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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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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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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얼굴이다.

"알바 새로 시작한 거에요?"

담배를 사며 묻는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아…에, 네. 헤헤" 하고 우물쭈물 거리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아이돌처럼 예쁜 외모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살짝 '아줌마삘'이 나는 그
얼굴이 오히려 왠지 정감가고 좋았다. 왜일까.

"영수증 드릴까요"
"음, 필요없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찰나, 그녀가 말했다. 

"라이터는 안 필요하세요?"

필요없는데. 하지만 그녀가 무안해할까 싶어 "아…하나 줘요" 하면서 지갑을 열었는데 잔돈이 없다.
400원짜리 사는데 카드를 꺼내려니 민망했다.

"카드도 돼요?"

그녀도 좀 당황했는지 "네…되긴 되는데…" 하고 잠깐 곤혹스러워하더니 잠깐 가게 안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냥 드릴께요"

귀여운 애가 장사도 할 줄 아네. 라이타를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고마워요"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한테는 말하면 안 되요"
"알았어요"

픽 웃으며 대답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당분간 이 편의점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로 오후부터 심야 타임 전까지 일하는 듯 했다. 난 괜히 더 그 편의점을 더 이용하게 되었다.
마트가 그리 멀지도 않았음에도 괜히 굳이 편의점에서 맥주도 사고, 생수도 사고…가끔 도시락도 샀다.

"도시락 자주 사 드세요?"
"가끔요. 집에서 밥 해먹기 귀찮을 때"
"그렇구나. 저거 치킨 도시락 맛있어요"

솔직히 가끔은 귀찮았다. 담배 하나 사서 빨리 돌아가려고 하는데 한 두 마디라도 꼭 잡담을 걸고, 추가
상품도 때로는 귀찮을만큼 챙겨가라고 부추겼다.

"이거 사면 제토레이 주는데"
"괜찮아요"
"제토레이 안 좋아해요? 그럼 머닛메니드로 드릴까요?"
"그거 그렇게 막 줘도 되는 거에요?"
"사장님만 모르면 뭐"

사장님만 몰라도 되는게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음료 챙겨가라고 챙겨주는데도 됐다고 뿌리치고 나오기
미안해 귀찮음을 무릅쓰고 집어왔다.

"오렌지 주스 좋아하시는구나"
"몸에 좋은 거 잖아요"
"벌써부터 몸 챙겨요?"
"나 이래뵈도 30대에요"

내 말에 그녀는 흠칫 놀라는 듯 했다. 그 놀라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씁쓸했다.

"왜요? 나 어린 줄 알았어요?"
"네에…"
"몇 살인 줄 알았는데?"
"한 스물 두 세살이요…"

고맙다.

"그쪽은 몇 살인데요?"
"열 여덟살이요"

예상은 했지만 역시 고딩이었구나. 어쨌든 그동안 내 나이를 착각하고 있었구나. 이제는 이런 '서비스'를
기대하면 안 되겠지. 조금 씁쓸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런지 몰라도,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조금 실망감이 어린 듯 해서 더 씁쓸했다.

"아, 영수증 드릴까요?"
"됐어요"

이후 며칠 동안 그 편의점에 안 갔다.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꼭 딱히 그 일 때문은 아니고, 회사 일도
바쁘고 금연도 시작한데다 간만에 마트에 가서 몇 만원 어치를 푸짐하게 냉장고 가득 채웠더니 따로 편의점
갈 일이 없었다.




"어 그래? 다 왔어? 어 그럼 마중 나갈께"

간만에 미경이가 집으로 찾아온단다. 핑계는 이 근처에 원룸 좀 같이 보러다니자는 것이지만, 부동산 보러
다니자는 애가 저녁 7시에 와서야 뭘 어쩌자는건가. 그녀의 진짜 속뜻은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그 미련
곰탱이 같은 남친이랑 헤어진지 6개월… 뻔하다.

'아… 없네'

책상 구석 렌즈 박스 안, 콘돔 재고를 확인해보니 한 개도 없다. 그녀가 오기 전에 미리 사둬야지. 휴대폰
이랑 만원짜리 챙겨서 쪼리 신고 슥슥 걸어나가는데 그러고보니 그 고딩이 일할 시간이네.

