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잠들어 서너시간 밖에 자지 못했지만 대여섯번이나 맞춰놓은 휴대폰 알람 덕분에 그는 오늘도
겨우 눈을 뜨고 준비해 간신히 전철에 몸을 싣는다. 어차피 앉아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만원 전철이
편하다. 한 팔은 전철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은 채 인파 속에서 그렇게 30분의 수면시간을 보장받는다.
그래, 그는 서서도 잘 잔다.
도착할 역 안내방송과 함께 신기하리만치 정확하게 눈을 뜨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전철역을 빠져나온다.
20분 남았다. 역을 빠져나와 조금 걷고, 회사 바로 앞의 까페에서 뜨끈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회사
건물에 들어선다.
카페인으로 잠도 쫒고, 소시민 라이프의 고단함을 이 커피 한 잔으로 달래보고자 함이다. 허세라고
해도 좋고, 된장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쌉싸름한 모닝커피 한잔만큼 자신을 달래주는
게 없는데.
출근 지문을 찍고 들어선 사무실. 매일 보는 얼굴들과 언제나처럼 인사를 나누고, 컴퓨터를 켠다.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스케쥴표와 대조하며 산적한 업무 중에서 다시 한번 우선 순위를 정해본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전을 일에 매진하며 흘려보낸다.
언제나처럼 동료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 한 대를 빠는데, 동료와 피우는
담배와 혼자 빠는 담배의 맛은 다르다. 나는 혼자 빠는 담배의 맛이 더 좋다.
기일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오늘도 의미없이 나의 미래를 떠올려본다. 꿈도 없고, 이루고 싶은 미래
따윈 사실 그려본 적도 없다. 그저 당장 이번 달의 카드값과 마이너스 통장 대출금은 언제쯤이면 다
갚을 수 있을까가 걱정이다.
시름이 깊다. 아니 사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꿈이라기보다는 그저 희망사항 같은 거지만. 그냥 뭐
적당히 나쁘지 않은 직장에서 내 또래보다 조금 더 나은 연봉 받으면서, 토끼 같은 마누라랑 함께 그저
주말이면 마트나 가고, 1년에 한 두번 해외여행이나 가고 뭐 그러면서 오순도순 살면 좋겠다 하고 생각
하지만 바로 그런 평범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나는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대박을 치거나, 로또에 맞거나.
로또야 가능성 없는 꿈이라도 치면 대박은 어떻게 칠까.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사실 거기까진 생각 안 하고 그냥 내 대출금 2천은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인터넷 보면 세상에 뭐
대박치는 사람이 종종 나오던데. 별 대단치도 않은 아이디어로.
대가리를 이리저리 굴려본다. 별 아이디어도 없지만, 어쩌다 뭔가 아이템이 떠올라도 그게 진짜 돈이
될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고, 그렇다 해도 그걸 추진하기 위한 돈은 쥐뿔도 없다.
야망… 한때는 품었었지. 언젠가는 분명 끝발 날리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남보다는 조금
나은 대가리로 최소한 남들보다는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주 솔직하게는 정말이지 내가 뭘
해도 최소한 남들보단 잘할 수 있으리라, 그런 오만같은 패기 하나도 살아있었다. 최선을 다해 열정을
불태우기도 하고, 자기 발전서에나 나올 법한 '치열한 삶'도 분명 살아봤다.
하지만 좌절을 몇 번 겪고 나니 남은 것은 빚이요, 늘어난 것은 나이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냥
힘이 쭉 빠진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점심시간 5분 남았다. 담배 한 대를 더 빨까 고민하다
그저 간만에 혜승이한테 전화나 건다.
"어, 나야. 뭐하냐, 요새 잘 지내냐?"
아무리 힘이 쭉쭉 빠지는 하루라도 기집애들 앞에서는 어깨 쭉 펴고, 당당한 목소리로, 가끔가다 꿈 속
에나 나오는 '리즈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감 있게 대화를 주고 받는다. 그녀들 앞에서만큼은 멋진 친구
멋진 오빠이고 싶다. 그리고 별로 확정적이지 않은 주말 약속 잡고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바닥에 버려진, 짓밟혀 찌그러진 꽁초 하나에 문득 내 삶이 겹쳐보이지만, 나에게는 아직 태울 수 있는
시간과 열정이 조금은 남았다고 애써 부정하고 사무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몸을 숨긴다.
그래, 아직은 태울 수 있는 시간과 열정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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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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