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각, 집으로 향하다 문득 이유없이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서도 계속 아 뭔 뻘짓이지
싶다가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그 끈적이는 발걸음을 옮긴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려 담배에 불을 붙이다, 흘낏 뒤를 돌아보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
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그 후끈했던 낮과는 달리 어느새 날씨는 싸늘하다. 팔뚝이 다 싸늘하다.
'그런데 나 지금 뭐하는거지'
큼, 큼 하고 낀 듯 만 듯한 가래를 정리해 뱉는다. 잠깐 멈춰서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고 내쉬고.
'다시 그냥 얌전히 곱게 집으로 갈까?'
망설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조금 더 걷는다.
그녀의 원룸 집 근처, 두 개피를 다 피우도록 나는 그저 골목에서 망설이고만 있다. 그러다 손에 들린 장초를 슥
짓밟아 끄고는 전화를 건다.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루-
안 받으면 그것도 난처한데, 라고 생각할 찰나, 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 보라야"
"네 오빠"
늦은 시간에 건 전화인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함 없이 밝은 목소리로 받는 그녀.
"어… 음, 뭐하냐?"
나올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가, 일단 그녀의 현재 상태부터 점검하기로 했다. 날씨가 쌀쌀하다.
전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팔을 부빈다. 날씨가 차다. 아니, 암만 밤이래도 지금이 몇 돈데. 초여름에
뭔 지랄인가, 그만큼 내가 떨고 있다는 소리겠지.
"아, 그냥 집에 있어요. 오빠는요?"
"불타는 금요일에 집에서 뭐해. 어 나도 그냥, 잠깐 낮에 볼일 있어서 어디 가던 길에…"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고 말아버릴까, 아니면 나오라고 할까. 이제와서 전자는 너무 웃기지만 막상 또
지금 나가기 그렇다고 하면 아 씨, 좀 또 그런데. 하지만 하기사 금요일 밤 늦게 뜬금없이 전화 하는 거부터가
완전 구린 짓인데 뭐. 기왕 구린거 똥 한번 제대로 싸보자.
"그냥 가던 길에 마침 너네 집 근처거든 여기가. 그래서 생각나서 전화 한번 해봤지"
일단 숨 한번 돌려보는데…
"아 그렇구나. 오빠 그럼 어디에요?"
오케이, 어디냐고 물어봐주니 고맙다. 이러면 말이 나가기가 쉽지. 아 이래서 보라 니가 좋아.
"어, 그, 너네 집 그 근처에 마트 있잖아? 그 근처에서 가는 중이야. 뭐, 간만인데, 커피라도 한잔 할래?"
마트는 얼어죽을 너네 집 바로 앞이야. 그나저나 이 동네에 24시간 까페는 없고 모두 11시면 닫는 판에
12시 반에 전화해서 커피를 마시자니 참 거시기하고 구렸지만, 그래도 뭐 어디까지나 핑계니까.
"아…지금요? 음, 저 지금 완전 구린데"
야, 나도 이 시간에 혼자 집에 있으면서 풀 메이크업하고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아.
"난 맨날 구리잖아"
내 말에 픽 웃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한다.
"그럼요, 나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갈테니깐 거기, 까페베네 근처에 있는거 스페이스 바 알아요? 저번에
우리 같이 마셨던데"
"어…아! 어어, 알아"
"거기 먼저 가 있으세요. 금방 갈께요"
"그으래"
"네에, 금방 갈께요"
흐, 고맙네.
바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장장 45분만에 그녀가 도착했다. 아 대충 그냥 입고 나오지 뭘 또 이리
꾸몄어. 미안하게.
"오빠, 나 왔어요. 오래 기다렸죠?"
"어 백년 기다렸어. 흣, 아냐. 야 잠깐 얼굴 보자고 했지 누가 이렇게 이쁘게 꾸미라고 했어. 아 미안하네"
"아이, 아니에요"
"여튼, 이쁘다"
"아 맨날 그 소리는. 저 이쁘다고 말해주는 사람 오빠 밖에 없는거 알죠?"
부랴부랴 세안부터 다시 하고 가볍게나마 얼굴에 분칠 좀 했겠지. 그리고 뭘 입나 고민하다, 너무 꾸미는
것도 웃기다 싶어 샌들에 핫팬츠, 검은색 루즈한 핏의 티를 입고 나왔겠지. 손목에는 가는 매듭 팔찌 하나
차고, 에나멜 장지갑 손에 들고.
"뭐 마실래?"
"음, 칵테일 한잔 가볍게?"
