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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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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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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시간 그녀 곁에서 머물렀다. 그녀가 힘들 때면 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해서 기분전환을 시켜
주었고,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든 가리지 않고 사주었다. 그녀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설령 내가 곤란한 상황이라도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솔직히 고백도 세 번이나 했다. 물론 다 차였다.

넌 남자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 번, 니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며 한 번, 자꾸 이럴거면 그냥 우리
친구로도 보지말자며 한 번.

"…미안해. 괜히, 마음 쓰고 그러지 마. 하하. 내가 너 좋아하는거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나
들어갈께"
"어…조심해서 들어가"
"어. 그럼 들어가서 편히 쉬어"

매번 차이면서도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 그리고 돌아오는 길, 혼자 집으로 향하며 하염없이 울기도
하고, 그녀를 미워도 해보고, 욕도 해보고… 엄마도 더이상 걔 만나지 말라고 했지. 여우 같은 년이
라고.

"개년…"
 
서운해하기도 하고, 차라리 다른 여자를 만나서 좋아하고 그렇게 잘해줬더라면 하고 후회도 해보고
미친듯이 술 퍼마시고 다음 날 늦게까지 계속 잠만 자기도 하고.


"뭐해?"
"그냥 있지 뭐"
"영화 안 볼래?"
"좋아. 뭐 볼래?"
"아무거나"
"알았어, 내가 예매할께"

그러면서도 며칠 후면 생긋 웃으며 또 나를 꼬여내는 그녀에게 또 호구처럼 바보처럼 나의 바보같은
웃음을 보여주었지. 어쩌면 언젠가는 그녀도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나를 남자로 보아주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나 어제 고백받았어"
"뭐?"
"저번에 말했던 오빠 있잖아"
"어…"
"그래서 사귀기로 했어"
"그렇구나. 축하해"
"그러니까 너도 바보처럼 나만 바라보지 말구 빨리 여친 사귀어"
"하하"
"웃지만 말구"

그녀에게 새 남자친구가 생겼을 때, 서운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힘들어
할 때면 등도 두드려 주고, 늦은 밤 그녀의 투정도 받아주고.


"나 결혼할까? 이 오빠랑"

이러다 말겠지, 하고 생각하던 어느 날 그녀가 결혼을 생각한다는 말에 느낀 왠지 모를 서운함과 허무함.

"좋은 사람 같아?"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고, 좋은 부분도 있지만, 나도 언제까지 이렇게 연애만 할 순 없잖아. 오빠도
슬슬 집에서 결혼 이야기 나오는 것 같고"
"넌?"
"뭐, 사실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는데 결혼하면 어떡하냐"
"사람 다 똑같지"

'다 똑같은게 남자면 나랑 사귀지' 하는 진담 섞인 농담이 입 안에서 우물거리지만 결국에는 그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 라며 조언 아닌 조언을 남기고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불과 한달 후 그녀는 그 남자랑 헤어졌다. 이유는 남자의 외도. 그리고 왠지 그 시점에서 나 역시
그녀에 대한 그 오랜 사랑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솔로가 된 그녀였지만, 이젠 예전처럼
그리 기쁘지도, 다시 설레이지도 않았다.

걸려오는 그녀의 전화도 잘 안 받게 되었고, 아니 일부러 피했고, 답장도 늦게 했다.

이유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그냥 싫었다. 첫 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곁에서 그녀만을
바라보던 그 후유증, 그 염증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급기야는 간만에 만난 카페에서 투정을 부리던 그녀를 향해 나 역시 처음으로 화를 내고는 내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녀를 이제 정말 잃게 되는 것인가 두려웠지만, 솔직히 조금은 홀가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분이
그랬다는 것이고, 그녀와의 관계를 정말 관두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무렵, 그
제서야 부재 중 통화 두 통과 [ 미안해 ] [ 정말 화난거야? ] [ 화풀어라 ] 라는 카톡 대화를 발견했다.

'이런건가'

호구처럼 잘해준게 잘못이었구나, 이런 식으로 할 말은 하고 살았더라면 어쩌면 진작 나와 그녀는 잘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답장도, 전화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리고 3일 쯤 지났을 무렵, 이번에는 내가 그날 이후로 연락이 
없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카톡 역시 확인하지 않았다. 또 하루가 더 지나도록.
그제서야 버럭 걱정이 들었다. 한번도 없던 일이다.


