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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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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언제 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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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금요일 오후 5시 반에 한 시간짜리 마라톤 회의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타이밍 좋게 승희가 전화를
날린다. 졸업전시회에 초대받았건만 아무래도 늦을 것 같다. 복도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태경이 언니랑 지민이 언니랑 다 왔는데"
"7시 반, 늦어도 8시까지는 갈께"
"알았어요, 꼭 와야되요?"
"알았어"

전화를 끊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쌓여있는 업무를 초고속으로 처리하기 시작한다. 슬슬 시간에 쫒기자
타이핑 속도가 절로 올라간다. 아까 한 시간을 고민하며 쩔쩔매던 일을 15분 만에 초고속으로 처리하고,
공식 회의내용과는 별도로 부장님께 우리 팀 차원에서 따로 생각해봐야 할 일을 정리해서 메일로 보냈다.

입사 2주만에 이래저래 맡은 업무가 많다. 회사 분위기는 야근이 다소 잦은 분위기. 내 전 직장들과 살짝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나쁘지는 않다. 잘만 하면 내 커리어에 꽤 재미나는 이력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독불장군 스타일의 실무 임원 한 분이 뭐랄까, 사원들의 기를 죽인다고나 할까. 직원
들이 하나같이 기에 눌려있는 사무실의 분위기가 다소 답답하다. 

그리고 며칠 전, 꽤 전에 입사원서를 낸 곳에서 뒤늦게 1차 서류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 기존 커리어와
같은 업종이라 마음에 드는 곳이다. 가게 된다면 출퇴근이 한 시간 이상 걸리게 되겠지만. 입사 한 달만
에 이직을 하게 된다면 음.

여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가리를 굴리는 동안 일을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타는 금요일
이건만 아무도 퇴근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눈치볼 계제가 아니다. 가방을 싸서 일어나자 마침
다른 직원 하나도 같이 일어선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어, 수고했어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시계를 보니 7시 10분. 대충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녀의 대학교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저 실례지만 XX갤러리가 어느 쪽인지 아세요?"
"아, 네, 저쪽으로 가시면 되요"
"감사합니다"

교내를 걷다보니 어린 여대생들이 눈에 많이 띈다. 확실히 25세 이하의 여자애들은 뭔가 인종 자체가 다른
느낌이다. 문득 옛~날에 여대 다녔던 여친 학교 생각이 났다. 여대 안에 가득하던 그 왠지 모를 음기의 대
향연은 실로 기묘한 행복이었는데.

'음기'하니까 생각났는데 옛날에 사주를 봤을 때 점쟁이가 그랬다. 무슨 남자 사주가 이렇게 음기가 강하
냐고. "저 양기도 강한데요" 라고 대답하자 "양기가 약하다는게 아니라 음기가 강하다고. 밤에 하는 일이나
여자들 하는 일 하면 잘할거야" 라는데 더 자세히 묻자, 이름에 金의 기운도 강해서 쇠붙이 잡는 일에 소질
이 있을 거란다. 요리사나 뭐 그런거. 그리고 그 金의 기운 때문에, 겉으로는 따스한 기운이 강해도 안으론
차가워도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없단다.

그 말에 "근데 쇠붙이가 데우면 완전 뜨거워지잖아요" 라고 반박하자 같다붙이기 잘하니까 나보고 점쟁이
하면 잘할거란다.

뭐,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갤러리 안으로 들어서자 승희가 태경, 지민이에게 지네 과 애들 작품들을 빙
돌아가며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나 왔어"

뒤에서 말하자 승희가 꽃부터 달란다. 아차 싶었다.

"급하게 오느라 꽃다발 못 챙겼어. 대신에 맛있는거 사줄께"
"아 뭐에요! 센스 없게"
"내일 화환 보낼께. 오바마 이름으로 화환 오면 내가 보낸건 줄 알아"
"아 이 오빠 오자마자 미친소리부터 한다ㅋ"

태경이는 크게 들떠있었다. 요즘 대딩들 감각이 장난이 아니란다. 졸업 전시회 수준이 장난이 아니라면서
호들갑이다. 지민이도 그 말에 공감했다. 늦게 도착하기도 했고 다들 밥 먹으러 갈 시간이라서 자기 작품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애들이 몇 명 없었다.

죽 둘러보노라니 각 작품들도 작품들이지만 포스터 패널, 브로셔부터해서 전체적으로 전시회 자체를 꽤
멋지게 해놨다. 인상 깊은 작품들도 있고. 다들 졸업 전시회 때문에 거진 100만원 이상씩은 썼을 거란다.
과연 미대 애들답다.

하지만 염불보다 잿밥이라고 작품보다는 이쁜이 몇 명이 눈에 띄어서 승희한테 물어보니 하나같이 "남친
있어요"란다.

"근데 희망이 있어요. 다들 남친들이 대딩이에요. 돈 없지만 오빠는 회사 다니니까 돈 있잖아요"
"그거 마음에 든다. 아 근데 니네 과 여자애들 전체적으로 이쁘다?"
"어제 내 동생도 와서 그 말 하던데, 우리 과 여자애들 이뻐요. 그리고 무엇보다 미대 애들이다보니까 막
다들 재수 삼수하고 그런 애들이 많아서 너무 어리지도 않고 좋아요"
"아까 그, 주희인가? 걔는 몇 살이냐? 이쁘던데"
"스물 여섯이요. 근데 걔도 남친 있어요"
"밥이나 먹으러 가자. 태경아, 사진 그만찍고 가자"

우리는 근처 밥집으로 향했다. 어쨌든 이제 내 주변 가장 어린 막내뻘 애들도 다 대학교 졸업했거나 이제
곧 졸업이다. 새삼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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