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빙그레 웃은 나.
"괜찮아, 별로 안 비싸"
흔한 칵테일 한 잔에 우리 돈으로 2만원이 넘는 가격은 분명 비싼게 분명했지만 이 정도 분위기에 이 정도
전망을 가진 바라면 충분히 이 돈을 내고도 남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예약을 하지않아 아쉽게도 정말로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는 앉지 못했지만 어차피 테라스가 따로 마련돼 있으니 그쪽에서 내려다보면 된다.
"뭐 마실래?"
"뭐가 맛있어요?"
"글쎄…"
여기서 바로 "이거 맛있어" 하고 추천해주면 멋있겠지만 한박자 놓치고 잠깐 고민하다가 하나를 짚었다.
"블루 하와이안 마셔봐"
"맛있어요?"
"뭐, 응. 맛있을거야. 달달해서"
"좋아요"
칵테일이 나오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도심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고층 야외 테라스… 훅 불아온 바람에 머리가 휘날린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다.
"와, 대박!"
"전망 좋지?"
"네! 짱이에요"
계속해서 부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결이 휘날린다. 이마 넓은 것이 컴플렉스인 그녀는 열심히 앞 머리를
붙잡고 있다. 그게 귀여워 피식 웃었다.
"오빠 왜 웃어요?"
"너 열심히 앞머리 붙잡고 있는게 귀여워서"
"아"
살짝 부끄러워 하다가 바로 옆의 스탠딩 테이블에 칵테일 잔을 올려놓고 다시 반대편 손으로 앞머리를
내리누른다.
"저 이마가 너무 넓어서요. 학교 다닐 때도 별명이 이마 반이었어요"
"얼마나 넓은데?"
"아 안되요"
얼마나 넓은데? 하며 이마 쪽으로 살짝 손을 가져가자 질색을 한다. 뭐 보긴 몇 번을 봤는데. 넓긴 넓지만
막 그리 컴플렉스 가질 정도는 아니두만. 하여간 여자들의 컴플렉스는 참 다양하다.
"오빠 근데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요?"
"뭐 그냥. 옛날에 대학교 때 처음 여행 올 때, 막 그럴 때는 미친듯이 검색해보고 그러잖아. 그러다가 발견
해서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는데 실제로 온 건 재작년에 처음으로 와봤어"
"와 그럼 여기 되게 오래된 바인가봐요"
'나의 대학 시절'이라는 말에 '오래된 바'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야! 나 대학교 졸업한거 겨우 5…아니 7년이구나"
순간 반박하려다가 할 말을 잃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오히려 그녀가 웃었다.
"거봐요. 7년이면 엄청나지 뭐"
생각해보니 그러네. 언제부턴가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가는 것 같다. 바람은 잠깐 멈추었다가 또 다시 시원
하게 불었고, 계속 부는 바람이 신경 쓰였던지 한 모금 마신 칵테일 잔을 다시 내려놓은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었다. 머리를 뒤로 묶으니 새삼 느낌이 색달랐다. 조금 더 여성스러운 느낌도 났고.
'그러고보니 오늘 입은 옷도 참 예쁘다'
전망 끝내주는 고층 바, 라고 하니까 딴에는 챙겨온 옷 중에 제일 시크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은 듯 한데,
그녀가 입어서인지 시크한 느낌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도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느낌이라
조금… '여자'로 보였다.
"근데 너 어떻게 여행 오면서 힐을 챙겨올 생각을 다 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저도 정말 신게될 줄은 몰랐어요. 원랜 그냥,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진용으로 가져
온건데 오빠가 아까 분위기 좋은데 갈 거라고 해서 신었어요" 라고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얘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얘가 이제 몇 년 후에 스물 아홉, 서른이 되면, 그래서 여자
로서 좀 더 원숙해지면, 그때는 정말 멋진 여자가 되겠구나, 하는. 아직은 그저 예쁜 동생 같은 느낌이지만.
