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양다리

$
0
0

양다리를 걸치던 순간의 죄책감은 여전히 뇌리에 생생하다. 그녀에게 속삭였던 많은 사랑의 대화, 이래선
안된다는 이성의 경고등, 성적 충동과 쾌락에 대한 유혹, 그리고 미안함…

내 목에 손을 감고 키스를 유도하던 그녀의 손길에 내 입술을 내어주면서도 머릿 속에는 사실 기쁨보다는
가영이에 대한 미안함 뿐이었다.

결국 나는 '다음 단계'로의 유혹을 뿌리치고 "미안, 오늘은 내가 몸이 좀 별로다. 다음에 보자" 라면서 매달
리는 윤지를 두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와서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먹은 양 몇 번이고 양치질을 했다.

가영이에게도 미안했고, 윤지에게도 미안했다.



"자?"
"응…좀 잤어. 친구들이랑은 많이 마셨어?"
"어이구 자는데 깨웠네. 미안, 아니 조금 마셨어. 지금 집에 들어왔어"
"어 그럼 오빠도 얼른 씻고 푹 자. 내일 회사도 가야되는데. 잘자"
"너도 잘자"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가영이와는 많은 것이 맞지 않았다. 느긋하고 능글맞은 나와 예민한
성격의 가영은 충돌이 잦았고, 연애 3년 차 접어들면서는 관계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느꼈다. 성격, 집안
환경, 스킨십, 취미, 뭐 하나 딱 들어맞는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 우리는 많은 것을 감내하며 만나왔다. 왜 그렇게까지 그리 맞지도 않는
서로에 대해 집착해왔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그저 '사랑했으니까' 라는 이유 밖에.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라면 내 나름의 연애 스킬과 그녀의 빼어난 외모 덕분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특히 결혼 문제를 놓고서 몇 번의 진지하면서도 회의적인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그녀와 난 서로의 만남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젠가, 싸우고 늦은 밤
혼자 집으로 향하던 도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가사에 공감해서 그만 눈물 흘릴 뻔한 적도 있었다.


부담돼 니가 내게 결혼을 보채는 것도
난 달인처럼 대화 화제를 돌리는 법도 많이 늘었어
넌 항상 추격하고 나는 도망쳐
솔직히 말할께 난 아직 준비 안됐어
지쳤어 조금 널 향한 사랑은 도금이
벗겨진 반지처럼 빛이 바랬어…


어쨌든 그 즈음부터였다. 가영이 나와의 스킨십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 처음 얼마간은 그냥 가벼운 실랑이
정도로 넘어갔지만, 한번은 그 문제로도 크게 싸웠다.

"너 나랑 마지막으로 잔게 언젠지 기억이나 나냐?"
"자기 싫은걸 어떡해. 마음이 마음대로 돼?"
"왜? 왜 대뜸 싫은데. 너 다른 남자라도 생겼냐?"
"참 나…그래, 그렇게 생각해"
"말 돌리지 말고. 아니, 답답해서 그래. 왜 그러는건데 진짜. 솔직하게 말해 봐. 다른 남자 생겼냐?"
"진짜 생각하는 수준하고는…진짜 점점 더 실망이다"
"그럼 왜 그러는데. 왜 스킨십을 피하는지, 남친으로서 그건 이유는 알아야지. 왜 싫은데. 뭐, 성에 안 차?"
"난 이제 오빠랑 자기 싫다고. 솔직히, 난 지금 오빠가… 그냥 남자로 안 보여. 그냥 잘해주는 오빠같아.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어차피…우리 이렇게 만난다고 우리가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결혼은… 아니 다 떠나서라도, 결혼 안 한다고 스킨십도 안 하니? 세상 모든 커플이 뭐 다 결혼 전제하고
 만나냐? 그리고 너랑 나랑 뭐 잠을 안 잔 사이냐?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미칠 거 같다"
"됐어, 됐다고. 내가 싫다고. 뭐 어쩌라고 그럼. 내가 싫은데 어쩔건데. 못 참겠으면 그냥 헤어지고 다른 여자
만나. 오빠 아는 다른 여자들 많잖아"
"야 김가영!"
"뭐! 뭐어! 왜 소리 지르는데!"


…오랜 만남만큼 헤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별을 굳게 결심했다가도, 막상 며칠 후면 내가 먼저 사과를
하거나, 그녀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그렇게 풀어지곤 했다.

그래도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의 스킨십 부재는 조금 더 내 안의 어떤 '이성'을 자꾸만 흔들고 있었다. 마침
그때 등장한 것이 윤지다.



