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노처녀

$
0
0
"나 먼저 퇴근할께. 다들 마무리 짓고 수고해"
"네에, 과장님 잘 들어가세요"

찬희는 PC를 끄고 가방을 어깨에 매곤 사무실을 나섰다. 피곤하다. 몸이 찌뿌둥하다. 내일은 토요일이건만
내일도 출근이다. 그 생각을 하니 피로가 2배로 온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얼굴이 참
오늘따라 2배로 늙어보인다.

'정말…아…'

눈가에 주름이… 아니 눈가 주름은 그렇다치고, 점점 팔자주름이 짙어지고 있다. 요놈의 돌출입이 원수다.
승연 과장처럼 이제라도 치아교정 좀 해볼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늦은건 맞는데, 지각했다고 출근 안 하는거 아니잖아? 해야겠다 싶음 늦게라도
해야지'

그녀의 말이 왜 이렇게 귀에 들어올까. 에휴, 그래봤자 것두 다 돈이 있어야 하지.



"수고하세요"

경비실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며 애마인 07년식 모닝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재작년, 중고로 뽑은 차다.
나이 먹으니 전철-버스에 시달리는게 너무 힘들고 그래서 자꾸 택시만 타고 다니다보니 한달에 택비시만
기십만원. 아예 그럴 바에야 그냥 차 한대 뽑아야겠다 싶어서 그리했다. 주변에 차 산 또래 여직원들도 다
그 소리다.

'하지만'

승리자는 뭐니뭐니해도 아직 러브러브라서 남친이 퇴근할 때 모시러오는 우리 막내 윤지겠지. 이 일의
특성상 끝나는 시간이 불규칙하니 맨날 그럴 수야 없지만 늦은 시간이면 꼬박꼬박 데리러 오는 그 남친이
정말 부럽고, 또 불쌍하다.

'에휴 대한민국 남자들 참 장가가기 힘들다'

근데 내가 지금 남 걱정할 땐가? 나야말로 노처녀인데. 나이 서른 다섯의 노처녀…정말 후지다. 대한
민국 사람 모두가 후지다. '결혼적령기'라는 말로 결혼에 리미트를 정해놓다니.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
만나서 언제 결혼할 줄 알고 그것을 수치적으로 정해놓았단 말인가?
 
그래서 후지다. 여자 나이 서른 다섯에 싱글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몇 가지의 가설을 머릿 속에 떠올린다.

돌싱, 독신주의자, 워커홀릭, 못생긴 여자, 빚 있는 여자, 비만, 아니면 어떤 심각한 하자가 있는 여자…
뭐 나 역시도 나이 마흔 넘은 남자가 싱글이라고 하면 비슷한 이런저런 가설을 떠올리기 마련이니
딱히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억울하다.

나는 그 모두에도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못생겼다는 부분은 이제는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남자를 많이 만나고 다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20대 이후
싱글이었던 기간보다는 커플이었던 기간이 많았다. 압도적으로.

그저… '결혼적령기'에 오래 만났던 사람과 헤어졌을 뿐. 그 뿐이다.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운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세형의 기억이 떠오르자 우울해진 나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더워.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화장부터 지우고,
그리고 발가벗은 채로 변기에 앉아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신 물을 맞으며 멍하니 앉아있는 것…

이게 언제부턴가 나의 스트레스를 푸는 '괴벽'이다. 언젠가의 노처녀가 등장하는 칙릿 소설에서 본
내용 중에 그런게 있었다. 여자가 서른을 넘기면 이상한 버릇을 하나씩 늘려간다고. 전혀 공감하지
못했지만 요즘에는 조금씩 공감해나가는 중이다.

'하지만 괴물은 아니야'

스스로를 그렇게 변명해보고, 피식 웃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샤워기 물줄기의 온도를 조금 낮추었다.
우리 집 샤워기는 너무 빨리 뜨거워지고, 너무 빨리 차가워진다. 마치 과거의 나처럼.



"넌, 정말 너 밖에 몰라"

세형에게 그 말을 들으며 찔끔했다. 하지만 난 애써 부정했다.

"그러는 오빠는? 오빠가 뭐 안 그런 줄 알아?"

하지만 세형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거 봐. 너는, 누군가 네 잘못을 지적하면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대신, 꼭 그저 발끈해서 말꼬리나
잡지. 이제 정말 나도 지친다. 그래, 내 잘못이다 다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관두자"

생각치도 못한 말을 들었다. 그동안 싸우면서 관두자 라는 말은 나만 하는 말이었다. 나만 할 수 있던 말.
헤어지자는 말이 처음으로 오빠에게서 흘러나왔다. 두렵고 당혹스러웠지만 나는 마음과는 정 반대로

"그래, 그러지 뭐. 됐어, 그래 관둬"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게 내 방식이었다. 내 삶에 수비는 없었다. 항상 공격, 수비가 필요한
상황이면 나는 더욱 더 공격을 했다. 내가 상처를 덜 입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대에게 나보다 더 큰 상처
를 남기는게, 나는 그래야 속이 풀렸다. 아니, 그렇게까지 드센 여자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세형에게는
자꾸 그런 여자가 되었다.

세형은 그 날 나를 붙잡지 않았다. 그래서 덜컥 겁이 났지만, 더욱 성큼성큼 까페를 걸어나왔다. 그리고
이번 일은 최소한 일주일, 아니 이주일은 전화를 받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정확히 9일째 저녁, 나는 전화를 걸었다. 좋아, 한번쯤 져준다, 라고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열한번째의 통화대기음이 울리는 순간, 전화기 너머로 세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나야"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세형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렵게 내가 한 마디를 꺼내려
하는 그 순간 그는 말했다.

