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낯 부끄러운 오후 1시 15분.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는 투둑투둑
빗소리가 들려온다.
"음"
머리 맡에 놓아둔 머리띠를 하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인지 유독 이번 달 들어 생리통이
심한데다 프로젝트 마감 관련해서 며칠을 야근했더니 정말 쓰러질 것 같아서 회사에 하루 휴가를 냈다. 늦잠을
푹 자서 그런지, 몸은 무거워도 머리는 맑았다.
배가 고팠다.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먹을거라고는 요거트 뿐이다. 문득 시선을 내려보니
지난 달에 엄마가 부쳐준, 아직 한번 열어본 적도 없는 김치통이 보였다.
'집에서 밥 안 먹는다니까'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양치를 하고, 다시 머리띠를 풀고 잠옷을 벗어제끼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나른했다.
커피 한 잔에 요거트 하나를 아침 대용으로 먹었다. 급한 허기는 꺼졌지만 금방 다시 배가 고플텐데. 어제 퇴근
하면서 토마토라도 좀 사다놓을걸. 티비를 켤까 하다가 관두었다. 침대에 누워 어제 보다가 만 잡지 VOGIE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기 전에 눈이 아파서 다시 잡지를 덮었다.
'후우'
뭔가 나른하고, 몸은 뻐근하고, 심심했다. 평일인만큼 누구한테 놀아달라고 조를 수도 없다. 조를 사람도
딱히 없지만. 그래도 장마라서 다행이었다. 혼자 집에서 뒹굴거려도 휴일이 아깝지 않고, 이 눅눅한 아늑함이
너무 좋으니까.
'맨날 장마면 좋겠다'
어제 너무 요가를 열심히 한 탓인지 옆구리가 결렸다. 나이 서른 하나, 이제는 정말이지 나잇살은 물론이요
운동 하나를 어디 편하게 못한다. 조금만 열심히 했다하면 바로 다음 날 어디 한 군데 티가 나니까. 몸을 일
으켜 잡지를 다시 잭장에 꽂는 찰나, 옛날 다이어리 틈에 삐죽 솟은 엽서 한 통이 보였다.
'…항상 곁에 있는 네가 좋아. 사랑해'
오래간만에 본 기원의 엽서였다. 그러니까…전전, 아니 전전전 남자친구. 그리고 가장 오래 사귀었던 남자.
대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만나서 거의 6년을 사귀었다. 가장 오래 사귀었고 또 가장 로맨틱했으며
가장 다정한 남자였다. 외모야 뭐 솔직히 키도 별로 안 크고 그저 그랬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사실 난
그리 남자 외모를 많이 안 보니까.
6년을 사귀었어도, 헤어지는 때까지 설레임이 있는 남자였다. 편안하고 익숙했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불쑥불쑥 보여주었던 그런 남자. 어쨌든 재미있는 남자였다. 이 남자라면 함께 평생을 살아도 나쁘지는 않
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만큼.
그가 취업을 하고, 새로 얻은 직장에서 그 직장동료 년이랑 눈이 맞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또 했네.
'멍청이'
나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고, 며칠 후 너무 울어 눈이 팅팅 부은 나머지 어디 얻어맞은 사람처럼 된 나에게
와서, 당시 내 원룸 앞에서 몇 시간이고 무릎을 끓고 기다렸던 그. 하지만 난 쉽게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를 사랑했기에 더 배신감이 컸다.
몇 시간이고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나는 용서 대신 우산을 내주었다. 그때도 아마 이 맘때 쯤
이었을 것으리라. 태풍이 온다는 말에 나는 문을 열고, 그에게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마" 라는 말과
함께 우산을 내주었다.
그리고 또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쩌면 용서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어와서 밥이나 먹으라고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내가 준 우산도 그대로 두고, 그는 그렇게 (아마도) 태풍 비를
뚫고 우산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후회도 했지만, 그냥 그와 나의 인연이 그것일 뿐 뿐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는 이후 몇 차례 더
연락을 해왔지만… 마지막 찬스를 버린건 기원이었으니까.
"됐어 관둬. 갑자기 뭔 생각이야 진짜 구질구질하게"
난 다시 엽서를 다이어리에 꽂아넣고 책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와 머리를 묻었다.
'우'
싫다. 모든게 다 싫다. 나는 그렇게 배게에 얼굴을 묻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우르르 쾅! 하는 번개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 아직도 이것 밖에 안 됐나. 장마비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방은 저녁만큼이나 어두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창틀에 비가 많이
들이쳤지만 닦을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힘들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도 먹어야 할텐데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나가자니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딜 나가나 싶고, 이런 날씨에는 뭘 시켜먹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싫다 정말. 이대로 누워 있을 수도 있지만
하루종일 굶을 자신은 없었다. 그냥 요 앞의 편의점에 가서 라면이라도 사오기로 했다.
반바지에 레인부츠 신고 머리는 그대로 하루종일 감지도 않은 떡진 머리에 머리띠만 하고 우산을 들고 나섰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미친 비바람이 불었다. 태풍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산은 쓰나마나인 듯 했다.