[ 오빠 자요? ]
[ 아니 ]
[ 어제 제가 너무 들이대서 민망했죠? 미안해요ㅋ ]
[ 아니야 ] 
[ 저 어제 자다가 이불 막 발로 걷어찬거 알아요?ㅋㅋ 여튼 미안해요 ] 
[ 정말 아니라니깐, 나도 좋았는걸 뭐. 오히려 내가 매너없었지? 대신에 다음에 크게 쏠께 미안~ ] 
[ 정말이죠? 빈말이래도 저 얻어먹을거에요 ] 
[ 알았어ㅋㅋ ]
[ 네에 그럼 쉬어요 오빠 ] 
[ ㅇㅇ ] 


그녀와의 카톡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가영이와 싸우고는 속이 상해서 지훈이와 술 한잔 하던
날, 우연히 합석하게 된 지훈의 아는 동생. 

"어, 여기는 나 일본 워홀 때 만난 동생이야"
"안녕하세요, 정윤지에요"
"한수혁이에요"

…마침 소개팅 똥망하고 혼자 짜증나서 집으로 돌아가기 뭐해서 자주 가던 바에서 칵테일이나 혼자 마시며
청승 떨려다가 우연히 지훈을 발견했다는 그녀. 왠일이니, 하고 마침 잘 됐다며 합석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녀는 내가 참 마음에 든 모양이다. 

"야 그게 말이 되냐?"
"아 몰라. 여튼 윤지가 하도 졸라서 니 번호 줬으니까 연락 가면 그리 알아"
"나보고 어쩌라고?"
"니가 알아서 해. 아 솔직히 가영이 걔랑 맨날 싸울거면 걍 갈아타던지"
"이 새퀴 친구 커플한테 하는 말 좀 보게"
"솔직히 진지하게 몇 번 생각했던 거기도 하고. 아 걍 몇 번 맛있는거나 좀 사줘. 걔네 집 잘 살아. 잘 되면
피차 좋은거지 뭘 그래. 그리고 진짜 내가 봤을 때 가영이 걔도…아 몰라 여튼 끊는다"
"야야야! 잠깐만!"
"왜?"
"근데 뭐, 윤지랑 너랑은 썸씽 없었냐? 괜히… 아 괜히 지저분하게 엮이고 뭐 그런거면 존나 짜증나니까"
"됐거든? 진짜로 그냥 아는 동생일 뿐이니니까 니가 알아서 해. 이 새퀴 아닌 척 하더니 니도 은근히 마음
갔구만?"
"아니야 임마"
"끊는다"
"그래"


솔직히 누가 나를 처음 본 자리에서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에 간만에 자신감이 붙었다. 나보다 한 살
연하의 가영이보다도 두 살이나 어린 그녀는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겟지만 가영
이가 세련미, 심플함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라면, 윤지는 귀엽고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생긴 것도 그렇고
패션도 그렇고. 

두 차례 약속을 핑계로 윤지의 영화 제의를 피했지만, 집에서 엄마가 선보라고 했다는 가영의 이야기에
그녀 부모님에 대한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고 자꾸 마냥 거절만 하는 것도 왠지 좀 웃기는 것
같기도 해서 그 며칠 후 윤지와 만났다.

"제가 좀 늦었죠? 차가 막혀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히, 신난다. 수혁 오빠 그냥 편하게 해요. 그때는 말 편하게 해놓고서는 뭘
또 간만이라고 존댓말 쓰고 그래요"
"흐, 알았어"

…굉장히 적극적이면서도 편했다. 같이 영화를 보면서도 그녀는 은근슬쩍 손을 가져다 대었고, 난 안된
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슴이 뛰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발기까지 되었다.

그러나 난 영화를 보고 나와 커피를 마시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난 이미 여친이 있다고. 그리고 아까 손
잡은건 미안하게 됐다고. 나도 모르게 그랬다면서.

"하하, 오빠 디게 귀엽네요"

윤지는 그건 이미 지훈에게 들어 알고 있었고, 상관없다고 했다. 자주 싸우고 사이도 별로라고 들었다고.
지훈이가 좀 더 과장해서 말한 것 같기는 했지만, 여튼 윤지는 나에게 여친이 있던 없던 별로 상관없다고
했다.

"사귀자는거 아니잖아요. 그냥 가끔씩 만나요. 데이트 하고"

데이트 메이트라고나 할까.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심적으로 죄책감도 덜하고. 묘한 기대감도 들고. 그냥
여자인 친구와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에게 애써 변명했다.

가끔 가영이와 크게 싸우거나, 시간적 여유가 생기거나 하는 날이면 종종 윤지를 만났다. 정말로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었다. 떳떳했다. 아니, 가영이에게는 비밀로 하거나 남자인 친구
와 만나는 척 했으니 떳떳한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5~6회의 만남이 이어진 이후 결국 내가 먼저 무너졌다. 항상 그녀가 먼저 만남을 제의했지만, 그
날은 내가 먼저 만남을 제의했고, 언제나의 커피 대신 "오빠, 오늘 술 한잔 할래요?" 제의에 결국 바에서  
입술까지 내어준 것이다. 그래도 나는 재빨리, 아니 늦었지만 정신을 차리려 했다.