"익스큐즈 미"
바로 옆을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세워 진 토닉 한잔을 더 주문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저기 멀리
멋진 야경을 바라보며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아, 한국 가기 싫다"
잠깐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그녀의 한 마디. 나는 쿡쿡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되는데"
"너무너무 싫어요"
"그래, 나도 싫다"
내 맞장구에 그녀는 또 한 모금 칵테일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빠는 한국 가면 이제 막 승진도 하고 좋은 일 가득하잖아요. 뭐야, 난 아무 것도 없어. 글구
여기 올 때도 아빠가 뭐랬는 줄 알아요? 기집애가 정신머리 없어서 돈 모을 생각은 못하고 해외여행
이나 나다가고, 아주 정신 나갔다고. 아 얼마나 짜증났는데. 여행경비에 일원 한푼 안 보태주구선!"
자기 아버지를 나름 그럴 듯하게 흉내까지 내며 하는 그녀의 말에 난 그만 빵 터져버렸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아 웃기다. 어른들 그러시잖아. 막상 그러고서는 나가는 날에는 몸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아 우리 아빤 안 그래요. 여기 도착해서 공항에서 집에 전화하니까는 돈 많이 쓰지말고, 전화도 국제
요금 나오니까 그냥 별 일 없음 뭐 하지도 말라는거 있죠? 아 진짜 우리 아빠 친 아빠 맞아?"
그 말에 또 한참을 웃었다. 내 유쾌한 웃음에 새 칵테일과 피넛, 나초 안주를 새로 가져다 준 종업원도
괜히 슥 미소를 짓고 떠난다.
"오빠, 쟤도 괜히 웃어요"
"그러게. 내 웃음이 웃긴가?"
"조금 볼륨이 크긴 했어요"
슥 옆을 보니 테라스에는 아까 있던 몇 커플들도 다 들어가고 저기 테라스 구석에서 입술을 서로 주고
받는 금발 커플 하나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춥진 않아?"
"아뇨 안 추워요. 시원해서 좋은데. 오빠 추워요? 추우면 들어가요"
"아니야. 나도 시원해서 좋아. 너 추울까봐"
"아니에요 안 추워요"
안 춥다면서도 '춥다'라는 말을 해서인지 괜히 습관적으로 팔뚝을 문질러 본 그녀.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마 그녀의 살짝 패인 옷 사이로 그녀의 모인 앙가슴에 힐끔 눈이 간다. 글래머는 절대 아니지만 여튼
남자로서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흠.
"오빠 근데 낮에 어디 다녀온 거에요?"
"아, 나 여기 올 때 누가 뭐 좀 사다달라고 했거든"
"어떤거요? 누가? 여자가?"
평소 그런 것을 그리 굳이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왠지 기분이 업 되어 있어서일까. 그녀는 그것을
파고 들었고 나는 머릿 속으로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짖궂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뭐 좀 사다달라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는 말에 순간적으로나마 얼굴 빛이 흔들린 그녀. 하지만 다시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누군데요? 오빠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농담이죠?"
농담인 척 하는 이면에 그녀의 긴장이 느껴지는 말에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난 더이상 짖궂게 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울 엄마가 좋아하는 여기 빵 있걸랑. 옛날에 한번 사다드렸는데 너무너무 맛있다면서 좋아하셔서 이번
에도 좀 사다드리려고"
"에이, 엄마 아니죠?"
내 장난에 나름 꽤나 놀랬던 모양인지 솔직한 대답에도 한번 더 떠보는 그녀. 귀엽다.
"야, 내가 여자가 어딨냐?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외국까지 나와서 꼴랑 빵 사다주는 놈이 어딨어"
그제서야 픽 웃으며 안심하는 듯한 그녀. 아니 안심인지, 그저 '그래 한번 넘어간다' 라는 말인지는 모르
겠지만. 그리고는 물었다.
"오빠는 왜 연애 안 해요? 오빠 연애 안 한지 꽤 오래 됐죠?"
너만 모르지 그 사이에 꽤 했는데.
"글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치"
"너는 연애 안 해?"
