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산타를 믿지 않았다. 아니 단 한번도 진지하게 산타라는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고
해도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산타에 대한 통설은 뭐 하나 우리 집에서 통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우선 우리 집에는 굴뚝이 없는 만큼, 굴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들어오려면
그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작은 방 창문, 혹은 안방 창문을 통해 들어와야 되는데…
자기 전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는 우리 엄마를 감안할 때 우선 현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 했다.
또 작은 방 창문의 경우 당시 우리 집에서 잠깐 더부살이를 했던 막내 이모의 그 예민한 성격상 들어왔다간
이모가 분명 깨어나 비명을 지를테니 그보다 확실한 경보장치가 없었다. 안방 창문이 그나마 들어온다면
유력한 루트겠지만, 상가 건물 4층으로, 잔뜩 이런저런 오만잡다한 짐들이 쌓인 2, 3층의 복도식 창문을
감안컨데 기어올라오는 것도 불가능이요, 저번에 불량학생 형들로 추정되는(하지만 그거 4층의 경욱이 형
이랑 그 여자친구, 그리고 또 다른 형 친구들임을 아는 것은 나와 경욱이 형만의 비밀) 이들이 옥상에서 술
먹고 술병이랑 토사물로 범벅시켜놓고 안 치우고 떠나버린 이래로 반장 아줌마가 옥상 출입문을 잠궈버렸
으니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산타가 정말로 하늘을 나는 눈썰매를 타고 날아다니다가 창문을 열고 들어와 엄마, 아빠, 나, 동생을
깨우지 않고 선물만 몰래 놓고 간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겠지만 아무리 어릴 때라도 그건 믿지 않았다.
정말 최대한으로 봐준 '산타 할아버지'의 실존 가능성은 '돈 많은 노인들의 연말 어린이 선물 봉사활동
연합회' 정도였으니까.
또 산타는 선물을 머리 맡에 걸어놓은 양말에 넣어주고 간다고 했는데, 아 도대체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아버지 양말이라고 해봐야 30cm도 안 되는데, 작디 작은 내 양말 속에는 기껏해야 무슨 선물을 넣어줄
수 있었을까? 괜히 '이 양말이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양말이나 잡아땡기다가 늘어난
다며 엄마한테 등싸다구나 한대 맞은게 전부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산타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잘 울지 않는 나라도 1년에 최소한 몇 번은
울기 마련이었는데, 이것은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 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1년에 단 한번도 울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산타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리고 내가 우는 것을 산타는 어찌 알까? 하늘에서 내려다보나? 그 정도로 어떤 초월적인 존재라면
더욱 내가 받을 가능성은 없다. 울음은 물론이요 가끔 시원이랑 싸울 때 먹는 악독한 마음을 감안하면
도저히 나는 선량한 선물지급대상아동이 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일종의 밀고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라서 남 앞에서 울었을 때만 안 되나? 하지만 이건 또 그
나름대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자기 혼자 있을 때 100번 울었지만 남 앞에선 단 한번도
울지 않은 아이와, 딱 한번 남 앞에서 눈물 흘린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전자의 아이가 선물을 받는다면
후자는 도대체 얼마나 억울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 내가 산타를 믿지 않은, 아니, 산타를 믿는 아이들을 시니컬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단 한번도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야 내가 어려서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그리고 가끔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어머니의
회고를 더듬어보건데 참으로 힘들었던 집안 형편상 그런 것을 챙길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5살, 6살
즈음, 적당히 산타에 대한 은연스러운 기대를 할 무렵에는 우리 집에 산타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산타의 존재 여부에 대한 불신을 확신했고, 동생이 또 성장해 산타를 기대할 나이에 나는 녀
석에게 "산타는 오지 않아, 그런 건 없어" 하고 그 동심을 짓밟는 선언을 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0년 후, 군대를 전역하고 칼복학 하는 대신 친구들처럼 한두 학기 정도 놀면서
쉬고 싶다는 동생을 설득하는 논리로서 "새끼야, 정신 못 차리냐? 지금이야 그래도 아부지 회사에서
등록금이 얼마라도 지원 나오니까 니가 대학 다니지, 그러다가 아부지 회사 관두면? 지금도 맨날 툭
하면 정리해고다 명퇴다 그러는데 그러다 짤리면? 부지런히 복학해서 빨리 졸업해서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뭐? 놀려고 휴학? 군대에서 씨발 대가리까지 썩었냐? 학자금 대출? 그거 빚 아닌 줄 알어? 정신
차려 미친 새끼야" 하고 또 한번 동생의 드림 플랜에 스크래치를 냈으니 나는 참으로 악독한 형이
아닐 수 없다.
