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소낙비

$
0
0
그제와 오늘이 다른 것은 당최 조금 쓴 맛의 사케 맛 뿐이다, 라고 혼자 읇조리는 영숙씨는 자기가 내뱉은
 밸 의미도 없는 말이건만 그 말이 무엇이 그다지도 마음에 들었는지 또 한 번 중얼거렸다.

"그제와 오늘이 다른 것은 당최 조금 맛이 쓴…"

몇 번을 더 중얼거리던 그녀는 왠지 대낮부터 나른한 졸음이 몰려옴에 의자에 앉은 채로 구부정하니 꼬박
꼬박 무거운 눈망울만 어거지로 쌍심지를 켜가매 버티고 있었다.

"어어, 영숙씨, 여 국밥 한 그릇 말아줘"

처마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소리에 고만 잠이 들락말락 하던 영숙의 정신을 번뜩 깨운건 제무시 도라꾸를
모는 황씨였다.

"아니 구루마를 몰고 다니는 냥반이 비는 왜 다 젖었대?"

핀찬이 아니라 걱정이 되어 한 말이건만 황씨는 가게 안에 빗방울을 흘려 영숙이 그런 말을 하는가 싶어
그랬는지 대답 대신 그 얼마나 빨지 않았는지 번들거리다 못해 빛이 바래버린 대추색 웃도리로 적당히
머리부터 얼굴까지를 슥 훑어내린다. 그 모냥이 참으로 먹거리를 파는 입장에서 드럽기도 하매, 영숙씨는
얼른 빨아다놓은 행주라도 급히 손에 쥐고 나와 황씨 앞에 놓아드렸다.

"도라꾸 안 몰고 왔쑤? 왜 물 빠진 쌩쥐 꼴이우"

그러고보니 도라꾸를 몰고 왔다면야 그 덜덜거리는 소리가 기백메다 밖에서도 들려왔을친데 그런 소리를
못 들었으니 오늘 황씨는 그것을 안 끌고 왔음이 명백하다. 허나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답이 없다는 것은
보통 사내들이 배가 무척이나 고프던지 기분이 심하게도 나쁜 상황이던지 둘 중 하나가 분명하다 생각하여
더이상은 캐묻지 않고 영숙씨는 특별히도 특짜 뚝배기에 곰국을 한 그릇 푸짐하니 말아다가 파도 송송하니
썰어넣어 내갔다.

"어여 드슈, 비도 맞고 추워뵈네"

하지만 황씨는 또 선뜻 수저를 뜨지 못하고 멍하니 그릇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 사람이 깝깝시려운 것이
오늘 뭐가 일이 있기는 있나보다 싶어 걱정이 되다가도 또 조금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내 며칠 전에 구루마를 팔았수다"

한참을 모락모락 곰국 식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말없이 그릇만 바라보던 황씨는 그렇게 말을 했다.
구루마를 팔아?

"왜?"

그 물음에 황씨는 한참을 대답을 주저하다가 막막했는지 머리를 흔들다가 "아니우" 하고 말을 고만한다.
하지만 밥술을 뜨기 시작하면 또 묻기가 애매해지는 바 영숙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얼른 또 그것을
캐었다.

"왜에?"

황씨는 목이 메이는지 콧물을 킁, 하고 들이마셨지만 곧이어 크륵, 하고 가래를 드럽게도 목구멍에 끌어
모으더니 바닥에 뱉으려 하였다.

"어휴, 아니되오"

영숙씨의 제지에 멈칫한 황씨는 입 가득 고인 가래를 바닥에 뱉으려다 겨우 발 옆의 양철통을 발견하고는
담배꽁초를 확인한 뒤 그제사 거기에 뱉었다. 지미 참 드럽기도 드럽다, 하고 속으로 영숙씨가 혀를 꼴꼴
찼건만 황씨는 가래를 뱉더니만 말문이 트였는지 술술술술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었다.

"구루마를 판 건 돈이 급해서 그랬수"

아 그거야 묻지 않아도 당연한 일일테고 도대체 왜 돈이 필요하냐, 하고 물으려던 찰나에 황씨가 말했다.

"투전 놀음빚을 갚았수"

하이고야, 세상 천지에 최고로 등신천치가 투전판에 인생 말아먹는 등신이라고 하던 차에 지 먹고 살 쪽박
껀덕지까지 팔아먹는 모지리가 여기에도 하나 또 있구나, 하고 속으로 욕을 퍼붓던 차 황씨는 눈을 똑바로
뜨더니 말을 했다.

