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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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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미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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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에 다녀온 여독인지 뜬금없이 감기에 걸렸다. 콧물은 쉴새없이 흐르고 목소리는 완전히 갔다. 결국에는
오늘 가기로 했던 캐리비안 베이 약속은 캔슬했다.

"으음…"

계속 자다 오후 3시 반이 넘어서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목은 칼칼하고 머리는 띵하고 코는 완전히 막혔다. 팽!
하고 코를 풀고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속이 출출해서 뭐라도 먹으려고 했더니 딱히 먹을게 없다. 라면 하나,
햇반 하나가 없다. 결국 계란후라이 3개로 때웠다.

어제 서점에서 사온 잡지를 뒤적거린다. GQ와 새로 창간한 남성잡지 GEEK을 사왔다. GQ에서는 부록으로
AA의 빤쓰를 줬고, GEEK에서는 작은 소책자를 줬는데 나름 재밌다. 자고로 잡지의 창간호는 대부분 재밌는
법이다. 잡지 창간을 준비하면서 생각해 온 아이디어들이 많이 녹아있을테니까.

대충 뒹굴고 있노라니 '진'이 전화를 했다. 자기 이직 준비하는데 자소서 좀 봐달라는 것이다. 대기업 공채
시즌, 그만큼 이직의 황금기다. 그녀에게 나는 내가 현재 실직 중이라는 말을 안 했다. OK했다. 다만 우리 집
근처로 오라고 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방을 청소했다. 대충 방을 치우고, 쪼리에 정사각형 토드백 하나에 노트북
과 마우스를 챙겨 집 근처 까페로 향했다.

콧물은 쉴새없이 흐른다. 흥흥 거리며 콧물을 닦는다. 미칠 거 같다. 까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있노라니 그녀가 왔다. 자소서를 봐달라면서 노트북도 안 들고 왔다.

"넌 자소서 봐달라며 노트북도 안 들고 오냐"
"니꺼 있잖아"

마케팅 관련해서 IT기업으로의 이직을 준비하는 그녀. 이미 거의 다 쓴 자소서다. 뭐 딱히 크게 손 볼 것도
없다. 한두 시간 노가리 까면서 조금씩 다듬다보니 완성했다. 생각해보니 슬슬 끝날 시간이라 중간에 '강'을
불렀다. 프리랜서 웹디자이너인 그녀는 간만에 클라이언트네 회사에서 작업하고 마침 그걸 끝내고 퇴근 중
이라고 했다. 여기로 오라고 했다.



7시 반. 콧물이 너무 흐르고 몸도 안 좋아 잠깐 까페 앞의 약국에를 다녀왔다. 종합감기약과 쌍화탕을 먹고
비타민 제제를 하나 사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자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어후 이제 반팔은 못 입겠는데"
"감기까지 걸린 애가 너는 왜 반팔을 입었냐. 커피도 찬 거 마시고"
"이런 날씨인 줄은 몰랐지. 아 춥네"

'진'은 항상 가을이 싫다고 했다. 결혼을 준비하다 중간에 깨진 남자와 이별한 시기가 10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는데, 가을의 주말 오후, 스산한 바람이 불고 해가 저물어 가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제주도 여행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같이 갈래?"
"너랑 나랑 둘이?"
"아니. '강'이랑 '문'이랑도"
"글쎄. 생각해보고. 근데 나 얼마 전에 마카오 다녀와서"
"아 맞다"

내 노트북으로 그녀는 한동안 제주도 여행을 이것저것 검색했다. 



'강'이 도착했다. 요즘 홈페이지랑 쇼핑몰이랑 2개나 일거리가 들어와서 그거 만들어주느라 정신이 없단다. 

"너도 반팔이네"
"오빠 오늘 완전 춥죠?"
"너네 둘은 어째 날씨를 잊고 사니"
"아침에는 안 추웠어요"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으러 갔다. 인근의 베트남 쌀국수 집. 2인용 세트 메뉴에 닭가슴살 볶음밥 하나를 추가
해서 먹었다. '진'이 제주도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강'은 그 안에 따로 일이 안 생기면 OK라고 했다. 나도
일단은 OK라고 해두었다. 신이 난 모양인지 '진'이 4만원 넘게 나온 밥값을 결제했다. '강'이 물었다.

"근데 오빠 마카오 가서 뭐 따로 우리 선물 안 사왔어요?"
"사올 것도 없었어"
"에이"
"아, 고디바 초콜렛 먹을래?"
"오! 나 고디바 초콜렛 완전 좋아하는데 오빠 짱!"

원래는 다른 누구 줄려고 산 건데. 뭐 말 나온 김에 그냥 먹기로 했다. 집 근처의 또 다른 까페로 향했다.
둘이 까페에서 잡지를 보는 동안 잠깐 집에 들러서 냉장고에 넣어둔 고디바 초콜렛을 가져왔다.

"먹어"
"나는 뭐 없어?"
"두 봉지야"

홍콩에 들렀을 때 센트럴의 IWC 안 매장에서 사온 고디바 초콜렛이다. 솔직히 초콜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게 딱히 뭐 맛있나 비싸기만 하지,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녀들은 좋아라 한다.

"영화 볼래?"
"내일?"
"아니 오늘"
"어떤거?"
"그…뭐지? 예술 영화"
"밑도 끝도 없이 뭔 예술 영화"

'진'의 뜬금없는 예술 영화 드립에 나와 '강'이 둘 다 웃었다.

"그…있잖아. 뭐였지, 아, 그 피…"
"아 피에타? 김기덕 영화?"
"그게 김기덕 영화였어?"
"어"

김기덕 영화라는 말에 '강'은 싫다고 단번에 잘라 말했다.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감독. 문득 '스박? 아 완전
싫어'하는 사람이 있진 않을까 생각해봤다. 여튼, 모바일로 확인해보니 어차피 근처 영화관에서 오늘 상영분
영화는 다 끝난 상태다.

"내일 볼까?"
"아 나 싫은데"
"아님 뭐 다른거 보던가"
"뭐 봐서"

대충 영화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마카오에서 돈 딴 이야기를 해달라고 '강'이 졸랐다. 그녀한테는 말한 적도
없는데 '진'이 잠깐 초콜렛 가지러 갔을 때 들려준 모양이다. 적당히 축약해서 들려줬다.

"진짜 오빠는 뭔가 한량의 기질이 있어. 운이 좋은 남자야"  
"진짜 운이 좋았지"
"오빠 그러다 완전 빠지는거 아냐?"
"빠질 돈도 없다"

슬슬 약기운이 도는 건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충 내일 또 보기로 하고 그렇게 정리하고 일어섰다. 둘이
택시 타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바로 잘 생각이었는데 샤워하고 나니 또 잠이 안 온다. 사놓고 안
본 책을 뒤적였다. 하지만 눈에 안 들어오고 잠도 안 온다. '진'에게서 카톡이 왔다. 집에 잘 도착했고 오늘
도와줘서 고맙단다. 알았다고 하고 노트북을 켰다.

이번에는 내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콧물은 쉴새 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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