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것이 왔다. 이미 지난 달부터 공공연히 사내 정리해고 이야기가 있었는데 어제 드디어 각 팀마다 회의실로
하나둘씩 들낙거리고 다들 표정이 안 좋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 팀.
"잠깐 회의실로"
드디어 팀장의 귀뜸에 회의실로 향했고, 암울한 침묵 속에 그야말로 '올 것이 왔다' 라는 분위기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일전에 차장이 말해주었듯 갑작스레 올해 2분기부터 어려워진 회사 사정이 이렇게 난데없는
불벼락을 몰고 왔다.
"박스씨는…아버지 일도 있고 해서 가급적 막아보려고 했는데, 회사 방침이라는게 봐주다 보면 끝이 없는거고
당장 식솔들이 딸린 가장들 제하고 나니까…"
후우. 결과론적으로 말해 다소 무리한 사업확장이었던 모양이다. 입사/이직 3년차 이하 뉴페이스 직원들 중
당장 결혼해서 가정이 딸린 직원 몇몇, 그리고 회사의 캐쉬카우 사업부 일부를 제외하면 작년, 재작년에 채용
한 직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해고, 그리고 계약직·파견직으로의 대체가 그 복안인 것 같다.
"조만간 임원진하고 사직하는 직원들 간에 개별미팅이 있을거야. 여튼, 그렇게 됐어"
뭐 딱히 뻗댈 여지가 없다.
그리고 오늘. 간밤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까지 눈 뜨고 있다가 간신히 두 어시간 자고 일어나 씼는데 꼭
모든게 꿈만 같다. 그냥 리얼한 악몽을 꾼 기분이다. 입사한지 1년 4개월여.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간다.
아침 일찍 출근을 하여 일하는데 회사 분위기가 가히 볼만하다. 그리고 오늘도 이어진 퇴사 통보에 사무실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린다. 몇몇 여직원은 눈물까지 보인다. 프린터기쪽으로 향하며 흘낏
보이는 몇몇 모니터로는 잡코리아, 사람인 창이 심심찮게 보인다.
점심은 별로 생각이 없어서 그냥 걸렀다. 그러고 있노라니 문득 오후에 팀장이 메신저로 말을 건다.
[ 상무님이나 부사장님하고 이야기 좀 했어? ]
[ 아니요, 아직 아무 말씀이 없으시네요 ]
[ 여튼, 회사 측에서는… 최대한 빨리 정리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음, 뭐 슬슬 준비를 하는게
좋을거야 ]
후우. 짜증이 나서 대답을 안 했다. 물론 사내에 소문이 돌았고, 얼마 전 차장이 귀뜸을 해주기도 했다
지만 당장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게 어제다. 그것도 권고 사직 형태가 될지 정리해고 형태가 될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에 먼저 이렇게 난리다. 조금 짜증이 났다.
잠시 후 나와 같은 메세지를 받은 같은 팀 직원들도 옆 자리에서 피식하고 허탈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난데없이 [ 차주 업무 일정표 수정본 배포합니다 ] 라면서 아웃룩으로 메일이 한 통 왔다. 열어보니
이번에 아웃 통보를 받은 직원들이 빠진 업무 일정표를 팀장이 보냈다.
"기가 막히네 진짜"
이번에 같이 해고되는 같은 팀 3명은 물론이요, 남게 되는 계약직 여직원 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당장 옆 팀의 여팀장은 어떡하니 어떡하니 하면서 퇴사하게 되는 여직원들과 함께 울 듯이 힘들어
해주는데-설령 그것이 가식이라 할 지라도- 우리 팀은 마치 당장 내일 짐싸서 나가라는 듯 이 지랄
이다.
하여간에 참…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나 역시 업무 도중 틈틈히 구직 사이트를 돌며 몇 군데 입사원서 써볼만한 회사를 골라보았다. 하지만
다 허탈하다. 연봉을 맞출 수는 있을까. 아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나 할까.
그러고 오후 내내 울적한 기분으로 일하는데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온다.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 마냥
기가 막힌 타이밍에 잡코리아에서 보고 전화를 했단다. 반가운 마음에 사무실을 나와 복도에서 밝은 목
소리로 전화를 받는데 지금 하는 업무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유사 업종의 외국계 회사란다. 일단
지금 마음 같아서야 뭐 다단계만 아니면 뭐들 못할까.
'잘만 하면, 퇴직금에 위로금에 실업급여까지 받고 첫 달에 바로 이직?'
일단 면접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다시 사무실 책상 앞에 앉자 답답하다. 잘 모르겠다. 요즘 아주 무슨 팔자에 마가 낀 것 같다.
이 인생의 장마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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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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