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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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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어물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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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물간 유행어가 되어버린 단어지만, 지선은 그 표현 이상으로 자신을 잘 그려낸 단어가 없다고 생각
했다.

가끔 냉장고 청소를 하기 위해 문을 열면 윗 선반 구석에 쳐박혀서 버릴까 말까 망설이다 일단은 냅두지만 
분명 근 몇 달 내로 입 속으로 들어갈 일 없는 저 말라비틀어진 북어포 같은 여자.

'흐흐'

하지만 그게 꼭 싫진 않다. 아니 북어포 같은게 싫지 않다는게 아니라, 지금같은 하루하루가 말이다. 대충
회사에 다녀오면 서둘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미드나 보면서 귤이나 까먹고 뒹굴대다 그렇게 하루가 슬슬
저물면 또 다음 날의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주말 늦은 밤에는 혼자 심야영화를 보고 오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좋다. 너무너무 편하고 세상 만사 이렇게 편하게만 흘러가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다. 아주 가끔 외로움이 느껴질 때면 인터넷에서 나같은 여자들끼리 조금 찌질하게 서로
위로해주며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나면 그걸로 끝.

이 얼마나 행복한 안빈낙도의 삶이란 말인가. 책과 미드와 커피와 군것질거리와 차곡차곡 쌓여가는 통장의
돈, 그리고 1년에 한두번 해외여행. 이거야말로 진정한 행복 아닐까? 

물론 이 행복하고 아늑한 삶의 유일한 방해자 '엄마님'이 종종 결혼이라는 키워드로 나를 괴롭히지만…

'음'

서른두살이라는 나이… 그래, 나 역시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부담 때문에 더 이렇게 '건어물
녀'로서 도피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뭐 그리고 나 역시 정말로 멋진 남자와의 설레이는 연애가 싫을 이유
따위는 당연히 없지만…

'그런 남자가 나를 좋아해줄 리 없잖아'

그리고 맨날 데이트를 이유로 내 여유시간, 내 즐거움을 뺏기고 매일 밤을 전화하고 꾸미고 신경쓰고 이것
저것 주말마다 쉬지도 못하고, 뭐 맛있는거 먹으러 나가는 날은 좋겠지만 어쨌든 너무너무 귀찮은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꼭 저러다가도 운명의 남자를 만나서 신데렐라 뺨치는 인생의 역전을 이루는 '가짜' 건어물
녀가 숱하게 나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꾸미는 것도 자주 꾸며봐야 이쁜 거고, 어느 날 갑자기 확 하고
대변신 하는 것도 어릴 때 혹은 그나마 몸매 안 망가졌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지 나 같은 년이 안경 벗고
머리 드라이하고 이쁜 옷 입어봐야 그저 "오늘 어머니회 있으신가봐요?"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아니
이건 좀 너무 오바지만 여튼 태가 안나는건 사실이란 말이지.

그리고 신데렐라 전설을 지워버린 '진짜' 건어물녀들의 솔직한 미래는 생각보다 꽤 비참하다. 

도대체 어쩌면 저렇게도 개성없고 매력이라고는 한 개도 없는 남자를 잘도 골라왔을까 싶은 그런 남자를
겨우 주변의 선자리로 만나거나, 아니면 단련되지 못한 수준 낮은 남자 보는 눈 탓에 역시 참 어디 자랑할
거 한 개도 없는 답 없는 남자한테 혼자 홀라당 빠져서 뒤늦게 주변 사람들 다 구토 유발시키는 연애 하다 
구질구질한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게 전부인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그나마의 결혼생활도 5년 내에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그도 아니라면 어디 건어물녀 커뮤니티의 대모 왕언니 스타일의 뚱녀 노처녀가 되던가.

그 어느 쪽이던 그다지 행복하다고는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는 미래이지만, 그것을 피하는 대가가 오늘날
나를 이토록이나 즐겁게 하는 여유로운 삶과의 이별이라면 나는 과감히 오늘의 나를!

'음'

근데 사실 솔직히 요즘에는 잘 모르겠다. 새벽녘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노라면 불안해진다. 이러다 정말
독거노인이 되어 늙어버리면…음.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만날까, 하고 생각하면 도대체 누구를? 내 주변의 남자라고 해봐야 미드 커뮤니티
에서 만난 핏덩이 같은 연하 남자애들 뿐인데 다들…. 그리고 조금 나이 또래라고 해봐야…

딱 한 명이 있긴 있다.