"나요? 음, 모르겠어요"
별로 싱겁고 재미없는 이야기. 사실 어젯 밤에도 했던 이야기 아닌가. 트윈 베드 옆에서 슬슬 잠에 빠져
들기 직전에 그 질문을 했던 그녀. 묘한 뉘앙스이기는 하지만… 흠.
그러고보면 트윈 베드라고는 해도 한 방에서 자도 무탈한 그녀와 나 사이. 무어라 정의내리면 좋을지 참
애매한 사이. 분명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고, 나 역시 그녀가 분명 여자로서 싫진 않은 그런 사이.
'왜일까'
그저 오래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라고만 하기에는 묘한 모호
함이 남는 그런 사이. 언젠가 그녀에게 들이대던 남자애가 나를 굉장히 견제하던 때도 있었지.
"오빠 무슨 생각해요?"
눈에 촛점까지 잃어가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다른 생각을 하니, 그녀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은지야"
"네 오빠"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그저 마냥 어린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도 벌써 대학을 졸업했으니
클만큼 컸고, 생긴 것도 충분히 어디 가서 안 빠지는 얼굴에, 그토록 나를 잘 따르는데도 왜 얘를 나는
진지한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아'
그렇지. 그녀를 여자라고 생각하기에 첫 만남의 나이는 그녀가 너무 어렸고, 또 '소녀'가 '여자'로 자라
나는 과정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좀
늦은 첫 연애를 처참하게 실패하고 너무 불쌍하게 우는 모습을 보아서, 그래서 그녀에게 또 한번의
실패를 안겨줄까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이후로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연애를 하지 않았고, 어느새 그녀의 나이도, 또 나의 나이도 다
충분히 먹을만큼 먹은 나이가 되었지.
'흐음'
너무 오랫동안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녀도 어느새
홀짝홀짝 마시더니 거의 다 마셨다. 머릿 속으로 몇 마디를 고르다가 난 그냥 제일 바보같은 한 마디를
골랐다.
"우리 사귈래?"
분명히 나의 말을 알아들었음이 분명하도록 긴 뜸을 들린 그녀는 그제서야 다시 되물었다.
"네?"
"우리 사귀지 않을래?"
반복해서 다시 물은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듯 잠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말했다.
"오빠랑 저랑요?"
"응"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내 대답에 그녀는 굉장히 당황해하다가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랑 사귀고 싶다고? 오빠 한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글쎄, 왜일까. 나는 억지로 답을 짜내는 대신 그녀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너는 싫어?"
뭔가 굉장히 재미없는 패턴, 실패하는 패턴으로 빠져드는 듯 하지만, 뭐 그래도 딱히 나쁘지는 않다.
그녀와의 특별한 시간, 그리고 특별한 장소에서 한 고백인데 실패한들 어쩌랴.
"싫은 건 아닌데요…"
싫은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아 그냥 괜히 말했나, 하고 방금 전의 생각을
조변석개하듯 뒤집어 후회했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나를 꽤 기쁘게 했다.
"저도 솔직히 오빠 되게 오래 전부터 많이 좋아했는데요, 오빠는 한번도 나한테 여자로서 대한 적
없잖아요. 그냥 맨날 동생처럼만 대했지.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고백해요?"
으흠. 궁금할만한 질문이고, 그녀에게는 물을 자격이 있는 질문이다. 난 잠깐 사이 떠올린 내 고백의
이유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사실 이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다.
"맞아. 그동안 사실 너 보면서, 물론 되게 예쁘고 귀엽다 라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냥… 아는 동생
처럼 생각했는데, 오늘, 아니 엊그제부터 너랑 따로 이렇게 둘이 다니다보니까, 자꾸 니가 여자로서
보이더라고. 생각해보니 나도 너 많이 좋아하긴 했어. 근데 예전에는 뭐, 니가 어렸고, 또 지금은 내
나이도 너가 좀, 아까운 나이고. 그러다보니 그냥 음, 그랬지. 고백하기가"
조금 찌질하다 싶은 고백 이유이기도 한데, 뭐 내가 멋진 놈이 아닌 이상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내
말에 그녀는 참 고맙게도 반박해주었다.
