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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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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 머리 뭐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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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발견된 그 긴 머리카락을 놓고 그녀와 나는 한 시간째 싸우고 있다. "몰라? 어디서 묻어왔나부지"
하고 얼른 둘러댔지만 배게에서 발견된 두 번째 머리카락에 그녀는 폭발해버렸다.

물론 그 머리카락의 주인을 나는 안다. 엊그제 내 방에서 자고간 유경이다. 근 1년 만에 본 전 여친 유경과
나는 미친듯이 달렸고, 그렇게 잠까지 자버렸다. 유경은 다음 날 아침 "내가 미쳤지. 우리 다신 보지말자"
라며 황망하게 떠났지만 그녀는 흔적을 남기고 가버렸다.

'내가 병신이지'

다른 데는 다 깨끗히 증거인멸 해놓고 정작 침대의 머리카락을 놓치다니. 아니, 사실 치우긴 치웠다. 그럼
에도 어디 이불 틈 사이에 끼어있었던지 그 머리카락을 놓쳤을 뿐이지. 그나저나 피곤하다.


"아 몇 번을 말해. 나도 모른다니까. 어디 회사에서 가방이나 옷에 묻어왔나보지"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냐고!"
"아 진짜 나도 황당하고 답답해죽겠다. 억울해 죽겠어! 야, 이 집에 오긴 누가 와"
"그럼 그 머리카락은 뭔데. 귀신이 왔다갔냐? 어? 아 이제 너, 하아, 내가 진짜…"
"야, 윤혜미, 아 진짜 나 미칠 것 같다. 정말 미칠 것 같다고. 세상에 어디 미친 년이 나한테 머리카락을 흘
렸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진짜 내 눈 앞에 나타나면 그 대가리 그냥 확 다 부숴버리고 싶네 아!"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오히려 내가 더 크게 성질을 내자 그녀는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 했다. 하지만 난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주 그냥, 어? 후우, 아,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진짜, 어? 너한테… 그깟 머리카락 두 올 어디서
묻어왔다고 이렇게까지 의심받는 상황 자체가, 내가 그만큼 너한테 신뢰를 못 준게 참, 하아, 너무 진짜
허망하고 황당하다. 다 잘못이다, 아 진짜, 그래… 관둬. 관두자.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고작 그런 새끼로
밖에 안 보였다는게…하아…진짜…"

연기에 몰입한 나는 어느새 그만 눈가에 눈물이 다 고였고, 그 왠지 모를 복받침에 목소리는 떨렸고, 내
손까지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격정적인 연기였는지 난 속으로 '와 나 씨발 정말 대단한 새끼구나'하고
감탄할 지경이었다.

내 눈가의 눈물을 보자, 아직까지도 그 의심의 시선이 완벽하게 지워진 것은 아니겠지만 혜미는 분명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말이야? 정말로 이 방에 아무도 안 왔어?"

거의 다 되었다 싶었지만 여기서 끝낼 순 없다. 나는 콧물을 삼키고는, 그녀를 등진 채 눈물을 닦았다.

"내가…하아아…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지… 하아. 내가 정말 너한테는 그런 놈 밖에는 안 됐냐? 나는…
솔직히 너가 더 잘 알지 않냐? 내가 너한테 어떻게…어떻게 했는…데…. 그런데도 너한테는 내가 그런
놈으로 밖에 안 보였냐? 하아아아… 크흠"

여전히 혜미를 등진 채 겨우겨우 감정을 추스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잠시 말이 없던 그녀는 등 뒤에서
날 끌어안았다.

"미안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난 속으로 웃었다. 겨우 넘겼다…

"혜미야, 나는 진짜… 너 밖에 없어…"

등을 돌려 그녀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그렇게 말없이 내 품에 안겼다. 한참 억울한 남자로 몰입했던 난
다시 감정을 추스렸고,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서서 서로에 대한 오해를 해소한
우리. 혜미는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입으로 해줄까?"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키스하고 싶어"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 남은 양심이, 그녀와의 키스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내 눈을
감겼지만, 그럼에도 내 안의 어떤 악마적 유혹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아주 위기 잘 넘겼어. 수고했네 오늘'

당분간은…아니…그래… 그냥…음, 이제 앞으로… 뻘짓하지 말자… 나는 다짐했다. 새삼 오늘의 내
연기력에 감탄을 보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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