'둘이 잔 것도 아닌데 뭘' 하고 생각했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을 하면 그냥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실수는 한번, 앞으로 잘하자고 생각했다.

정신차리고 내 자리를 찾고자 했다. 김가영의 남자친구, 그리고 어쩌면… 아니, 나 혼자만의 바램이지만
그녀의 장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로서, 내 자리를 찾고자 했다. 한동안 윤지의 연락을 무시했고,
가영이에게 잘했다. 괜히 이런저런 선물도 안겨주고, 간만에 비싸고 맛난 것도 먹으러 다니고.



그리고 그 모든게 하루만에 무너졌다. 허무한 실수와 그에 이은 충동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어, 오빠. 간만이네? …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회식 때문에 술을 잔뜩 마신 날… 가영이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 그만 나도
모르게 윤지에게 걸었다.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술이 다 확 깨며 깜짝 놀라 이름을 확인했지만
윤지였다.

"어, 어어. 아 미안. 내가 전화를 건다는게 잘못 걸었다야 미안"

보통 같았으면 허무하게 그걸로 픽 웃고 안부나 한두번 주고 받고 끝났을 이야기지만, 윤지는 달랐다.

"오빠, 여친한테 전화 걸려고 했다가 실수로 나한테 걸었구나? 으이구"

정곡을 찔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실수했네"

그 말을 들은 윤지는 바로 직구, 아니 직대포를 쏴버렸다.

"수혁 오빠, 지금 나 심심한데, 우리 술 한잔 따로 할래요? 내가 오빠 집으로 갈께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 같았다면 그냥 "다음에" 하고 적당히 둘러대며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지만, 술도
꽤나 취했고, 이미 여자친구와 스킨십 없는 연애 생활을 한 지 7개월이 지난 상황이었다. 난 "그래"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면 나 어디로 가면 돼요? 택시 타고 바로 갈께요"

전화기 너머로 마치 그녀의 싱긋 웃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난 허둥지둥 가영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회식 끝나고 집에 가는 중이라고, 내일 일찍 출근해서 피곤할테니
먼저 자라고 했다. 마침 연일 계속되는 야근과 조기 출근에 정신없던 가영이는 알겠노라며 먼저 자겠다고
했다.

그리고 약 40분 후, 집 앞에서 나와 윤지는 조우했다.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탑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난 나도 모르게 그만 "와" 하는 탄성을 내고야 말았다.

"저 좀 야하죠?"

웃으며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끼는 윤지의 대시를 난 더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한번이 어렵지 두 번 세번은 어렵지 않았다. 난 틈만 나면 윤지를 내 집으로 끌어들였다. 주말 특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선 윤지와 하루종일 모텔에서 보낸 적도 있었다. 여친이 있으면서도 밤을 외롭게 보낸 지난
시간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짐승처럼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렇다고 섹스만으로 '또 다른 만남'을 채워나간 것은 아니었다. 윤지를 위해서 그녀에게도 선물을
종종 했고, 가끔은 멋진 곳에 데려가기도 했다. 야경이 끝내주는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곳 말이다.

"오빠 이런 데 자주 와요?"
"아니"
"그래두 이런 데도 알고. 오빠 여친은 진짜 좋겠다. 도대체 오빠 같은 남자랑 사귀면서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맨날 싸운대?"
"흐, 가영이 얘기는 하지 말자"
"어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전화왔네요"
"어, 그러네. 조용해 봐. 어, 가영아. 어, 미치겠어. 후우, 일요일에 출근하려니 졸려죽겠네. 어. 밥 먹었지.
대충 먹었어. 너는? 아, 그래? 그래, 그럼 좀 더 자던가. 어 알았어. 푹 자"
"…흠"


전화를 끊으며 나는 윤지의 표정에 살짝 씁쓸함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가영이에게도 미안했지만,
확실히 윤지에게도 미안한 만남이었다.

"윤지야"
"네"
"정리할께"
"네?"
"가영이 말이야. 내 여친. 정리할께"
"…왜요?"
"너랑 진지하게 만나려고"
"괜히 나 때문에, 내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면 그러지 말아요. 동정 같은거 제일 싫어. 아, 그냥 이럴거면 나
오빠 나 안 만날래. 나만 이상한 년, 나쁜 년 되잖아"
"그러지 마"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립서비스였다. 난 윤지도, 가영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윤지를 포기하자니 당장
섹스가 아쉬웠고, 가영이를 포기하자니 왠지 가슴이 아팠다. 아니, 점점 윤지를 포기하는 것도 가슴이 아파
졌다. 그저, 가영이 이야기를 최대한 윤지 앞에서 노출시키지 않을 뿐이었다.