"오빠 나이가 뭐가 아까워요"
"니가 나한테 아깝다는 이야기지"
"하나도 안 아까워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거의 다 빈 잔을 들어 말했다.
"우리 건배해요"
"그래"
"오늘부터 우리 첫 날이에요 이제"
"그래"
잔을 부딪히고 그녀와 나는 각각 잔을 비웠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놓고
물었다.
"오빠 그러면 오늘 나 여기 데려온 것도 고백하려고 데려온 거에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아니. 그냥 너 멋진거 구경시켜주려고"
"정말 아니에요?"
어 정말 아닌데 그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솔직해 질 이유는 없지.
"고백했다가 실패하면 뛰어내릴라고 했다 왜"
"으하"
내 말에 갑작스럽게 빵 터진 그녀는 박수를 치더니 웃음을 지우고는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저쪽 테라스
구석의 커플을 바라보며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도 쟤들처럼 뽀뽀해요"
속으로 '사귄 첫 날부터?' 라는 생각을 문득 했지만, '같이 잠부터 자고 사귄 적은 없었냐 새삼스럽게 왜?'
하고 나에게 되물었고 '그래도 얘니까' 라는 반대를, '이제는 애로 안 보인다며? 여자라며?' 하는 반박으로
무찌른 후 그렇게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향긋한 그녀의 향수 냄새와, 달콤한 칵테일 맛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달이 무슨 달이었더라. 보름달
이었던가… 고맙습니다, 달님.
"괜찮아, 별로 안 비싸"
흔한 칵테일 한 잔에 우리 돈으로 2만원이 넘는 가격은 분명 비싼게 분명했지만 이 정도 분위기에 이 정도
전망을 가진 바라면 충분히 이 돈을 내고도 남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예약을 하지않아 아쉽게도 정말로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는 앉지 못했지만 어차피 테라스가 따로 마련돼 있으니 그쪽에서 내려다보면 된다.
"뭐 마실래?"
"뭐가 맛있어요?"
"글쎄…"
여기서 바로 "이거 맛있어" 하고 추천해주면 멋있겠지만 한박자 놓치고 잠깐 고민하다가 하나를 짚었다.
"블루 하와이안 마셔봐"
"맛있어요?"
"뭐, 응. 맛있을거야. 달달해서"
"좋아요"
칵테일이 나오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테라스 쪽으로 나갔다. 도심의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고층 야외 테라스… 훅 불아온 바람에 머리가 휘날린다. 시원한 바람이 기분 좋다.
"와, 대박!"
"전망 좋지?"
"네! 짱이에요"
계속해서 부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결이 휘날린다. 이마 넓은 것이 컴플렉스인 그녀는 열심히 앞 머리를
붙잡고 있다. 그게 귀여워 피식 웃었다.
"오빠 왜 웃어요?"
"너 열심히 앞머리 붙잡고 있는게 귀여워서"
"아"
살짝 부끄러워 하다가 바로 옆의 스탠딩 테이블에 칵테일 잔을 올려놓고 다시 반대편 손으로 앞머리를
내리누른다.
"저 이마가 너무 넓어서요. 학교 다닐 때도 별명이 이마 반이었어요"
"얼마나 넓은데?"
"아 안되요"
얼마나 넓은데? 하며 이마 쪽으로 살짝 손을 가져가자 질색을 한다. 뭐 보긴 몇 번을 봤는데. 넓긴 넓지만
막 그리 컴플렉스 가질 정도는 아니두만. 하여간 여자들의 컴플렉스는 참 다양하다.
"오빠 근데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요?"