아, 물론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을 다름이지 내가 평생 성탄절 선물을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부지 회사의 사정이 있었는지(걸핏하면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움을 했고)
월급날이 불쑥불쑥 미뤄지곤 해서 언젠가의 초등학교 시절, 성탄절 이후에 같이 서점에 가서 아동
서적을 선물로 받아본 적은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탄신일이 연인과 아이들의 축제로 변질된 것은
많은 기업의 월급날이 25일이라는 자본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산타로 위장한 아버지의 선물, 혹은 선물포장을 해서 아침에 깨어
나보니 머리 맡에 놓여있는 선물에 대한 추억이 없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딱히 서운하지는 않다.
오히려 "니가 울어서 산타가 안 왔나보네" 식으로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쿨하게 성탄절 따위
개무시하고 그저 아침에 늘어지게 늦잠 자고 일어나 팔팔 끓인 미역국으로 나름의 성탄절 축하를
대신한 부모님이야말로 쿨한 분들 아닌가. 물론 성탄 선물 따위에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는 그
미칠듯한 쿨함은 그저 TV 속 성탄 특선 영화 등으로 얼마든지 카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방송
사 관계자들이 공휴일 특집 영화 편성을 할 때 신경을 써야하는 이유이다. 세상에는 공휴일 특집
영화가 성탄절 선물 대신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아! 아니다. 내 기억에 단 한번, 유일하게 '산타의 선물'을 받아본 적이 그러고보니 딱 한번 있었다.
그것은 7살 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그 유치원은 태권도 체육관식 유치원이었는데, 뭐
수업 커리큘럼의 반은 태권도고 반은 학습인 그런 유치원이다. 아니 이름이 일단 '체육관' 이니 유
치원보다는 체육관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여튼 그 체육관의 성탄절, 원생들을 우르르 앉혀놓고,
빨간 산타복을 입은 관장님은 전혀 자신을 산타로 위장할 생각이 없었던지 그 언제나의 엄하고
굵는 목소리로 원생들 이름을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선물을 나눠주었다.
아마 내 생각에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산타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던 녀석들마저도 그
'관장님 산타'를 보면서 세상에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신 관장님이다.
하지만 여튼 그 유일한 기억마저도 씁쓸한 것이 뭐냐면 선물을 받고 그 자리에서 뜯어보니 그건
로봇이었다. 그리고 그 로봇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고보면 그 시절 장난감
들은 왜 그리도 고장이 잘 났는지. 불량이었는지, 힘차게 꺼낸 내 손이 지랄인지 여튼 그렇게, 처음
이자 마지막 산타의 선물은 단 1초도 제대로 갖고 놀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사실 아무리
다리가 부러졌어도 어쨌든 선물은 선물이고 나름 갖고 놀 법도 한데 바로 버린 것을 보면 그 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도 몇 배는 더 쿨한, 아니 참 지랄맞은 새끼였는지도 모른다.
여튼, 그렇게 일찌감치 산타의 존재 가능성을 지운 나에게, 성탄절이 지나고 아이들이 가끔 뭘 선물로
받았네 성탄절에 뭘 했네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저 따분하고 의미없는 개헛소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오지 않는 산타에 대한 기억은 먼 훗날 내가 산타가 되어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뿌리고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가짐으로서 산타는 '싼다'로 거듭나게 된다.
해도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산타에 대한 통설은 뭐 하나 우리 집에서 통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우선 우리 집에는 굴뚝이 없는 만큼, 굴뚝을 통해서 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집에 들어오려면
그냥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작은 방 창문, 혹은 안방 창문을 통해 들어와야 되는데…
자기 전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는 우리 엄마를 감안할 때 우선 현관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 했다.