"요즘 오빠 이상해"

역시 여자의 감은 무시할 수 없다.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전화로 가영이가 말했다. 윤지와 모텔에서 자고
온 날이라 가슴이 뜨금했지만 난 모르는 척 물었다.

"뭐가?"
"그냥 다 이상해"
"뭐가 이상한데"
"나한테 뭐 감추는게 있어"

물론 내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사람은 결국 티를 내기 마련이다. 그저 나는 "뭔 소리여" 하고 모르는 척
두리뭉실 넘길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2주일 후 딱 걸리고 말았다.



"오빠 지금 어디야?"
"어? 어어, 어…집이야. 자는 중이지. 음냐, 몇 시냐? 아직도 안 자고 뭐해?"
"나 지금 오빠 집이야. 솔직히 말해. 오빠 지금 어디야?"
"… … "
"지금 당장 지금 있는 곳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서 보내"
"…가영아"
"됐어. 나 끊을거야.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전화 하지마. 쓰레기 새끼야. 니 방에서 긴 머리카락도 봤어…"

울먹이며 끊는 가영. 난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며 침대에서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나를 끌어안고
곤히 자던 윤지도 부스스 일어나 말 없이 모텔 방의 불을 켰다.

"여자친구?"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윤지는 씁쓸하게 말했다.

"가요. 가서, 빌어요. 용서 안 해줄 거 같으면…거짓말 해요"
"…뭐라고 거짓말을 해…"

멍하니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내 반문에 윤지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한숨을 길게 쉬었다. 윤지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빨리 가서, 그냥 친구들이랑 술 마셨다고 해요. 내가 지금 전화해서 지훈이 오빠랑 말 맞춰놓을께요. 집에서
잔다고 거짓말 왜 했냐고 물어보면, 여자도 있는 술자리라서 혹시라도 싫어할까봐 그랬다고 그래요. 예전에
우리 다 같이 찍은 사진 있잖아요. 그거 카톡으로 보내줄께요"
"…하아…"
"빨리"


…가영이가 정말 믿어주기는 할까, 병신같지만 난 그렇게 했다.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게 되어 있어요. 무조건 그렇게 우겨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난 정말 찌질하게도 울었다. 가영이에게 미안하고, 윤지에게 미안해서. 지훈과
나 사이에서 양손으로 V자하고 있는 윤지의 예쁜 얼굴이 새삼 한없이 가여워 보였다.

가영에게 윤지가 시킨대로 말했다. 가영은 들을 가치도 없는 변명이라면서 화를 냈지만, 술자리 사진까지 보
여주고, 직접 눈 앞에서 

"지훈아, 아 씨. 미안한데, 아까 일, 알지? 아 음음. 가영이한테 이야기 좀 해줘. 오해가 생겨서"
"됐어, 전화 안 받는다고"

가영이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기한테 거짓말을 한 자체가 너무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지만 이미 분노의
톤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 일로 한동안 시달리기는 했지만, 가영이와 나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지에게는 차마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부끄럽고 한심하고 미안했다. 그래도 용기를
냈다.



"잘 됐네요"

웃으며 내 이야기를 듣는 윤지. 그 예쁜 미소가 더 나를 미안하게 했다.

"미안해"

윤지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내가 더 미안하죠. 오빠 같이 착한 남자 꼬신건데. 근데 오빠 대단하다. 내가 그렇게 잘해주고 잘 참아주고
열심히 했는데도 그 언니가 그렇게 좋아요? 그 언니 어디가 그렇게 매력있어요? 완전 부럽다. 밤 일도 안해
준다면서. 무슨 매력이 그렇게 대단해"

난 그저 어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윤지는 떠났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겨우 지켜낸(?) 가영이지만, 그녀 역시 석 달 후 나 몰래 선 본
남자와 진지하게 만나기로 했다면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다. 난 눈물 대신 허무함에 그저 웃었다.

"너 나한테 미안하지 않냐?"
"다 오빠한테 배운 것 뿐이야"

어이없게도 나는 괘씸함을 곱씹으며 그녀와의 3년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지우고, 불태웠다. 다시 솔로가 된
나는 참 찌질하게도 윤지를 불렀지만, 윤지에게서 돌아온 답은 "오빠, 우리 기억 별로 안 좋은 기억이잖아요"
라며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답이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쫒으려다 두 마리를 다 놓친 기분이었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왠지 그래서 더 기분이
좋고 홀가분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앞으로 내 평생 다시 양다리를 걸치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