"뭐 그냥. 옛날에 대학교 때 처음 여행 올 때, 막 그럴 때는 미친듯이 검색해보고 그러잖아. 그러다가 발견
해서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는데 실제로 온 건 재작년에 처음으로 와봤어"
"와 그럼 여기 되게 오래된 바인가봐요"
'나의 대학 시절'이라는 말에 '오래된 바'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야! 나 대학교 졸업한거 겨우 5…아니 7년이구나"
순간 반박하려다가 할 말을 잃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오히려 그녀가 웃었다.
"거봐요. 7년이면 엄청나지 뭐"
생각해보니 그러네. 언제부턴가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가는 것 같다. 바람은 잠깐 멈추었다가 또 다시 시원
하게 불었고, 계속 부는 바람이 신경 쓰였던지 한 모금 마신 칵테일 잔을 다시 내려놓은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었다. 머리를 뒤로 묶으니 새삼 느낌이 색달랐다. 조금 더 여성스러운 느낌도 났고.
'그러고보니 오늘 입은 옷도 참 예쁘다'
전망 끝내주는 고층 바, 라고 하니까 딴에는 챙겨온 옷 중에 제일 시크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은 듯 한데,
그녀가 입어서인지 시크한 느낌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도 평소의 그녀와는 다른 느낌이라
조금… '여자'로 보였다.
"근데 너 어떻게 여행 오면서 힐을 챙겨올 생각을 다 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저도 정말 신게될 줄은 몰랐어요. 원랜 그냥,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사진용으로 가져
온건데 오빠가 아까 분위기 좋은데 갈 거라고 해서 신었어요" 라고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얘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얘가 이제 몇 년 후에 스물 아홉, 서른이 되면, 그래서 여자
로서 좀 더 원숙해지면, 그때는 정말 멋진 여자가 되겠구나, 하는. 아직은 그저 예쁜 동생 같은 느낌이지만.
"익스큐즈 미"
바로 옆을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세워 진 토닉 한잔을 더 주문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저기 멀리
멋진 야경을 바라보며 짧은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아, 한국 가기 싫다"
잠깐 이어진 침묵을 깬 것은 그녀의 한 마디. 나는 쿡쿡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일이면 돌아가야 되는데"
"너무너무 싫어요"
"그래, 나도 싫다"
내 맞장구에 그녀는 또 한 모금 칵테일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빠는 한국 가면 이제 막 승진도 하고 좋은 일 가득하잖아요. 뭐야, 난 아무 것도 없어. 글구
여기 올 때도 아빠가 뭐랬는 줄 알아요? 기집애가 정신머리 없어서 돈 모을 생각은 못하고 해외여행
이나 나다가고, 아주 정신 나갔다고. 아 얼마나 짜증났는데. 여행경비에 일원 한푼 안 보태주구선!"
자기 아버지를 나름 그럴 듯하게 흉내까지 내며 하는 그녀의 말에 난 그만 빵 터져버렸다.
"아버지가 그러셨어? 아 웃기다. 어른들 그러시잖아. 막상 그러고서는 나가는 날에는 몸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아 우리 아빤 안 그래요. 여기 도착해서 공항에서 집에 전화하니까는 돈 많이 쓰지말고, 전화도 국제
요금 나오니까 그냥 별 일 없음 뭐 하지도 말라는거 있죠? 아 진짜 우리 아빠 친 아빠 맞아?"
그 말에 또 한참을 웃었다. 내 유쾌한 웃음에 새 칵테일과 피넛, 나초 안주를 새로 가져다 준 종업원도
괜히 슥 미소를 짓고 떠난다.
"오빠, 쟤도 괜히 웃어요"
"그러게. 내 웃음이 웃긴가?"
"조금 볼륨이 크긴 했어요"
슥 옆을 보니 테라스에는 아까 있던 몇 커플들도 다 들어가고 저기 테라스 구석에서 입술을 서로 주고
받는 금발 커플 하나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춥진 않아?"
