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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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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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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의 야외 수영장은 우리 커플이 전세라도 낸 듯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다솜이는 그게 그렇게도
좋았던지 벌써 한 시간 가까이 콧노래를 불러가며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카바나에서 바디타올을
두르고 와인을 마시며 그녀가 물에서 노는 모습을 기분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솜은 내 시선을 느꼈던지
이쪽을 보며 물었다.

"오빠는 이제 물에 안 들어와?"
"너 노는거 구경하는게 더 재밌다"
"알았어. 아 너무 좋다"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떠있고, 은은한 조명이 수영장을 비추어 그렇잖아도 우아한 분위기의 수영장을 한층
더 호젓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첨벙첨벙, 찰방찰방 일랑이는 물소리를 들으며 난 눈을 감은 채 방금 전
물살을 가로지르던 다솜의 모습을 머릿 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분. 슬슬 기분좋게 알딸딸한 취기가 오르는 듯한 느낌에 잔을 옆에 내려놓고 두 팔을 편 채로
카바나 침대에 드러눕자 선선한 실링팬의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잠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음…'

아무래도 방으로 돌아가서 눕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젖은 몸도 은근히 싸늘하고.

"다솜아, 이제 슬슬 들어가자. 날씨도 좀 쌀쌀하다 벌써"
"어? 어… 나갈께"

아무래도 다솜은 아직 좀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적당히 밤도 늦었고 내가 지루해한다고 생각했던지
군말없이 내 말에 따랐다. 그 '내 눈치보는' 것이 싫어서 갈아치운 여자가 몇 명이던고. 조금 씁쓸해졌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어제 다솜은 체크인해서 방에 들어오자마자 계속 "우와" 소리를 입에 단 채로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날 밤 그녀는 내 품에 안겨서 조금은 불안한 말투로 속삭였다.

"오빠랑 사귀는건,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고 꿈만 같지만…그래서 더 왠지 겁나고 불안해"

음. 몇 번을 들었던 말인지. 그녀들은 항상 그랬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 벅찬 행복을
느끼면 처음에는 마냥 기뻐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 이상의 큰 불안감을 느끼고서는 이 행복이 영원하리란 
보장을 받기를 원했다.

글쎄. 하지만…

행복의 보장이 과연 가능할까.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한 마디를 해준다 한들, 너는 반드시
그 이상의 보장… 이를테면 결혼 같은 것을 원할 것이고, 내가 하나씩 그것을 들어줄 때마다 너의 욕심은
점점 커져가겠지. 그리고 그것에 부담을 갖고 있는 내가 중간중간 브레이크를 걸 때마다 너는 또 상처를
받고 말겠지.

잘 모르겠다.

그냥 지금 순간이 즐거우면 그걸로 좋지 않나.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먼저 고민하느냔 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더이상 황금알을 낳지 않는 날이 오면 어쩌나, 거위가 어디론가 훌쩍 도망가버리면 어쩌나,
하는 고민부터 해서야…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공감해주고 싶지는 않다.



샤워를 하고 나와 야경을 내려다본다. 문득 쓸쓸해진다. 회고해보면 참 나는 쓰레기였다. 많은 여자를
울렸고,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무엇이든 거기서 관두곤 했다. 막되먹은 나였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도 묵묵히 참고 넘어갔다. 가끔 내 행동을 저지했던 여자들도, 사실은 날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더이상 나의 막되먹은 행동을 참지 못해서 폭발한 것 뿐이었다. 그게 그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
거나 그랬다.

물론 이 모두 다 철없는 어린 생각일 따름이다. 난 '여자'가 아니라 어쩌면 '엄마'를 갈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시콜콜 날 간섭하고 잘못을 꾸짖어 줄 여자. 하지만 막상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또 나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선언해버렸다. 

나의, 아니 우리 할아버지의 부에 혹했던 많은 여자들은 나를 쉽게 떠나갔고, 가끔 진정한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준 여자들조차도 결국 내 철없는 이기심에 떠나버렸다. 

아주 가끔, 추억이랍시고 여자들과의 옛날 생각들을 하다보면 참 그저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지는
병신같은 기억들 뿐이다. 그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하다. 나는 단 한 명의 여자도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
준 적이 없는 놈이다. 그저 돈으로 잠깐 환상을 맛보게 해준 것일 뿐. 그 환상 속에 달큰하게 취한 모습이
보고 싶어 나는 그토록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고, 그 못된 유혹에 넘어온 여자들은 언제나 눈물 또는 짙은
좌절감 속에 멀어져 갔다. 

나는 사랑을 해서도, 할 수도 없고 할 줄도 모르는 놈이다. 역겹고 우울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오빠"

샤워 가운을 입고 창 밖을 내려다보는 나를 뒤에서 다솜이 끌어안았다. 팔을 뒤로 해서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팔과 허리를 쓰다듬다가, 곧 그녀가 아무 것도 입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난 다시 손을 앞으로
해서 내 허리를 감싸안은 그녀의 손을 위에서 지그시 누르며 잡고는 방금 전의 부름에 응했다.

