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동남아 휴양지에서 저녁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야외 테라스에서
앉아마시는 커피 맛은 참 좋았다.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요?"
그녀는 잠깐 계산을 하더니 "23일이요. 3일 후에" 하고 대답했다. 난 묻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일 모레 돌아
가요"하고 말했다.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얼굴이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동글동글한 눈, 높지는 않아도 날이 살아있는 코, 앙증맞은 입술과
보조개, 가는 목, 어깨에서 살짝 말려들어간 웨이브 머리, 그리고 시원한 끈 원피스…
철썩이는 밤 파도소리와 저쪽에서 흥겹게 울려퍼지는 동남아 타악기 소리와 시원한 바람, 야자수와 백사장,
부드러운 그녀의 눈길, 이 모두가 꿈처럼 마냥 행복하고 아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이국만리에서 만난 그녀와의 이 짧은 만남 역시 좋았다.
"하루종일 습하고 푹푹 찌더니, 지금은 바람도 시원하고, 정말 좋네요"
"아예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어요. 그냥 여기서 살고 싶네요"
"아, 전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는 혼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회사를 관두자마자 도망치듯 일주일짜리 동남아 여행을
왔는데, 막상 오니 첫날은 좋았지만 그 다음 날부터 외로움만 배가 되었다고 했다. 치안이 불안하단 말에
밤늦게 혼자 돌아다닐 수도 없고 심지어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했단다. 그러다 커피나 마실까 하면서 답답
함을 달래러 나왔는데 내가 마침 "한국 분이세요? 혼자 오셨으면 같이 마실래요?" 하고 말을 건 것.
"박스씨는 해외로 여행 자주 다니세요?"
"자주는 아니고…1년에 서너번 정도?"
"와 멋지네요"
"그래봐야 맨날 홍콩 아니면 동남아에요. 예전에는 일로 자주 왔는데, 그러다보니 놀러가는 것도 자꾸 그쪽
으로 가게 되더라구요"
사실 뭔가 이야기 할수록 늘어졌다. 날씨 탓일까, 아니면 그냥 당장이라도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기분 탓
일까. 이 나른한 지상천국에서 한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아니 그 무엇보다 사실 우리 둘
의 대화파장은 그리 잘 맞는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흐흥'
그냥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게 차라리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어차피 나나 너나 숙소로
돌아가면 할 것도 없고 둘이 만난 김에 같이 놀기로 했다면, 그런데 말이 잘 안 통하면, 어색하고 실없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하는 것보다는 그냥 직설적인 질문이나 나누다가 딱 아다리 맞으면 슬슬 어른답게
노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박스 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직구를 던져왔다. 최소한 서로의 기분을 읽는 능력만큼은 거의
동급이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설마 혼자 왔겠어요?"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남자친구 있는데 혼자 왔는데요?"
아, 남자친구가 있구나. 차라리 잘됐다. 그러자 왠지 모를 악마의 의욕이 슬슬 타올랐다. 남친이 있는
여자라니, 으음. 이국만리에서 여자친구 여행 보내놓고 혼자 밤마다 전화기 앞에 두고 속타는 불쌍한
그 남자여…
"해외여행 따로 오면 없는 걸로 치는 거에요"
그녀는 픽하고 웃어주었다. 실없고 유치한 말이지만 웃어준게 고마웠다. 아 불쌍한 그녀의 남친. 늘어
지던 나의 기분은 슬슬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벌써 9시 넘었는데, 커피 다 마셨으면 우리 백사장 걸으면서 사진 좀 찍을래요?"
한국에서 9시면 초저녁이나 다름 없었겠지만, 이 곳에서는 7시만 넘어도 뭔가 저녁이 아닌 '밤'이라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바다에서 놀다보니, 혹은 바닷바람을 맞고 다니니 몸이 노곤해서 그런 것도 있겠
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어둑어둑한 느낌을 평소보다 훨씬 일찍 받다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요"
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우리는 연인처럼 두 손을 꼭 잡고 사박사박 백
사장을 걸었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도 묘하게 신호가 왔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잠깐 멈춰
섰다. 난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오겠네요. 달무리 장난 아닌데"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밤하늘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가벼운 콧바람과 함께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어차피 어두운 밤바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도 없다. 가벼운 키스
는 꽤 진한 키스가 되었고 입술을 떼고 나서 우리 둘은 어색하지만 뭔가 이미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익숙해져있었다. 오랫동안 백사장을 걸어서인지 쪼리를 신은 발가락 안쪽이 조금 쓰렸다.
