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하니 나가더니 바로 택시부터 잡는 그녀. 속으로 '아이 씨발' 하고 한 마디 하고 따라나서며 그녀에게 말을
건낸다.
"세희야,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세희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힐끔 택시 오는 쪽을 바라보자 저기 빈 택시가 온다. 아 씨발. 아예 이젠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말한다.
"아 세희야, 세희야. 오해야 오해. 어? 야 걔가… 으흠! 아니, 걔가. 그냥 자기, 라고 부르는 애야. 뭐 술만 좀
마시면 그래. 어? 아 걔는 무슨 그런 카톡으로 그런 미친 장난을 해서…"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모든게 다 끝났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놓아
줄 수는 없다.
"야 내 말 좀 들어봐. 어?"
오케이, 다가오던 빈 택시가 그대로 스쳐지나간다. 한 30초? 아니 1분 정도… 시간을 벌었다. 좋아. 게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가, 아니 물론 니 맘은 내가 다 이해해. 걔 이름이 희진이야 희진이. 스물 다섯, 아니아니 여섯살이고…"
음, 씨발. 마음 가라앉혀 씹쌔끼야. 이미 좆된거 뭐 긴장해. 좋아. 플랜 삐다.
"그래, 야. 솔직하게, 정말 솔직하게 모든거 다 말할께. 나 걔랑, 그저께 술 한잔 먹었어. 그리고, 영화도
같이 봤어. 근데! 내가 걔한테… 아니, 걔가 나한테, 그건 그렇게 해야되는거야. 왜? 내가 걔 예전에 크게
도와줬어. 그래서 걔는 나한테 밥을 사야돼. 밥? 아니 술을 사도 모잘라. 그래서 그렇게 얻어먹은거야.
그게 끝. 근데 걔가 야, 너라면 안 그러겠냐? 존나 도와준 사람한테 호감 가는거. 어? 그래서 나 좋아하는
눈치야. 그래서 뭐 아예 막 들이대는거. 오빠 오빠 막 그러고… 그게 전부야"
그제서야 세희는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럼 걔랑 사귀어! 너보고 자기래잖아. 너도 뭐 걔 싫은거 아닌가보네. 둘이 사귀어!"
싸우는 모습을 보며 길거리의 20대 행인 둘이 이쪽을 쳐다본다. 씨발. 확 눈깔을 부라리려다가 세희가
워낙에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을 아니 일단은 넘기고.
"아니이, 야, 야 만약에 그러면 너 주변에 뭐야, 그, 태진이 오빤가 뭐 그 사람. 내가 니한테 한번이라도
그 사람 갖고 뭐라고 한 적 있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나도 너, 존나 얼척 없는거 많아"
세희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한번 치더니 다시 택시를 잡으려 한다. 아 씨발. 힐끔 저쪽을 본다.
오케이, 다행이다. 텅텅 비었네.
"야, 오해라고오. 어? 아 나도 막 지금 되게, 당혹스럽고, 너한테, 그래 너 오해할 수 있어. 그래서 나도
딱 이 상황을 뭘, 아 뭐라도 설명해야 될지 막막한데, 진짜 하아, 아니 진짜 아니라고. 그냥 진짜 옛날에
너랑 사귀기 전에, 걔 전 남친이, 완전 스토커라서 걔 막… 그때 내가 도와줬었어. 그리고 걔한테도 새
남친 생기고, 나도 너랑 사귀고. 그래서, 그래서 연락 끊어졌다가 마침 얼마 전에 우여어언하게, 걔가
내 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건거야. 그래서 엊그제 술 한잔 먹고, 뭐 그러다 걔가 막, 하아"
세희는 내 말이 아예 듣기도 싫다는 듯 짜증나는 표정으로 "손 놔" 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하아 씨발.
플랜 씨.
"너는 내 말을, 내가 그렇게 안 믿기니? 반 년을 사귄 남친을 못 믿어? 어!"
"못 믿어"
하아.
"내가 너를 모르니? 너 이대로 집에 가면 분명히 연락 끊고, 나 완전 개 쓰레기 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고
관둘거잖아. 근데, 하아, 나 진짜 돌겠다. 야아, 아니라고 진짜. 아니야. 어? 아니라고오"
"나 피곤해, 나중에 이야기 해"
내가 정색하며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말했다. 이게 더 골치 아프다. 아 진짜 세희
이 기집애 참.
"아 그래 세희야. 그러니까 알았어. 일단 내가 조곤조곤 처음부터, 진짜, 뭐랄까. 우리 조카 준희한테
옛날 이야기 설명하듯 차근차근 설명할께. 그러니까 지금 막 너 들어간다 어쩐다 하지 말고 요 앞에
까페에 가서 이야기 해보자"
하지만 세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길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뭐지, 하고 생각할 무렵 그녀는 눈물을
보였다.
"놔 줘… 나 집에 갈거야. 그만하자, 그만하자 우리. 이제 놔 줘"
하아… 아 이 개씨빨!
"세희야, 너 내가아, 아아 진짜. 미치겠다. 으흐흠!"
머리 속이 새하얗다. 모든게 다 무너지고 있다. 어지럽다. 언젠가 새벽녘에 크게 싸우고, 형광등 조명
아래 세상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도는 그 기분을, 지금 새벽 2시의 길거리에서 느끼고 있다. 아이 씨발.
아 진짜 이래되나. 그래, 다 놔주고, 그냥…
아니야. 아니야. 박스야, 정신차려. 너, 알잖아. 이건 아니라는거. 정신줄 다시 잡아.