"왜?"
"난 오빠가 맨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흐흥.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머리가 비어서"

그녀는 나의 대답에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생각한다고 말해주면 안 돼?"

이번에는 내가 웃었다. 유치하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우울한 생각을 단번에 날리기에는 충분한
대화였다. 살짝 몸을 숙여 요 앞에 놓아두었던 와인잔을 안전하게 창틀 안 쪽으로 밀어놓고, 몸을 돌려
다솜의 어깨를 잡았다.

"… …"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몸의 그녀가 부끄러워 한다는 사실은 살짝 숙인 머리의 각도 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V라인 얼굴에 가는 목선, 그리고 미끄러지듯 이어지는 동그란 어깨… 난 다솜의 뒷머리를 끌어
안듯 잡고 입을 맞추었다.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간다. 그녀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지만 난 그녀의 다리 사이로 오른발을 집어넣고선
그녀를 살짝 밀듯이 그대로 바로 옆 침대에 눕혔다.

스륵, 난 실크 재질의 샤워가운을 벗었다. 그리고 다솜의 턱을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직도 불안해?"

그녀가 의례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가 또 콘돔 안 쓸까봐"

그 말에 나도 그녀도 피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그리고 한두박자 지나자 묘하게 흥이 깨졌다. 나는
벌렁 옆으로 드러눕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만약에 임신하면 오빠한테 시집오면 되지"

내가 말하고도 조금 민망하고, 생각없는 말 같았지만…빈 말이다. 그래 빈 말. 물론 그 빈 말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했던 전 여친들도 몇 명 있었지만. 그러나 다솜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난 오빠한테는 시집 안 갈거야"

사귄지 채 한 달도 안되는 사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고, 물론 저 말 역시 그냥 농으로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래도 신경 쓰이는 말이다. 이유를 물었다.

"왜? 나 정도면 괜찮잖아. 인물 훤하지 키 크지, 돈 많지, 모자란건 뭐… 개념 정도?"

다솜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붙잡더니 몸을 돌려 엎드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오빠한테 시집 가면, 평생 진짜 사랑은 못 받아볼 거 같아서. 오빠는 외로움 타는 사람이니깐. 맞지?"

외로움 타는 사람이라…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말이다. 나에 대한 그녀의 평가도, 나와의 미래를 시뮬레
이션 해본 그녀 나름의 결론도.

"내가 외로움 타는 사람 같아 보여?"
"응"

마치 외로운 사람을 달래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와 내 위로 올라왔다. 몸을 반쯤
기대어, 다솜의 부드러우면서도 볼륨감 있는 가슴이 내 갈비뼈에서 느껴졌다.

"나한테 사랑 못 받을거 같은데 왜 나랑 사귀어?"

웃으며 묻자 그녀는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생기고, 키 크고 돈 많고… 지켜주고 싶어서"

그 대답에 또 픽 웃은 나. "진짜야" 하고 웃으면서도 정색하던 다솜은 이번에는 꽤 길게, 나에 대한 평가를
쏟아내었다.

"오빠는, 음…나같은 연하보다, 연상이랑 더 잘 어울릴 스타일이야. 귀여운 여동생 이런게 아니라, 오빠를
확 잡고 조종할 그런 누나 같고 엄마 같은 여자. 바가지 잘 긁고, 잔소리 많은 그런 여자가 제격이야. 그리
고 디게 똑똑하고 드세서, 오빠가 짜증내고 성질 피우면 더 크게 화내서 오빠를 확 기죽일 수 있는 여자.
그런 여자가 잘 어울려"

난 기가 막혀서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참, 아 그게 뭐야. 무슨 뺑덕어멈 같은 여자잖아. 어느 남자가 그런 여자를 좋아해. 나도 완전 싫어"

다솜은 자기 말이 조금 심했다고 느꼈는지 또 환하게 웃으며-저 웃음이 참을 수 없이 좋다- 쪽, 하고 내
입에 입을 맞추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 찾을 때까지는 내가 옆에 있어줄께. 오빠가 질릴 때까지는"

그리고 난 문득 다솜이 나름 나에 대해… 내 과거 연애지사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닐런지, 내 문란하고도 쓰레기 같은 과거에 대해 감을 잡은 것은 아닌지, 그래서 지 혼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걸 알고 이렇게까지 나오는 것이면 이 아이, 굉장한 여우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뭐 그런 정보를 어디서 구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위험 경보가 내 머릿 속에서 울리기도 전에 다솜의 손길과 따뜻한 입 안은 이미 나의 그것을
삼켜가며 더이상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나는 그저… 몸을 움찔 거리며 눈을 지그시 감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어차피
나는 당분간 이 아이를 즐겁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 만이 머릿 속을 가득채워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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