그 날 까페에서 그녀는 되게 힘들어 했는데. 너도 똑같은 남자야, 하는 말에 시덥잖은 농담으로 받아
주더가 정색을 하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서운해서 한 마디 했더니 그게 싸움으로 번졌고, 마치 연인
처럼 그렇게 몇 분이나 이야기하다, 불끈하며

"너한텐 내가 그냥 그렇게 편한지 모르겠지만, 난 솔직히 항상 니가 제일 어렵고 까다로웠어. 그래도
난 한번도 너한테 화 낸 적도 없었어. 왠 줄 알아? 니가 좋으니까. 그냥 혹시라도 니가, 나랑 싸우고
기분 틀어지고 화내면 멀어질까봐, 그게 무서워서 항상 그냥 내가 양보하고, 사과하고 그렇게 니 옆
에서 5년 동안 있었어. 근데 이제 나도 지쳐. 이제 그만하자. 나 더이상 니 친구 안 할래. 더이성 너
한테 구질구질하게 여자친구가 되어달라는 말도 안 할께. 그냥 관두자. 내가 다 포기할께. 나 먼저
들어간다"

그렇게 참고 참았던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돌아선 것 뿐인데. 그 날 집에는 잘 들어간걸까. 몇
번이나 전화를 더 했지만 전화기는 계속 꺼져 있었고 난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겨우 그녀의 집
근처로 향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인기척
도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 한참을 기다렸다. 밤이 되도록. 그럼에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힘없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골목에서 그녀를 만났다.

"어? 왠일이야?"

너무나 멀쩡한 얼굴, 반가움이 깃든 목소리. 나는 그만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 미친 놈아 무슨 일이냐고"

발버둥 치는 그녀를 다시 풀어주고는 "니가 그 날 싸우고 하도 연락도 안 되서 걱정했잖아" 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그 날 집에 가는 길에 폰 잃어버렸어. 너 때문이야" 하고 받았다.

그래도 반가웠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했다. 집으로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밖에서 오래 기다렸어?"
"조금"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들어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 하고 말했다.



커피 준다면서 그녀는 나는 방에 두고 화장실에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5년간 그녀 곁을 맴돌며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실제로 같이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그냥 그녀의 곁에서
다른 남자보다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갔다는 사실에 기뻤을 따름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를까. 아니 오늘도 그저 헛된 기대일까.

멍하니 TV를 보다 씻고 나온 그녀. 그녀는 커피 대신 내 저녁 식사 여부를 물었고 나는 안 먹었다고
대답했다.

"아직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했냐"

핀찬을 주는 그녀. 그리고 그녀는 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집에 밥이 없어. 라면만 먹어"
"얼굴 부을텐데"
"보여줄 여친도 없잖아.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부었어"

독한 기집애. 마지막 말은 굳이 안 해도 될 것을. 시계를 힐끔 보니 어느새 밤 11시 20분.

"아니다, 나 그냥 갈께. 라면 물 올리지 마"

나는 몸을 일으켰다.

"왜? 먹고 가지"
"아냐, 됐어"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고, 나는 또 한번 무언가를 슬몃 기대했지만 "그래, 그럼 잘 가" 라는 그녀의
말에 또 한번 허무한 기대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신발을 신었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번 시도마저 실패한다면 정말로 깨끗하게 포기하고 연락까지 내가
먼저 차단할 거라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말했다.

"요 며칠… 전화 안 받아서 걱정 많이 했어"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던 것일까. 그녀는 대꾸가 없었다. 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날 했던 말, 나 진심이야. 나 5년 동안 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 많이 힘들었어. 그래서 하는
내 마지막…"

왠지 모르겠다. 그 말을 하면서 나는 나 혼자 조금 무언가가 복받쳐올랐다.

"마지막 고백인데, 나 정말 안 되겠어?"

겨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렇게 어설프게 신발을 반쪽만 신은 채로 고백했다. 그녀는 계속 무언가
할 말을 찾는 듯 했고, 겨우 나에게 말했다.

"너 정말, 나랑 연애 잘 할 수 있겠어?"
"어"

정말 난 쉬운 남자다. 대답하고 나서도 너무 그 빠른 대답 타이밍에 스스로가 한심했고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내가 그동안 몇 명이나 되는 남자 만났는지 넌 다 알잖아. 그리고 나 그리고 그렇게 좋은 여자도 아니고.
또…"
"또 뭐"
"너, 나를 여자로 좋아할 수 있어? 정말로? 친구가 아니라?"

난 대답했다.

"너한테는 내가 친구였는지 몰라도, 난 니가 계속 여자였어"

내가 생각해도 오글오글한 대사지만, 그게 사실인걸. 진심이었다. 그리고 내 말에 생각이 무척 많아
보이는 표정의 그녀. 한참을 서서 가만히 있던 그녀는 피곤한 듯 침대에 걸터 앉으며 말했다.

"그러면…자고가"

잠시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까지 멍하니 있던 나에게 다시 한번 그녀는 말했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라 출근도 안 하잖아. 자고 가라고"

나는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그럼 너랑 나랑 이제 사귀는거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거 봐. 내가 이래서 너랑 안 사귀려고 했던 거야. 넌 어쩜 이렇게 눈치가 없니. 그걸 꼭 물어봐야 돼?"

난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난 너 사랑 안 하는데" 라고 쌀쌀맞은 대답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솔직히…아주 솔직히는 마음 한 구석에, 결국 마지노선까지 쳐가며, 이렇게까지 해서야 겨우 사귈 수
있었구나 하는 간사한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싫진 않았다. 내 미련한 5년… 그 바보 같았던 5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이래저래 불발탄만
내며 계속 상처받으며 고생한 그녀의 연애사에, 내 또 한번의 씁쓸한 실패담으로 남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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