"내일 아침에 같이 수영하지 않을래요? 저도 혼자 수영하는거 영 지루했는데"
"좋아요"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리조트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살 것 같았다. 아무리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역시 짠 바닷바람. 물로 시원하게
씻고 에어컨 바람 쐬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씻고 나오자마자 바로 입을 맞추고는
침대에 포개어졌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손에 쥐는 순간,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움찔
하며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받아야 돼"
어느 틈엔가 말을 놓은 그녀가 나를 살짝 밀어내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
가더니 "쉬잇" 하고 주의를 주었다. 남자친구인 듯 했다.
"어, 놀다 들어왔어. 응, 나른해. 재밌지. 근데 좀 지루해. 할 게 없으니까. 그러게, 같이 왔으면 더 좋았
을텐데. 내일도 야근이야? 맨날 힘드네. 나는 이렇게 놀구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뒤에서 슥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
지만 그녀는 그저 내 손 위에 손을 포개더니 깍지를 끼웠다. 그게 또 나를 자극했다.
"어? 어어. 그래? 내일 그럼 완전 늦게 끝나겠네? 오빠 나 없다고 또 막 밤새 술 먹고 그러는건 아니지?"
얼씨구. 지는 바람까지 피우는 주제에 남친한테 술단속이냐. 참 세상에 믿을 여자 없다. 하지만 어떠랴.
내 입장에선 그게 매력인데.
"응, 한국 돌아가면 많이 사랑해줄께. 어"
남친이 밤이 외롭다는 말이라도 했나. 허허. 참. 난 그녀를 뒤어서 슥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러운 몸이
내 품에 안겼다.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어, 내일 전화할께. 아 그르게 이 방만 와이파이가 안 잡힌대. 응, 알았어. 그럼
잘자구, 어어, 나두"
전화를 끊자마자 난 그녀를 꾸욱 끌어안았다. 맞은 편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쌍의 연인
그 자체였다. 그녀도 거울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돌아누워봐"
하지만 무어라 하는 대신 난 그녀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간밤에 그렇게 불태우고도 모자라서 우리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또다시 사랑이 배제된 사랑을 나누었다.
나른하게 누워있노라니 그녀가 내 팔베개를 한 채로 물었다.
"우리 한국에 가서도 만날 수 있을까?"
헛소리. 그저 잠깐의 기분에 묘한 가슴벅참을 느꼈는지 몰라도 피차 진지한 관계로 진행되기는 어려운
사이다. 저런 말에 휘둘려서 혼자 러브러브한 기분내면 곤란하다. 이런 애들이야말로 정작 딱 돌아서면
그만인 애들이니까. 바람은 피울 지언정 먼저 남친을 버리지는 않는 그런 타입의 여자. 척 보면 안다.
그렇지만 굳이 그녀의 이 야릇한 행복의 기분을 깨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만 있다면 한국이던 어디던 뭐…"
그래 '마음이 있다면' 이라는 전제, 얼마나 훌륭하냐. 그녀는 내 품을 파고 들었다. 난 이불을 들어 그녀
를 덮어주었다. 밤새 에어컨을 켜고 자서 목이 조금 칼칼했지만, 몸을 일으키기보다는 따뜻한 이불 속
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그 무엇이 어쨌든, 난 오늘 그녀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해주고 싶었다. 바다에 나가서 수영도 하고,
며칠간 봐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하지만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자서 많이 피곤했던지 그녀는 금방 또 잠에 빠져들었다. 귀중한 치유여행
의 반나절을 아무래도 원나잇 상대의 늦잠 때문에 날려보내야 할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내 연인, 내일부터는 다시 그 어느 누구의 오랜 연인으로 돌아가버릴 이 여자의 이 늦잠은 분명
그녀 안 마음 속 어딘가 삶의 고단함을 꽤나 많이 풀어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남자친구조차 이해해주지 못하는 왠지 모를 마음의 공허함을 이렇게 나로 풀어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나대로, 누군가가 단 하룻밤이나마 나를 필요로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나 나나 진정한 '치유 여행'을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중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국만리 남국의 휴양지 어느 허름한 리조트의 눅눅한 침대 위에서, 죄책감 어린 꿈과 함께 말이다.
앉아마시는 커피 맛은 참 좋았다.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요?"