"아뇨 안 추워요. 시원해서 좋은데. 오빠 추워요? 추우면 들어가요"
"아니야. 나도 시원해서 좋아. 너 추울까봐"
"아니에요 안 추워요"
안 춥다면서도 '춥다'라는 말을 해서인지 괜히 습관적으로 팔뚝을 문질러 본 그녀. 그리고 순간적으로
나마 그녀의 살짝 패인 옷 사이로 그녀의 모인 앙가슴에 힐끔 눈이 간다. 글래머는 절대 아니지만 여튼
남자로서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 흠.
"오빠 근데 낮에 어디 다녀온 거에요?"
"아, 나 여기 올 때 누가 뭐 좀 사다달라고 했거든"
"어떤거요? 누가? 여자가?"
평소 그런 것을 그리 굳이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왠지 기분이 업 되어 있어서일까. 그녀는 그것을
파고 들었고 나는 머릿 속으로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짖궂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뭐 좀 사다달라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는 말에 순간적으로나마 얼굴 빛이 흔들린 그녀. 하지만 다시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누군데요? 오빠 좋아하는 여자 있어요? 농담이죠?"
농담인 척 하는 이면에 그녀의 긴장이 느껴지는 말에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난 더이상 짖궂게 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울 엄마가 좋아하는 여기 빵 있걸랑. 옛날에 한번 사다드렸는데 너무너무 맛있다면서 좋아하셔서 이번
에도 좀 사다드리려고"
"에이, 엄마 아니죠?"
내 장난에 나름 꽤나 놀랬던 모양인지 솔직한 대답에도 한번 더 떠보는 그녀. 귀엽다.
"야, 내가 여자가 어딨냐?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한테 외국까지 나와서 꼴랑 빵 사다주는 놈이 어딨어"
그제서야 픽 웃으며 안심하는 듯한 그녀. 아니 안심인지, 그저 '그래 한번 넘어간다' 라는 말인지는 모르
겠지만. 그리고는 물었다.
"오빠는 왜 연애 안 해요? 오빠 연애 안 한지 꽤 오래 됐죠?"
너만 모르지 그 사이에 꽤 했는데.
"글쎄?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치"
"너는 연애 안 해?"
"나요? 음, 모르겠어요"
별로 싱겁고 재미없는 이야기. 사실 어젯 밤에도 했던 이야기 아닌가. 트윈 베드 옆에서 슬슬 잠에 빠져
들기 직전에 그 질문을 했던 그녀. 묘한 뉘앙스이기는 하지만… 흠.
그러고보면 트윈 베드라고는 해도 한 방에서 자도 무탈한 그녀와 나 사이. 무어라 정의내리면 좋을지 참
애매한 사이. 분명 그녀도 나에게 호감이 있고, 나 역시 그녀가 분명 여자로서 싫진 않은 그런 사이.
'왜일까'
그저 오래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라고만 하기에는 묘한 모호
함이 남는 그런 사이. 언젠가 그녀에게 들이대던 남자애가 나를 굉장히 견제하던 때도 있었지.
"오빠 무슨 생각해요?"
눈에 촛점까지 잃어가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 다른 생각을 하니, 그녀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나에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할까.
"은지야"
"네 오빠"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 그저 마냥 어린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그녀도 벌써 대학을 졸업했으니
클만큼 컸고, 생긴 것도 충분히 어디 가서 안 빠지는 얼굴에, 그토록 나를 잘 따르는데도 왜 얘를 나는
진지한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아'
그렇지. 그녀를 여자라고 생각하기에 첫 만남의 나이는 그녀가 너무 어렸고, 또 '소녀'가 '여자'로 자라
나는 과정을 멀리서나마 지켜보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녀가 좀
늦은 첫 연애를 처참하게 실패하고 너무 불쌍하게 우는 모습을 보아서, 그래서 그녀에게 또 한번의
실패를 안겨줄까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이후로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연애를 하지 않았고, 어느새 그녀의 나이도, 또 나의 나이도 다
충분히 먹을만큼 먹은 나이가 되었지.
'흐음'
너무 오랫동안 내가 말을 하지 않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칵테일을 마셨다. 그녀도 어느새
홀짝홀짝 마시더니 거의 다 마셨다. 머릿 속으로 몇 마디를 고르다가 난 그냥 제일 바보같은 한 마디를
골랐다.