"세희야, 알았어. 다 알았어. 정말 너 하자는대로 다 할테니까… 알았어. 하아, 오해, 아니 진짜…
오해든 뭐든 다 내 잘못이야. 너한테 그저께, 친구들이랑 술 마셨다고 한거, 거짓말한거, 정말로 내가
미안해. 그리고…근데 일단, 오늘은 같이 있자. 설명 다 해줄께. 너 이대로 집에 보내면, 그렇게 내가
끝내면…내가…"
감정이 북받친다. 하아, 모든게 다 끝나도 좋다. 하지만 끝까지 해본다.
"됐어. 알았어. 니 말 알았으니까, 나 놔줘. 나 집에 갈래"
"세희야. 하아…"
"니 말 다 알았으니까 이 손 놓으라고. 나 막 소리 지르게 만들지 말고"
정색하는 그녀의 표정. 하, 참. 아… 참. 이렇게 끝나네. 아휴 참, 정말 씨발. 하하, 허. 참… 내가…
"…왜 웃어?"
어? 어…아직 안 끝났네. 흠, 좋아.
"그래, 가. 나는… 자 봐라. 내 휴대폰 통화목록이야. 자 봐. 너너, 너, 형준이 형, 너, 그저께 저녁에 그
희진이, 그리고 너, 너, 엄마, 너, 너, 너, 너…"
한박자 쉬고-
"이게 나야. 이게 나라고. 너 만나면서… 아니다. 여튼, 솔직히 말해서 세상 여느 여자가 남친이 다른
여자랑 간만에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거 좋아하겠냐. 그래서 그냥, 형이랑 만난다고 구라…그짓말
한거야. 그래, 거짓말 한거 잘못했지. 그리고 어쨌간에 오해하게 한거 미안하고, 만약에 니가 나를
그래도 못 믿고 가겠다면, 그것도 나겠지. 하아"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자괴감이 든다. 뭐야 이게 씨발. 이게 다 뭐야. 하 씨발.
"에이씨, 에이… 헤이이…씹, 후우, 미안하다, 세희야. 근데 이건 정말로 오해고…"
왼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아. 잘 들어가라. 난 갈께. 미안하다"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하늘 한번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길게 한숨을 내쉰다.
흐흥, 웃겨. 왠지 이럴거 같더라고. 아침에 양말을 신는데 빵꾸가 뚫려있고, 그걸 갈아신으니까 이번
에는 뒷꿈치가 뚫려있고. 아니 그게 무슨 징조야.
솔직히… 그래, 희진이랑 좋았지. 뭐어, 간만에 오빠오빠 하는 기집애랑 술 먹으니 좋았지. 그러니까
좋더라고. 내가 뭐, 헛소리를 해도, 밑보이는 짓을 해도 그냥 모르는 척 해주고, 적극적으로 좋아해
주는 애 간만에 만나니까, 좋더라고. 마음이 흔들린게, 그게 죄지. 흐.
주머니에 손을 꽂고 걷는다. 세희는 지금 이 순간 어쩌고 있을까. 등을 돌릴까 말까 고민하다 그냥
다 좆될 것을 각오하고 다시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래, 어차피 난 인내심 없는 새끼야. 그녀는
여전히 택시를 잡고 있다.
저쪽 편을 바라본다. 여전히 택시는 오지 않는다. 이 시간에 택시 잡는게 쉬운 일은 아니지. 난 다시
뚜벅뚜벅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혹시 울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난 '그래'
하고 기침 한번 하고 다가갔다. 그리고 말 없이 그녀 옆에 서있었다.
"…"
그녀가 힐끔 나를 바라본다.
"왜?"
세희를 보며 물었다. 세희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혼자 걸어가더니 왜 돌아왔어?"
으흠.
"어… 생각해보니까, 우리 집 가려면 저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
흐. 어이없는 내 너털웃음에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흐. 난 실실 웃다 그녀가 웃음을 거두자 나도 웃음을
거두었다.
"미안해. 같이 가자"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자 그녀는 손을 피했다.
"왜 이래"
음…항상 나는 마지막 5%가 부족했지. 하지만 어차피 완벽한 놈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 조금 어색하게
그녀의 손을 잡으려던 손을 다시 거두었다가 저기 택시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손을 뻗었다. 달려오던
택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어…그냥 타자"
모범택시였다. 잠깐 움찔했지만 어차피 늦은 시간이고 하니까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내 손을
뒤에서 세희가 끌어당겼다.
"됐어"
내 손을 이번에는 세희가 잡았다.
"미안합니다"
근처에 멈춰섰던 택시는 다시 가버렸고, 우리 둘은 서로의 얼굴을 슬몃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곤한 눈
으로 말했다.
"뭘 봐"
"흐"
그리고 나는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고 가자"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그녀는 다시 한번 권하자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번 권하자 그제서야 세희는 옆
머리를 귀 뒤로 넘기더니 가만히 있었다. 나는 세희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그녀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한번, 우리의 인연은 고비를 넘는다. 새벽 3시…엄청나게 피곤하지만 그녀의 발은
내 몸보다 몇 배는 피곤할 것을 알기에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준다.
"이따가 씻고 누우면, 발 맛사지 해줄께"
"됐어"
"해줄께"
문 닫힌 대로변의 가게들을 지나, 저기 모텔촌 골목의 불빛을 향해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걸어간다.
↧
"야야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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