세훈이 오빠.

나름 잘 생기고, 왕년에 영화 커뮤니티에서도 한창 날렸을 정도로 웃기고 꽤 오래 싱글이고(이게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그런데 나한테는 정말 감정이 없는건지 종종 기프티콘을 날려도 단답형으로 고맙다는 한 마디 뿐이고 
언제 한번 밥 한번 먹자는 그 말은 아무리 빈 말이라도 그렇지 4년째 말로만 그 소리다. 어휴. 뭐 가끔
새벽 시간에 혼자 우울할 때 그나마 대화창에 접속한게 나 뿐일 때 한정해서 종종 우울함을 털어놓긴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를 갖는단 말이냐구.  

'그게 나를 설레이게 하는게 함정이지만'

우울하다. 맙소사. 이 천하의 김지선이 남자 때문에 외로워서 우울 타령이라니. 

'아니야'

그저 호르몬 불균형 탓이야, 하고 어제부터 슬금슬금 아프기 시작한 하복부에 데운 황토팩을 올려놓
는다. 나이 먹어가면서 생전 안 하던 생리통도 조금씩 심해져간다. 

요즘 부쩍 남자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러고보면 옛날 대학 시절의 그 찌질한 첫 사랑이 생각난다. 정말
찌질함의 교과서와도 같은 찌질한 만남과 이별의 76일이었지만 내 삶의 유일한 연애였다는 사실, 그
리고 그 병신같은 이별의 후유증 탓에 10년 가까운 세월을 솔로로 보낸 사실이…

음, 아니야. 그 이별의 후유증 탓은 솔직히 아니지. 그저 만날 남자가 없었을 뿐이야. 그래. 

그러고보면 예전에 세훈이 오빠랑 한창 썸씽 있던 시절에는 좋았는데. 아니 그때는 막상 좋은 줄을
몰랐다가… 어휴 이 등신같은 년. 그 놈의 커뮤니티 활동이 뭐라고, 그거 때문에 몇 번을 데이트 신청
거절하고 나니 세훈이 오빠는 떠나갔지.

'그렇다고 그 이후로 다시 기회도 안 주는건…'

아니야. 솔직히 그저 오빠도 나처럼 그때 잠깐 외로워서 나한테 눈길을 줬을 뿐이고, '진심' 아니었
으니 끝까지 매달리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10월 13일 세훈이
오빠 생일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기프티콘을 보냈다. 그리고 여전히 "고마워ㅋ" 라는 한 마디
답장. 

나이 서른 두 살에 나처럼 연애 못하는 년이 또 있을까. 있지. 우리 커뮤니티에는 수두룩하지. 

하지만 그 언니들이 언제까지 나와 같은 처지일지는 모르는 거 아닐까. 다들 맨날 독거노인 독거노인
타령하다가도 잘만 시집 가더만.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좌절감만 더
깊어져간다. 

친구 없는 년은 소개팅의 기회도 없다. 내 남친은 모니터 속의 저 금발머리♡ 하고 주장하는 것도 서른
넘고부터는 더이상 농담처럼 들리지 않게 되어 관둔지 오래. 하아. 돌싱들도 시집가는데 나는 도대체 
뭐하는 걸까. 

그런데 내가 남자를 만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귀찮음을 무릅쓰고 연애를 다 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 다음에, 그래서 정말 결혼을 하게 되면… 

알콩달콩한 결혼생활 이야기보다도 유부 언니들의 그 공포스러운 결혼살이 시집살이 아이 키우기 얘기
들을 들을 때마다 다시 모든 생각이 이 고단한 일기의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버리고야 만다. 눈 앞의 귤
하나를 더 까먹으며 생각한다.

'나 정말 시집갈 수 있을까'

냉정하게 내린 이성의 답은 YES지만 '시집을 가느냐 안 가느냐가 아니라, 책임져야 할 사람이 생긴다'
라는 사실부터가 두려운 것을 보면, 아직도 내가 시집갈 날은 멀고도 먼 것 같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가 저 냉장고 속의 북어포를 끝내 못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게 꼭 나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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