"미안한데, 나도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당분간 연락하지 말자"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털썩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지막 만남이 있던 날, 그의 차에서 장장 다섯 시간이 넘는 대화를 나눈 끝에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남남'이 되어버렸다. 연애가 5년 차에 접어들면서, 그때까지도 진지한 결혼에 대한 준비가 없던
우리의 만남에 나는 사실 이미 결혼보다 이별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갑작스럽게 이별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두달간 나는 정말 나를 잊고 살았다. 요가를 몇 달을 다녀도 빠질 기미도 안 보이던 살이 딱 두달 사이에
6kg가 빠졌다. 그리고 과장 승진과 함께 엄마의 등에 떠밀려 본 세 번의 선에서 그제서야 나라는 여자가
맞선 시장에서 갖는 여자로서의 가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안게 되었다.

지난 5년간, 나는 '이쁘고 경우 바른 참한 처자'에서 어느새 '노처녀'로, 5년 세월의 풍파가 스쳐지나간
얼굴보다도 훨씬 더 감가상각되어 있었다. 뒤돌아보니, 나는 어느새 '칙릿소설의 주인공'들의 적령기에서
조차 지나있었다. 심지어 주말드라마에서조차 '연하의 완벽남'은 '돌아온 싱글'들의 몫이지, 노처녀들의
몫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30대 중반의 싱글여성이 갖는 위치는, '노처녀'라는 세 글자가 갖는 절망적으로 부정적인 
뉘앙스만큼이나 좁고 낮았다.



"어어 그래. 어~축하해"

재작년, 내 주변의 싱글 중 마지막으로 시집을 간 경희가 임신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정말 무슨
날인가. 나 우울증 걸려 죽으라는 소린가?

점점 겁이 난다. 짜증이나 질투가 아니라 겁이 말이다. 사실 언제부턴가 아예 결혼의 가능성이, 누군가
지우개로 살살 지우듯이 옅어지는 느낌이었다. 뭐, 안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결혼할 복이 없어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결혼의 기회라는 것이, 나에게는 아예 꼭 온 적도 없이 사라진 느낌이라 그게 견딜 수 없이 싫었다.

세형과 스물 아홉부터 서른네살까지 꼬박 5년을 사귀었다. 말 그대로 '결혼적령기'다. 아니 여자로서는
이미 그것도 조금은 늦은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런데 허무하게 헤어졌다. 그래서 그가 밉고, 그 역시
내가 밉다고 했다. 그는 올해로 서른 여섯, 남자가 여자보다는 나이에서 다소 프리하다고 해도, 그래도
서른 여섯이라는 나이는 분명 남자로서도 부담스러운 나이가 분명하니까.

헤어지기로 확정짓던 날 차 안에서 그는 울면서 말했다. 너는 언젠가 내가 니 인생을 망쳤다고 나를 원망
할지도 모르겠지만 너 역시 그건 마찬가지라고. 나는 너에게 남자의 순정을 바쳤고, 지난 5년간 모든 것을
바쳤다고. 

그 말을 그 누구보다도 공감할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한 모진 미움이 사그라들었지만 그가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을, 아니 우리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소모시켰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을 말이다.



"으음"

새벽 늦게까지 잠이 오지앉아 뒤척이다 허리가 아파 일어났다. 도저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침대 옆
스탠드에 불을 켜고 몸을 일으켰다. 우울했다.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외로웠다. 허리도 아프고 팔다리가
모두 쑤셨다. 몸살인가 싶어 머리를 만져보았지만 열은 없는 것 같았다.

"후우"

시간을 확인하고 싶어 머리 맡의 휴대폰을 보았다. 새벽 3시 반… 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자 알림이 있었다.

[ 자? ]

그리고 그 번호는…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번호, 세형의 번호였다.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문자가
온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 전. 남자들은 도대체 왜 이럴까. 왜 꼭 멀쩡한 시간 다 놔두고 새벽에 이런
문자를 보낼까.

하다못해 저녁 시간대에라도 연락을 하면, 속 시원하게 무슨 일이냐고 전화라도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새벽 시간대에 이러면 뭐 어쩌란 말인지. 새벽에 잠 깨우면 기분좋은 마음으로 전화할 수 있겠어?

괜히… 괜히 고민만 되잖아.


20분을 더 멍하니 답답한 마음으로 콧바람만 내쉬면서 앉아있다가 독하게 마음먹은 난 답장을 보냈다.
확 독설을 쏘아버리고 싶었지만 지난 이별로 얻은 유일한 교훈인 '나의 과도한 공격성'을 겨우 달래고는

[ 왜 ]

라는 한 마디만 보냈다. 이윽고 영원과도 같던 5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답장이 또 왔다.

[ 내일 일찍 끝나면 같이 저녁 안 먹을래 ]

…이 참으로 나이값 못하는 센스없는 남자의 문자에 난 그만 픽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눈가에 흐르는
눈물… 무슨 의미의 눈물인지 나 스스로도 모를 이 눈물에 당혹감을 느끼면서 얼른 닦아내고 나는 다시
답장을 했다.

[ 내일은 바빠. 일요일에는 시간이 있지만 ]

그러자 금방 또 답장이 왔다.

[ 그래 그럼 일요일에 보자 ]

무어라 대답을 해야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또 그의 문자가 왔다.

[ 보고 싶었어. 그동안 미안했어 ] 

그리고 그 문자를 보는 순간 난 다시 쏟아지는 눈물에, 아니 아예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이 눈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미움의 눈물, 꼭꼭 닫아놓았던 그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그것을 미움으로 승화시켰던
그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짧게 [ 알았어 ] 라는 답장을 보내고 나는 다시 누웠다. 내일 저녁은… 남은 일을 다음 주로
미루더라도 조금 일찍 마치고, 미용실에 다녀올 생각이다.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