또 작은 방 창문의 경우 당시 우리 집에서 잠깐 더부살이를 했던 막내 이모의 그 예민한 성격상 들어왔다간
이모가 분명 깨어나 비명을 지를테니 그보다 확실한 경보장치가 없었다. 안방 창문이 그나마 들어온다면
유력한 루트겠지만, 상가 건물 4층으로, 잔뜩 이런저런 오만잡다한 짐들이 쌓인 2, 3층의 복도식 창문을
감안컨데 기어올라오는 것도 불가능이요, 저번에 불량학생 형들로 추정되는(하지만 그거 4층의 경욱이 형
이랑 그 여자친구, 그리고 또 다른 형 친구들임을 아는 것은 나와 경욱이 형만의 비밀) 이들이 옥상에서 술
먹고 술병이랑 토사물로 범벅시켜놓고 안 치우고 떠나버린 이래로 반장 아줌마가 옥상 출입문을 잠궈버렸
으니 위에서 내려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산타가 정말로 하늘을 나는 눈썰매를 타고 날아다니다가 창문을 열고 들어와 엄마, 아빠, 나, 동생을
깨우지 않고 선물만 몰래 놓고 간다면 일말의 가능성은 있겠지만 아무리 어릴 때라도 그건 믿지 않았다.
정말 최대한으로 봐준 '산타 할아버지'의 실존 가능성은 '돈 많은 노인들의 연말 어린이 선물 봉사활동
연합회' 정도였으니까.
또 산타는 선물을 머리 맡에 걸어놓은 양말에 넣어주고 간다고 했는데, 아 도대체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아버지 양말이라고 해봐야 30cm도 안 되는데, 작디 작은 내 양말 속에는 기껏해야 무슨 선물을 넣어줄
수 있었을까? 괜히 '이 양말이 어디까지 늘어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양말이나 잡아땡기다가 늘어난
다며 엄마한테 등싸다구나 한대 맞은게 전부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산타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무리 잘 울지 않는 나라도 1년에 최소한 몇 번은
울기 마련이었는데, 이것은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 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아닌가. 도대체 1년에 단 한번도 울지 않는 아이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산타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었다.
그리고 내가 우는 것을 산타는 어찌 알까? 하늘에서 내려다보나? 그 정도로 어떤 초월적인 존재라면
더욱 내가 받을 가능성은 없다. 울음은 물론이요 가끔 시원이랑 싸울 때 먹는 악독한 마음을 감안하면
도저히 나는 선량한 선물지급대상아동이 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일종의 밀고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라서 남 앞에서 울었을 때만 안 되나? 하지만 이건 또 그
나름대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서 자기 혼자 있을 때 100번 울었지만 남 앞에선 단 한번도
울지 않은 아이와, 딱 한번 남 앞에서 눈물 흘린 아이가 있다고 했을 때 전자의 아이가 선물을 받는다면
후자는 도대체 얼마나 억울한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사실 그 무엇보다 내가 산타를 믿지 않은, 아니, 산타를 믿는 아이들을 시니컬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나는 단 한번도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주 어렸을 적에야 내가 어려서 그러려니 하는 마음에, 그리고 가끔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어머니의
회고를 더듬어보건데 참으로 힘들었던 집안 형편상 그런 것을 챙길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5살, 6살
즈음, 적당히 산타에 대한 은연스러운 기대를 할 무렵에는 우리 집에 산타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산타의 존재 여부에 대한 불신을 확신했고, 동생이 또 성장해 산타를 기대할 나이에 나는 녀
석에게 "산타는 오지 않아, 그런 건 없어" 하고 그 동심을 짓밟는 선언을 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0년 후, 군대를 전역하고 칼복학 하는 대신 친구들처럼 한두 학기 정도 놀면서
쉬고 싶다는 동생을 설득하는 논리로서 "새끼야, 정신 못 차리냐? 지금이야 그래도 아부지 회사에서
등록금이 얼마라도 지원 나오니까 니가 대학 다니지, 그러다가 아부지 회사 관두면? 지금도 맨날 툭
하면 정리해고다 명퇴다 그러는데 그러다 짤리면? 부지런히 복학해서 빨리 졸업해서 일할 생각은 안
하고 뭐? 놀려고 휴학? 군대에서 씨발 대가리까지 썩었냐? 학자금 대출? 그거 빚 아닌 줄 알어? 정신
차려 미친 새끼야" 하고 또 한번 동생의 드림 플랜에 스크래치를 냈으니 나는 참으로 악독한 형이
아닐 수 없다.
