 난 웃었다. 그리고 나
역시 괜히 쭈꾸미를 뒤적였다. 현정은 곧이어 씁쓸하게 웃으며 오이를 베어물었다.
"그래도 넌 외모만 아저씨지, 난 법적으로 아줌마도 해봤잖아"
"오늘 소주 잘 받는데?"
"그러게"
벌써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다. 그나저나 오늘 쭈꾸미 왜 이렇게 매워.
"여기 이렇게 매웠나? 쓰으, 하아"
"그래? 난 먹을만한데. 이거 먹어라"
"아 근데 맛있긴 맛있다 진짜"
소주가 잘 받는 날. 꽤 빨리 반 병을 비웠는데도 전혀 취하지 않는다. 쭈꾸미는 유난히 맵다. 말라 비틀
어진 당근을 씹으며 매운 입 안을 달랜다. 그러면서도 연신 손은 쭈꾸미로 향한다. 소주잔도 몇 차례나
오고간다.
슬슬 속도를 조절해도 놓으련만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진다. 매운 맛으로 한참 달아오른 혓바닥에 드디어
씁쓸함이 진해진 소주를 털어넣는다. 아직 밥도 볶기 전인데 3병째 접어들면서 우리는, 아니 나는 슬슬
벌써 뒷 일 걱정을 마음 속으로 시작한다.
'어쩌지'
상관없지 뭐. 현정이가 임자 있는 몸도 아니고, 어젯 밤 전화 속 그녀의 표현을 빌어 '갔다 왔는데' 뭘.
눈치볼 사람도 없고, 내숭 뺄 사이도 아니고, 애들도 아니고.
"그런데 참 좋다"
"뭐가?"
"너랑 이렇게 다시 술 마시고 있다는게. 참 새삼스럽다"
말 그대로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현정이는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후우"
뒤늦게 생각났다. 현정이는 뒤늦게 술이 확 오르는 스타일이다. 쭈꾸미 다 먹고 밥 두 개를 볶았는데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후우…" 하고 볼이 빵빵해지도록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얼굴도 벌겋다.
"나 속 안 좋아"
토하는건가 싶어서 바로 화장실이 어디냐고 여자 알바생한테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녀는 내 팔을 붙잡았다.
"급한거 아니야"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물 한잔 마신 그녀가 말했다.
"그만 먹고 일어서자"
뜬금없었지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현정이는 손으로 벌개진
얼굴을 부채질 하면서 계속 입으로 바람을 불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겨우 8시 반.
하지만 속 안 좋다는데 2차 가자고 하기도 뭐하고, 배 터지겠는데 커피 마시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렇게 들여보내기도 아쉽고, 피차 누구 눈치 볼 일 없고. 7년 만에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 속 안 좋은데, 쉬러 가자"
현정이는 픽 하고 코웃음을 친 후 "너 나랑 잘려고?" 하고 물었다. 약간의 힐난과 당혹스러움이 섞인
뉘앙스의 질문. 왠지 모르겠지만 그 질문에 괜히 '어? 그러면 안되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1초간 곰곰히 생각해 본 결과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없다. 애도 없고, 넌 돌싱이고, 난 노총각이고,
무엇보다 꼭 거시기 때문이 아니라….
"어, 뭐 다른거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집에 가기도 뭐하고…"
"아, 됐어, 이거 놔"
실실 웃으며 손을 빼는 그녀. 황당하고 난처한 요구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뒷머리 긁적
이며 "아 그런가? 미안" 하기도 싫었다. 아니 그리고 진짜 정말로, 거시기 때문이 아니라…
"씻고 편하게 누워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그 말에 현정이가 쿡쿡 웃었다. 내 말이 너무 유치했나. 야 근데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너한테
뭐 진짜 그거 때문에 징징대겠니. 그냥…
조용히 깊은 정, 또 다른 그 누구에게는 못할 마음 속에 묻어둔 이야기들 남녀가 단둘이 밤새도록…
"…내가 이혼녀라고, 너도 내가 쉬워보여?"
순간 좀 당혹스러웠다. 얘가 지금 정색을 하려다가 겨우 참고 한마디 던진건지, 아니면 무언가의 확인을
해두고 싶은 것인지. 그저 흔한 "너 내가 쉬워보여?" 라는 말과, 돌싱의 한 마디는 무게감이 달랐다.
만약 전자라면 내가 서운했다. 조금 황당하기까지 했다. 정말 내가 그렇게 보였나. 하지만 곧 나 혼자서
헛지랄에 김치국 배터지게 말아먹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운 '그녀', 묻어둔 정을 다시 간만에
애틋하게 나누어보고 싶은건 그저 내 생각이고, 그녀 입장에선 그냥 간만에 연락 닿은, 이제는 그냥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이 희석된 오래 전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도 있잖는가.
그게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그보다 생각보다 현정이에게 이혼의 상처가 꽤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도' 라는 말을 보니
차마 말 못할 구질구질한 일도 몇 번 겪었겠고. 그런 상황이면 방금 전의 내 말들이 얼마나 유치하고 뻔
하게 느껴졌을까.
어쨌든, 만에 하나 때문에라도 확실히 해두자.
"7년 전 여자친구 번호를 아직도 못 잊고 전화하는데 그게 널 쉽게 보는 거겠냐…"
"…"
문득 7년 전 그 날이 생각났다. 지금과도 비슷했다. 그때도 같이 모텔로 향하던 길이었지. 모텔을 향해
가던 길에서 그녀는 문득 밑도 끝도 없이 "우리 헤어지자" 라고 말했었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인데 벌써
그게 7년 전이다.
"그래서 뭐"
현정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편하게 술 한병 사가서 이야기하자. 자고 가"
내 말에 현정은 길게 한숨을 쉬다가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하여간 모텔 고르는 센스하고는…어쩜 나이 먹고도 한 개도 안 늘었냐"
현정의 농담 어린 핀찬에 난 웃으며 변명했다.
"고른게 아니라 와보니 이런 걸,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하지만 그녀는 쟈켓을 벗으며 말했다.
"호텔에 못 데리구 가면 최소한 그럴싸한 모텔은 알아둬라 쫌. 그래야 어린 여자애들이 막 뭐든지 능수능란한
오빠한테 빠져서 홀릴거 아니야. 너 그래야 장가간다."
"어이쿠, 모텔학 박사님 나오셨네"
"나 아직도 생각난다. 그 철산에 그 무슨 고시촌 같은 모텔방. 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 아 그리운 이야기다. 난 한참을 웃다가 모든 것을 다 잊었을 것만 같았던 그녀가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다 기억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많이 묘해졌다.
"먼저 씻어"
"어. 아 속 안 좋아"
현정은 타올을 젖은 머리에 두건처럼 둘르고, 바디타올도 몸에 두르고 나왔다.
"너 씻어"
샤워실로 들어서며 새삼 힐끔 본 그녀의 몸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꼈다. 하지만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몸
역시 자랑스럽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관리 좀 할걸,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런 날이
어디 올 줄 알았나. 화장실 안 가득한 김.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아저씨스러웠다.
살짝 좌절감을 느꼈지만 어쨌거나 구석구석 잘 씻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 7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김치국을
퍼마시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서로의 모든 것을 알던 사이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가 된 지금. 그 세월의 갭을 오늘 밤 조금은 채워
보고 싶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아니 이게 설레발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정말로 다시 한번…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