'어쩌지'

미경이는 거의 다 왔다는데 마트까지 다녀오긴 너무 늦었고, 그렇다고 이따 또 따로 사러 다녀오는 것도
귀찮고, 미경이랑 같이 있을 때 사는건 또 좀 거시기하다. 

'뭐 어때'




"어서오세요"

학교에서 바로 온 것인지 교복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편의점 앞치마만 걸친 그녀. 

"간만에 오셨네요!"

생각보다 텐션이 높다. 내가 반가워서일까. 뭐라고 대꾸해야지.

"교복 입었네? 이래보니 완전 고딩이구나"

내 말에 웃는 그녀. 카운터 쪽에 있는 콘돔 짚는게 조금 민망하다. 괜히 저 쪽의 음료 냉장고쪽으로 가서
아무거나 집어 왔다. 하필이면 콜라다. 그냥 콘돔 사지 말까? 음. 미경이가 갖고 있을 수도 있잖아?

'됐어 얘가 뭐라고'

카운터 한쪽에 쌓인 제네통 콘돔을 짚기 직전 그녀가 물었다.

"어? 왠 콜라? 몸에 안 좋은거 안 마신다면서요"

콘돔으로 향하던 내 손길이 살짝 멈추었다. 얘는 참 기억력도 좋네.

"가끔은 마시고 싶지"

괜히 내 목소리가 조금 퉁명스럽게 나가서일까. 그녀는 힐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혹시 저번에 30대라고 물어봐서 기분 나빴어요?"

뭐라고 답해야 되지.

"아니, 기분이 왜 나빠"
"정말 안 나빴어요?"

난 픽 웃음이 터졌다. 

"왜? 넌 고딩이라고 해서 기분 나빴냐?"
"그건 아닌데, 맨날 존댓말 듣다가 고딩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바로 반말 쓰니까 좀 기분 이상해서요"

아, 그랬구나. 

"미안합니다"

그냥 난 별 뜻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이 애는 빵 터졌다. 역시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을 나이. 좀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 꼭 존댓말 하라는건 아니구요. 편하게 말해도 되요. 나보다 오빠잖아요. 아 근데 이름 물어봐도
되요?"
"어, 당연하지"

그리고 이름을 답하려는 순간 미경이에게 전화가 왔다. 아차, 그새 깜박하고 있었네. 

"어? 어…잠깐 편의점에서 뭐 좀 사느라고. 아 이미 택시에서 내렸어? 어? 어어…어, 그 편의점 맞아.
어 알았어"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 볼륨이 조금 커서, 미경의 목소리를 이 고딩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고딩은
별 말 없이 콜라를 바코드에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콘돔으로 손을 뻗었다. 콘돔을 집어 계산을
요구했다. 그녀는 역시 또 잠깐 움찔했지만 군말 없이 바코드를 찍고 말했다. 

"5천 5백원입니다" 

난 만원짜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역시 말없이 잔돈을 거슬러주었고, 바로 몇 초 전까지 이름을 물어
보고 어쩌던 화기애애한 대화는 사라졌다. 그리고 "아우 더워" 하면서 편의점으로 들어온 미경의
모습을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오세요' 라는 인사는 없었다. 

"어 왔네"
"응 오빠. 나 바로 왔지?"
"어"

미경이 알아채기 전 나는 왼손으로 슥 콘돔을 주머니에 넣고, 콜라를 손에 들고 그녀를 맞이했다. 

"왠 콜라? 오빠 탄산음료 안 마시잖아. 나 기억력 좋지?"
"…어"
"여튼 근데 갑자기 왠 콜라? 목 말랐어?"
"어? 아니 그냥 너 더울테니 마시라고. 나가자"
"어"

편의점 문을 나서며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고딩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영수증 드릴까요?" 라고
새삼스레 물었다. 일전의 그때보다 더 힘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역시 그때처럼 "됐어요" 하고 대답
하며 편의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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