그녀는 잠깐 계산을 하더니 "23일이요. 3일 후에" 하고 대답했다. 난 묻지도 않았지만 "나는 내일 모레 돌아
가요"하고 말했다.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얼굴이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동글동글한 눈, 높지는 않아도 날이 살아있는 코, 앙증맞은 입술과
보조개, 가는 목, 어깨에서 살짝 말려들어간 웨이브 머리, 그리고 시원한 끈 원피스…
철썩이는 밤 파도소리와 저쪽에서 흥겹게 울려퍼지는 동남아 타악기 소리와 시원한 바람, 야자수와 백사장,
부드러운 그녀의 눈길, 이 모두가 꿈처럼 마냥 행복하고 아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이국만리에서 만난 그녀와의 이 짧은 만남 역시 좋았다.
"하루종일 습하고 푹푹 찌더니, 지금은 바람도 시원하고, 정말 좋네요"
"아예 시간이 멈춰버리면 좋겠어요. 그냥 여기서 살고 싶네요"
"아, 전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는 혼자 여행을 왔다고 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회사를 관두자마자 도망치듯 일주일짜리 동남아 여행을
왔는데, 막상 오니 첫날은 좋았지만 그 다음 날부터 외로움만 배가 되었다고 했다. 치안이 불안하단 말에
밤늦게 혼자 돌아다닐 수도 없고 심지어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했단다. 그러다 커피나 마실까 하면서 답답
함을 달래러 나왔는데 내가 마침 "한국 분이세요? 혼자 오셨으면 같이 마실래요?" 하고 말을 건 것.
"박스씨는 해외로 여행 자주 다니세요?"
"자주는 아니고…1년에 서너번 정도?"
"와 멋지네요"
"그래봐야 맨날 홍콩 아니면 동남아에요. 예전에는 일로 자주 왔는데, 그러다보니 놀러가는 것도 자꾸 그쪽
으로 가게 되더라구요"
사실 뭔가 이야기 할수록 늘어졌다. 날씨 탓일까, 아니면 그냥 당장이라도 씻고 침대에 눕고 싶은 기분 탓
일까. 이 나른한 지상천국에서 한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기도 했지만… 아니 그 무엇보다 사실 우리 둘
의 대화파장은 그리 잘 맞는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흐흥'
그냥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게 차라리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어차피 나나 너나 숙소로
돌아가면 할 것도 없고 둘이 만난 김에 같이 놀기로 했다면, 그런데 말이 잘 안 통하면, 어색하고 실없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하는 것보다는 그냥 직설적인 질문이나 나누다가 딱 아다리 맞으면 슬슬 어른답게
노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박스 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그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직구를 던져왔다. 최소한 서로의 기분을 읽는 능력만큼은 거의
동급이다.
"여자친구가 있으면 설마 혼자 왔겠어요?"
웃으며 대답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남자친구 있는데 혼자 왔는데요?"
아, 남자친구가 있구나. 차라리 잘됐다. 그러자 왠지 모를 악마의 의욕이 슬슬 타올랐다. 남친이 있는
여자라니, 으음. 이국만리에서 여자친구 여행 보내놓고 혼자 밤마다 전화기 앞에 두고 속타는 불쌍한
그 남자여…
"해외여행 따로 오면 없는 걸로 치는 거에요"
그녀는 픽하고 웃어주었다. 실없고 유치한 말이지만 웃어준게 고마웠다. 아 불쌍한 그녀의 남친. 늘어
지던 나의 기분은 슬슬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벌써 9시 넘었는데, 커피 다 마셨으면 우리 백사장 걸으면서 사진 좀 찍을래요?"
한국에서 9시면 초저녁이나 다름 없었겠지만, 이 곳에서는 7시만 넘어도 뭔가 저녁이 아닌 '밤'이라는
느낌이다. 하루종일 바다에서 놀다보니, 혹은 바닷바람을 맞고 다니니 몸이 노곤해서 그런 것도 있겠
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어둑어둑한 느낌을 평소보다 훨씬 일찍 받다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요"
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쥐었다. 우리는 연인처럼 두 손을 꼭 잡고 사박사박 백
사장을 걸었다. 그저 손만 잡았을 뿐인데도 묘하게 신호가 왔다. 밤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잠깐 멈춰
섰다. 난 하늘의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비 오겠네요. 달무리 장난 아닌데"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밤하늘을 바라보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가벼운 콧바람과 함께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어차피 어두운 밤바다, 누구 하나 보는 사람도 없다. 가벼운 키스
는 꽤 진한 키스가 되었고 입술을 떼고 나서 우리 둘은 어색하지만 뭔가 이미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익숙해져있었다. 오랫동안 백사장을 걸어서인지 쪼리를 신은 발가락 안쪽이 조금 쓰렸다.