"에에이이"
편의점을 향해 달렸다. 걸어서 1분 거리였지만 막상 또 비바람을 뚫고 가려니 왜 이렇게 먼지. 허벅지에 닿는
빗방울이 레인부츠 속으로 흘러내릴 참에 겨우 편의점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니 알바생이 눅눅한
공기의 편의점에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먹을까. 다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으니 최대한 많이 사야하는데. 아니, 다이어트 중이잖아. 다이어트
중이라면서 라면을 먹으려고? 그럼? 두부 어때? 뭔가 더 맛있는걸 먹고 싶은데. 감자칩? 하나만 먹으면 안
될까. 부침개 해먹을까? 온갖 고민을 했지만 결국 구입한 것은 삼각김밥 2개에 컵라면 2개였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우산살 하나가 망가진 것을 발견했다. 산지 얼마 안 된 우산인데.
어쨌든 우산살 하나에 신경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비바람을 뚫고 다시 집에 도착했다.
라면 물을 올리고,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에 접속하자 승연이 말을 걸었다.
[ 아 피곤해죽겠다 ]
[ 난 오늘 노는데 ]
[ 정말? 왜? ]
[ 그냥 하루 휴가냈어 ]
[ 부럽다ㅜㅜ ]
[ 오늘 언제 끝나? ]
[ 6시에 끝나지 ]
[ 끝나고 커피라도 마실래? ]
[ 이 날씨에? ]
[ 너나 나나 바람에 날려갈만큼 가볍지도 않잖아ㅋㅋ ]
[ ㅋㅋㅋㅋㅋㅋ아 근데 나 오늘 몸이 별로야 집에 가서 걍 쉴라구 토욜에 보자 ]
[ ㅋㅋ 알았어 ]
메신저창을 끄고 인터넷 쇼핑을 잠깐 했지만, 별로 의욕도 없었다. 그냥 창을 끄고 끓인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그리고 삼각김밥에 곁들여 후룩후룩 먹었다. 김치는 꺼내지도 않았다.
'이게 뭔 청승이니'
그런 생각이 들자 식욕마저 사라졌다. 반 정도 먹고 남은 컵라면은 다 버렸다. 그래도 삼각김밥을 먹어
배는 이미 충분히 불렀다. 양치질을 하고, 다시 누웠다. 밥 먹고 바로 자다니! 그것도 라면을 먹고! 혼자
경악했지만, 비가, 너무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들면 좋겠다.
빗소리가 들려온다.
"음"
머리 맡에 놓아둔 머리띠를 하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무리한 다이어트 때문인지 유독 이번 달 들어 생리통이
심한데다 프로젝트 마감 관련해서 며칠을 야근했더니 정말 쓰러질 것 같아서 회사에 하루 휴가를 냈다. 늦잠을
푹 자서 그런지, 몸은 무거워도 머리는 맑았다.
배가 고팠다.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먹을거라고는 요거트 뿐이다. 문득 시선을 내려보니
지난 달에 엄마가 부쳐준, 아직 한번 열어본 적도 없는 김치통이 보였다.
'집에서 밥 안 먹는다니까'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양치를 하고, 다시 머리띠를 풀고 잠옷을 벗어제끼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나른했다.
커피 한 잔에 요거트 하나를 아침 대용으로 먹었다. 급한 허기는 꺼졌지만 금방 다시 배가 고플텐데. 어제 퇴근
하면서 토마토라도 좀 사다놓을걸. 티비를 켤까 하다가 관두었다. 침대에 누워 어제 보다가 만 잡지 VOGIE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기 전에 눈이 아파서 다시 잡지를 덮었다.
'후우'
뭔가 나른하고, 몸은 뻐근하고, 심심했다. 평일인만큼 누구한테 놀아달라고 조를 수도 없다. 조를 사람도
딱히 없지만. 그래도 장마라서 다행이었다. 혼자 집에서 뒹굴거려도 휴일이 아깝지 않고, 이 눅눅한 아늑함이
너무 좋으니까.
'맨날 장마면 좋겠다'
어제 너무 요가를 열심히 한 탓인지 옆구리가 결렸다. 나이 서른 하나, 이제는 정말이지 나잇살은 물론이요
운동 하나를 어디 편하게 못한다. 조금만 열심히 했다하면 바로 다음 날 어디 한 군데 티가 나니까. 몸을 일
으켜 잡지를 다시 잭장에 꽂는 찰나, 옛날 다이어리 틈에 삐죽 솟은 엽서 한 통이 보였다.
'…항상 곁에 있는 네가 좋아. 사랑해'
오래간만에 본 기원의 엽서였다. 그러니까…전전, 아니 전전전 남자친구. 그리고 가장 오래 사귀었던 남자.
대학교 1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만나서 거의 6년을 사귀었다. 가장 오래 사귀었고 또 가장 로맨틱했으며
가장 다정한 남자였다. 외모야 뭐 솔직히 키도 별로 안 크고 그저 그랬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사실 난
그리 남자 외모를 많이 안 보니까.