아, 물론 '산타'로부터 선물을 받아보지 못했을 다름이지 내가 평생 성탄절 선물을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아부지 회사의 사정이 있었는지(걸핏하면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싸움을 했고)
월급날이 불쑥불쑥 미뤄지곤 해서 언젠가의 초등학교 시절, 성탄절 이후에 같이 서점에 가서 아동
서적을 선물로 받아본 적은 있다. 생각해보면 예수탄신일이 연인과 아이들의 축제로 변질된 것은
많은 기업의 월급날이 25일이라는 자본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산타로 위장한 아버지의 선물, 혹은 선물포장을 해서 아침에 깨어
나보니 머리 맡에 놓여있는 선물에 대한 추억이 없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딱히 서운하지는 않다.
오히려 "니가 울어서 산타가 안 왔나보네" 식으로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쿨하게 성탄절 따위
개무시하고 그저 아침에 늘어지게 늦잠 자고 일어나 팔팔 끓인 미역국으로 나름의 성탄절 축하를
대신한 부모님이야말로 쿨한 분들 아닌가. 물론 성탄 선물 따위에 대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는 그
미칠듯한 쿨함은 그저 TV 속 성탄 특선 영화 등으로 얼마든지 카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방송
사 관계자들이 공휴일 특집 영화 편성을 할 때 신경을 써야하는 이유이다. 세상에는 공휴일 특집
영화가 성탄절 선물 대신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아! 아니다. 내 기억에 단 한번, 유일하게 '산타의 선물'을 받아본 적이 그러고보니 딱 한번 있었다.
그것은 7살 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그 유치원은 태권도 체육관식 유치원이었는데, 뭐
수업 커리큘럼의 반은 태권도고 반은 학습인 그런 유치원이다. 아니 이름이 일단 '체육관' 이니 유
치원보다는 체육관에 가깝다고 해야겠지. 여튼 그 체육관의 성탄절, 원생들을 우르르 앉혀놓고,
빨간 산타복을 입은 관장님은 전혀 자신을 산타로 위장할 생각이 없었던지 그 언제나의 엄하고
굵는 목소리로 원생들 이름을 하나하나씩 부르면서 선물을 나눠주었다.
아마 내 생각에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산타의 존재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던 녀석들마저도 그
'관장님 산타'를 보면서 세상에 산타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지는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신 관장님이다.
하지만 여튼 그 유일한 기억마저도 씁쓸한 것이 뭐냐면 선물을 받고 그 자리에서 뜯어보니 그건
로봇이었다. 그리고 그 로봇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 다리가 부러졌다. 그러고보면 그 시절 장난감
들은 왜 그리도 고장이 잘 났는지. 불량이었는지, 힘차게 꺼낸 내 손이 지랄인지 여튼 그렇게, 처음
이자 마지막 산타의 선물은 단 1초도 제대로 갖고 놀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사실 아무리
다리가 부러졌어도 어쨌든 선물은 선물이고 나름 갖고 놀 법도 한데 바로 버린 것을 보면 그 때의
나는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도 몇 배는 더 쿨한, 아니 참 지랄맞은 새끼였는지도 모른다.
여튼, 그렇게 일찌감치 산타의 존재 가능성을 지운 나에게, 성탄절이 지나고 아이들이 가끔 뭘 선물로
받았네 성탄절에 뭘 했네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그저 따분하고 의미없는 개헛소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오지 않는 산타에 대한 기억은 먼 훗날 내가 산타가 되어 여자친구에게 선물을 뿌리고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가짐으로서 산타는 '싼다'로 거듭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