"내일 아침에 같이 수영하지 않을래요? 저도 혼자 수영하는거 영 지루했는데"
"좋아요"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리조트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살 것 같았다. 아무리 시원한 밤바람이라도 역시 짠 바닷바람. 물로 시원하게
씻고 에어컨 바람 쐬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와 그녀는 씻고 나오자마자 바로 입을 맞추고는
침대에 포개어졌다.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손에 쥐는 순간,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움찔
하며 시선을 돌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그녀의 휴대폰이었다.
"받아야 돼"
어느 틈엔가 말을 놓은 그녀가 나를 살짝 밀어내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
가더니 "쉬잇" 하고 주의를 주었다. 남자친구인 듯 했다.
"어, 놀다 들어왔어. 응, 나른해. 재밌지. 근데 좀 지루해. 할 게 없으니까. 그러게, 같이 왔으면 더 좋았
을텐데. 내일도 야근이야? 맨날 힘드네. 나는 이렇게 놀구 있는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뒤에서 슥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
지만 그녀는 그저 내 손 위에 손을 포개더니 깍지를 끼웠다. 그게 또 나를 자극했다.
"어? 어어. 그래? 내일 그럼 완전 늦게 끝나겠네? 오빠 나 없다고 또 막 밤새 술 먹고 그러는건 아니지?"
얼씨구. 지는 바람까지 피우는 주제에 남친한테 술단속이냐. 참 세상에 믿을 여자 없다. 하지만 어떠랴.
내 입장에선 그게 매력인데.
"응, 한국 돌아가면 많이 사랑해줄께. 어"
남친이 밤이 외롭다는 말이라도 했나. 허허. 참. 난 그녀를 뒤어서 슥 끌어안았다. 작고 부드러운 몸이
내 품에 안겼다.
"전화비 많이 나오겠다. 어, 내일 전화할께. 아 그르게 이 방만 와이파이가 안 잡힌대. 응, 알았어. 그럼
잘자구, 어어, 나두"
전화를 끊자마자 난 그녀를 꾸욱 끌어안았다. 맞은 편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쌍의 연인
그 자체였다. 그녀도 거울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있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돌아누워봐"
하지만 무어라 하는 대신 난 그녀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간밤에 그렇게 불태우고도 모자라서 우리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또다시 사랑이 배제된 사랑을 나누었다.
나른하게 누워있노라니 그녀가 내 팔베개를 한 채로 물었다.
"우리 한국에 가서도 만날 수 있을까?"
헛소리. 그저 잠깐의 기분에 묘한 가슴벅참을 느꼈는지 몰라도 피차 진지한 관계로 진행되기는 어려운
사이다. 저런 말에 휘둘려서 혼자 러브러브한 기분내면 곤란하다. 이런 애들이야말로 정작 딱 돌아서면
그만인 애들이니까. 바람은 피울 지언정 먼저 남친을 버리지는 않는 그런 타입의 여자. 척 보면 안다.
그렇지만 굳이 그녀의 이 야릇한 행복의 기분을 깨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만 있다면 한국이던 어디던 뭐…"
그래 '마음이 있다면' 이라는 전제, 얼마나 훌륭하냐. 그녀는 내 품을 파고 들었다. 난 이불을 들어 그녀
를 덮어주었다. 밤새 에어컨을 켜고 자서 목이 조금 칼칼했지만, 몸을 일으키기보다는 따뜻한 이불 속
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그 무엇이 어쨌든, 난 오늘 그녀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해주고 싶었다. 바다에 나가서 수영도 하고,
며칠간 봐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것도 좀 먹고.
하지만 어젯밤 제대로 잠을 못자서 많이 피곤했던지 그녀는 금방 또 잠에 빠져들었다. 귀중한 치유여행
의 반나절을 아무래도 원나잇 상대의 늦잠 때문에 날려보내야 할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내 연인, 내일부터는 다시 그 어느 누구의 오랜 연인으로 돌아가버릴 이 여자의 이 늦잠은 분명
그녀 안 마음 속 어딘가 삶의 고단함을 꽤나 많이 풀어줄 것이 분명했으니까…
남자친구조차 이해해주지 못하는 왠지 모를 마음의 공허함을 이렇게 나로 풀어내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나대로, 누군가가 단 하룻밤이나마 나를 필요로 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녀나 나나 진정한 '치유 여행'을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중인 것인지도 모른다.
이국만리 남국의 휴양지 어느 허름한 리조트의 눅눅한 침대 위에서, 죄책감 어린 꿈과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