6년을 사귀었어도, 헤어지는 때까지 설레임이 있는 남자였다. 편안하고 익숙했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들을
불쑥불쑥 보여주었던 그런 남자. 어쨌든 재미있는 남자였다. 이 남자라면 함께 평생을 살아도 나쁘지는 않
겠다, 라는 생각을 했을만큼.
그가 취업을 하고, 새로 얻은 직장에서 그 직장동료 년이랑 눈이 맞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결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또 했네.
'멍청이'
나에게서 이별 통보를 받고, 며칠 후 너무 울어 눈이 팅팅 부은 나머지 어디 얻어맞은 사람처럼 된 나에게
와서, 당시 내 원룸 앞에서 몇 시간이고 무릎을 끓고 기다렸던 그. 하지만 난 쉽게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를 사랑했기에 더 배신감이 컸다.
몇 시간이고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나는 용서 대신 우산을 내주었다. 그때도 아마 이 맘때 쯤
이었을 것으리라. 태풍이 온다는 말에 나는 문을 열고, 그에게 "돌아가. 그리고 다시는 오지마" 라는 말과
함께 우산을 내주었다.
그리고 또 몇 시간이 지났을까. 어쩌면 용서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어와서 밥이나 먹으라고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내가 준 우산도 그대로 두고, 그는 그렇게 (아마도) 태풍 비를
뚫고 우산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후회도 했지만, 그냥 그와 나의 인연이 그것일 뿐 뿐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는 이후 몇 차례 더
연락을 해왔지만… 마지막 찬스를 버린건 기원이었으니까.
"됐어 관둬. 갑자기 뭔 생각이야 진짜 구질구질하게"
난 다시 엽서를 다이어리에 꽂아넣고 책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침대로 돌아와 머리를 묻었다.
'우'
싫다. 모든게 다 싫다. 나는 그렇게 배게에 얼굴을 묻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우르르 쾅! 하는 번개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반. 아직도 이것 밖에 안 됐나. 장마비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방은 저녁만큼이나 어두웠다. 나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창틀에 비가 많이
들이쳤지만 닦을 정도의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힘들어'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뭐라도 먹어야 할텐데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나가자니 비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딜 나가나 싶고, 이런 날씨에는 뭘 시켜먹을 수도 없을 것 같다. 싫다 정말. 이대로 누워 있을 수도 있지만
하루종일 굶을 자신은 없었다. 그냥 요 앞의 편의점에 가서 라면이라도 사오기로 했다.
반바지에 레인부츠 신고 머리는 그대로 하루종일 감지도 않은 떡진 머리에 머리띠만 하고 우산을 들고 나섰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미친 비바람이 불었다. 태풍같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우산은 쓰나마나인 듯 했다.
"에에이이"
편의점을 향해 달렸다. 걸어서 1분 거리였지만 막상 또 비바람을 뚫고 가려니 왜 이렇게 먼지. 허벅지에 닿는
빗방울이 레인부츠 속으로 흘러내릴 참에 겨우 편의점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니 알바생이 눅눅한
공기의 편의점에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먹을까. 다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으니 최대한 많이 사야하는데. 아니, 다이어트 중이잖아. 다이어트
중이라면서 라면을 먹으려고? 그럼? 두부 어때? 뭔가 더 맛있는걸 먹고 싶은데. 감자칩? 하나만 먹으면 안
될까. 부침개 해먹을까? 온갖 고민을 했지만 결국 구입한 것은 삼각김밥 2개에 컵라면 2개였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우산살 하나가 망가진 것을 발견했다. 산지 얼마 안 된 우산인데.
어쨌든 우산살 하나에 신경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비바람을 뚫고 다시 집에 도착했다.
라면 물을 올리고,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에 접속하자 승연이 말을 걸었다.
[ 아 피곤해죽겠다 ]
[ 난 오늘 노는데 ]
[ 정말? 왜? ]
[ 그냥 하루 휴가냈어 ]
[ 부럽다ㅜㅜ ]
[ 오늘 언제 끝나? ]
[ 6시에 끝나지 ]
[ 끝나고 커피라도 마실래? ]
[ 이 날씨에? ]
[ 너나 나나 바람에 날려갈만큼 가볍지도 않잖아ㅋㅋ ]
[ ㅋㅋㅋㅋㅋㅋ아 근데 나 오늘 몸이 별로야 집에 가서 걍 쉴라구 토욜에 보자 ]
[ ㅋㅋ 알았어 ]
메신저창을 끄고 인터넷 쇼핑을 잠깐 했지만, 별로 의욕도 없었다. 그냥 창을 끄고 끓인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그리고 삼각김밥에 곁들여 후룩후룩 먹었다. 김치는 꺼내지도 않았다.
'이게 뭔 청승이니'
그런 생각이 들자 식욕마저 사라졌다. 반 정도 먹고 남은 컵라면은 다 버렸다. 그래도 삼각김밥을 먹어
배는 이미 충분히 불렀다. 양치질을 하고, 다시 누웠다. 밥 먹고 바로 자다니! 그것도 라면을 먹고! 혼자
경악했지만, 비가, 너무 그녀를 피곤하게 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