"우리 사귈래?"
분명히 나의 말을 알아들었음이 분명하도록 긴 뜸을 들린 그녀는 그제서야 다시 되물었다.
"네?"
"우리 사귀지 않을래?"
반복해서 다시 물은 나의 말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듯 잠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말했다.
"오빠랑 저랑요?"
"응"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내 대답에 그녀는 굉장히 당황해하다가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랑 사귀고 싶다고? 오빠 한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잖아요"
글쎄, 왜일까. 나는 억지로 답을 짜내는 대신 그녀의 생각을 먼저 물었다.
"너는 싫어?"
뭔가 굉장히 재미없는 패턴, 실패하는 패턴으로 빠져드는 듯 하지만, 뭐 그래도 딱히 나쁘지는 않다.
그녀와의 특별한 시간, 그리고 특별한 장소에서 한 고백인데 실패한들 어쩌랴.
"싫은 건 아닌데요…"
싫은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아 그냥 괜히 말했나, 하고 방금 전의 생각을
조변석개하듯 뒤집어 후회했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나를 꽤 기쁘게 했다.
"저도 솔직히 오빠 되게 오래 전부터 많이 좋아했는데요, 오빠는 한번도 나한테 여자로서 대한 적
없잖아요. 그냥 맨날 동생처럼만 대했지.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고백해요?"
으흠. 궁금할만한 질문이고, 그녀에게는 물을 자격이 있는 질문이다. 난 잠깐 사이 떠올린 내 고백의
이유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사실 이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다.
"맞아. 그동안 사실 너 보면서, 물론 되게 예쁘고 귀엽다 라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그냥… 아는 동생
처럼 생각했는데, 오늘, 아니 엊그제부터 너랑 따로 이렇게 둘이 다니다보니까, 자꾸 니가 여자로서
보이더라고. 생각해보니 나도 너 많이 좋아하긴 했어. 근데 예전에는 뭐, 니가 어렸고, 또 지금은 내
나이도 너가 좀, 아까운 나이고. 그러다보니 그냥 음, 그랬지. 고백하기가"
조금 찌질하다 싶은 고백 이유이기도 한데, 뭐 내가 멋진 놈이 아닌 이상 뭐 당연한 거 아니겠나. 내
말에 그녀는 참 고맙게도 반박해주었다.
"오빠 나이가 뭐가 아까워요"
"니가 나한테 아깝다는 이야기지"
"하나도 안 아까워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거의 다 빈 잔을 들어 말했다.
"우리 건배해요"
"그래"
"오늘부터 우리 첫 날이에요 이제"
"그래"
잔을 부딪히고 그녀와 나는 각각 잔을 비웠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놓고
물었다.
"오빠 그러면 오늘 나 여기 데려온 것도 고백하려고 데려온 거에요?"
아니 그런건 아닌데.
"아니. 그냥 너 멋진거 구경시켜주려고"
"정말 아니에요?"
어 정말 아닌데 그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솔직해 질 이유는 없지.
"고백했다가 실패하면 뛰어내릴라고 했다 왜"
"으하"
내 말에 갑작스럽게 빵 터진 그녀는 박수를 치더니 웃음을 지우고는 내 옆으로 왔다. 그리고 저쪽 테라스
구석의 커플을 바라보며 나에게 속삭였다.
"우리도 쟤들처럼 뽀뽀해요"
속으로 '사귄 첫 날부터?' 라는 생각을 문득 했지만, '같이 잠부터 자고 사귄 적은 없었냐 새삼스럽게 왜?'
하고 나에게 되물었고 '그래도 얘니까' 라는 반대를, '이제는 애로 안 보인다며? 여자라며?' 하는 반박으로
무찌른 후 그렇게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향긋한 그녀의 향수 냄새와, 달콤한 칵테일 맛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달이 무슨 달이었더라. 보름달
이었던가… 고맙습니다, 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