"속으로 내 욕하진 마슈. 내가 투전을 한 것은 아니니"

아니 본인이 투전을 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왜 빚을 대신 갚아준단 말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하려니
황씨는 "내가 아니라 마누라가 한 거유" 하고 그제사 한 그릇 조금 식은 곰국을 푸욱 떠먹는다.

"흐허"

뜨겁기도 뜨거웠는지 설설설 혀를 굴려가매 한 숟가락을 넘기는데 미련퉁이 같으니 입천장 다 디었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에 주전자에 보리차를 한잔 떠다주었다. 이 보리차도 사실은 5전씩은 받고 팔아야지
생각을 하고 끓이는 것이건만 단 한번을 돈 받고 팔아본 적이 없음에 영숙씨는 자기도 그리 이문이 밝은
장사치는 아니라고 자책을 종종한다. 

"아니 그래 마누라가 집안을 말아먹을 정도로 투전을 그리했어? 어이구매"

참 남의 처자니 무어라 대놓고 욕을 할 수는 없어도 내 아는 사람 같으면 등짝을 후리고 패대기를 치겠
겄만 남의 이야기니 그저 조용히 듣노라는데 다시 빗줄기가 거세지는지 바깥에 빗소리가 또 쏴하니 커진다.
오늘 장사는 암만 해도 공쳤구나 싶다. 

"암만 그래두 내 마누라 아니우. 팔려가게 생겼다는데 남편이 어찌 모른 척 하겠수"
"그려"

그려, 하고 달래는 보는데 입장을 바꿔놓고 내가 황씨 입장이면 어떨까 생각을 하니 참으로 다 천지가
캄캄하니 그랬다간 내 먼저 홧병에 죽지 싶어 영숙씨는 서둘러 다시 황씨 이야기라며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었다.

"근데…"

그 다음에 나올 말이 참 아무리 넘의 이야기라지만 해도해도 너무하는 이야기였다.

"구루마 판 돈을 갚고나니 이 마누라 년이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데 그것이 뭔 이야긴고 하니, 미안하다고
자기는 콱 죽어버려야겠다고 집을 나가야겠다고 징징대다 정말로 집을 나갔는데 수소문을 해 찾아보니
참 기가 맥히는 것이 그 내 구루마 판 돈을 물어준 넘한테 가서 오입질을 하고 있지 뭐유"

세상천지에 인두껍을 쓰고 그럴 수가 있나 싶다가, 아무렴 미친 여편네가 아니고서야 설마 그럴까 싶어
뭘 잘못 안 것은 아니냐, 혹은 그래, 아녀자 된 입장에서 하두 미안하여 배 위로 배 한번 지나가고 구루마
다시 얻어올 계책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냐 하고 물어보니 아 왠일인지 황씨가 눈물을 다 주루룩 흘리는
것이다.

"히이…"

갑자기 한과 설움이 복받쳐 올라 소리도 못 내고 크게 입을 벌리고, 입 안에 씹던 밥풀떼기가 다 보이
도록 입만 벌린채 부들부들 떨던 황씨가 쇠 우는 소리를 내며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귀여운 것은 또 무엇이단 말인가.

'넘은 인생을 조지게 생겼구만'

순간적인 죄책감을 가지며 고개를 숙이노라니 빼꼼하니 엄지 발가락 보이는 황씨의 터진 신발이 안쓰
럽다.

"황씨"

안쓰러운 측은지심에 아이 달래듯 황씨의 등과 가슴팍을 어루만지며 달래주노라니, 어어 생각보다 그
가슴이 실팍하다. 그 무거운 짐짝들을 만날 주구장착 차에 오르락 내리락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싶지만 
참으로 간만에 만지는 남정네 가슴팍이니 그 단단함에 고만 영숙씨는 가슴이 설레이고야 만다. 

우르릉- 쾅!

때마침 몰아친 우뢰 소리에 놀란 영숙은 고만 땟국물이 흐르는 황씨의 품 안으로 그저 철 모르는 어린 소녀
만큼이나 화들짝 놀라 그 품에 안기니, 밥 쳐먹다 마누라 생각에 눈물 짜던 황씨로서도 그저 불끈하는 생각
을 어찌 머릿 속으로만 하겠는가.  

아직도 황씨의 머리칼 끝에 맺힌 빗물 한 방울은 그렇게 영숙씨의 이마에 떨어지고, 그 물방울에 또 새삼
놀라 눈을 꼭 감은 그녀의 입술에 황씨의 수염 숭숭난 털보입이 덧씌워질 무렵, 빗줄기는 거세어지고 쏴아
하며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 이윽고 그 둘은 짐승과도 같은 원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니, 이것이 모두 그저 다
한 여름 소낙비 때문이라 둘러댐은 아마도 결코 꼭 변명만은 아니리라.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