"그래, 골라 봐. 아, 저기, 여기 메뉴 좀 주세요"
앞머리 내리니까 되게 귀여워 보인다, 라는 말에 "그래요? 나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난 좀 망한거 같은데"
하고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그녀. 그리고 요즘 지내는 거에 대해 새삼스레 또 물어본다. 한 모금 한 모금
나도 그녀도 칵테일을 마시고, 서로의 칵테일 맛도 보고, 이런저런 주변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조금 피곤하긴 하다'
싶어 슬쩍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새벽 1시 10분.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자연스레 보라의 옆 자리에
앉는다. 보라는 순간 움찔하다 곧 피식 웃고 말했다.
"오빠 왜 갑자기 내 옆 자리 앉아요?"
"어? 어 여기에 막 앉고 싶네. 왜 좁냐?"
"치"
노골적이고 손발 오그라들게 유치하지만 어차피 피차 눈치 볼 거 있나. 아저씨스럽게 눙청 좀 피우지 뭐.
저기 바 한쪽 벽면에 프로젝터로 쏘와주는 엠넷 영상이나 보다가 말을 돌렸다.
"여기 몇 시까지 해?"
"모르겠는데…왜요? 오빠 피곤해요?"
"어? 어어 아니. 뭐 피곤하기 보다도. 넌 피곤해?"
"저요? 음, 모르겠어요"
바로 옆 자리에 앉으니 그녀의 은근한 향기가 느껴진다. 또 그녀의 좋은 머리결을 살짝 손가락으로 따르다
물었다.
"내일은 뭐해?"
"저요? 음, 뭐 없는데"
"근데 너 왜 저요 저요 물어보냐? 여기 내가 너 말고 물어볼 사람 있냐"
쿡쿡 웃으면서 묻자 그녀도 순간 그제서야 "아" 하고 자신의 말버릇을 깨닫고는 웃었다.
"그르네요"
그리고 그 말에 함께 잠시 서로 할 말을 찾는다. 잠깐 끊어진 대화, 그리고 난 바로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네, 아까요. 좀 출출하긴 하네요. 오빠 배고프죠? 뭐 드실래요? 안주 제가 쏠께요"
아니, 그보다.
"걍 너네 집에 라면 있냐? 라면 좀 끓여주라"
그리고 아주 순간 보라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고민. 분명 그녀도 이렇게 나오면서 생각은 했겠지만
'그건' 그거고, 집에 데려가는건 또 다른 문제. 하지만 보라는 제법 쿨하게 응락했다.
"네 있어요, 내가 라면 맛있게 끓여줄께요"
"그래 가자"
계산을 마치고 그녀의 집까지 가는 길,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실… 뭐 아니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만약에 그녀가 아까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혹은 집 근처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나오기 좀 그렇다고
했다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눈치껏 살폈을 때 좀 아니다 싶었으면…
뭐 그랬더라면 뭐. 아닌거지. 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나를 받아주었고…
사실 보라와는 그동안 참 오랫동안 뭔가가 맞지 않았다. 내가 솔로일 때는 그녀가 연애 중이었고, 그녀가
어디 좋은 남자 없냐며 투정 부릴 때 나는 여친이 있었다.
분명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을 알고 있었으면서, 가끔 볼 때면 항상 분명한 그런 성적 긴장감을 느끼
면서도 그저 마음을 숨긴 채 그저 밥이나 먹고…어찌보면 우리는 서로를 그 '어장'에 가둬둔 채 관리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놈의 어장이니 뭐니 하는 표현을 굳이 빌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애써 서로를 그저 좋은 오빠 동생이라고 애둘러 숨겨왔지만 나는 오늘 노골적으로 그 빗장을
풀었고, 다행히 보라 역시도 나의 무례를 그리 싫지 않은 듯 받아주는 눈치. 그게 고맙고 좋았다.
"와 방 생각보다 넓다"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제법 원룸치고는 평 수가 있었다.
"그쵸? 13평이에요. 여기 이 동네에, 이 가격에 이런 집 잘 없어요"
"얼만데?"
"1000에 40이요. 대박이죠?"
"그러네. 괜찮다"
사실 건물은 몇 년 된 주택 건물이라 제법 낡았지만 그래도 깨끗한 방 안에, 또 보라가 방을 이쁘게 쓰는
덕분에 꽤 좋아보였다. 난 그렇게 방을 슥 돌아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 남녀가
들어서자 곧바로 조성되는 적막한 어색함. 보라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TV를 켠다.
"오빠 TV보고 있어요. 내가 라면 끓여줄께요"
"어"
왠지 나까지 어색해져 적당히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 지금 채널에 어디 뭐 케이블이라고 딱히
재미나는게 할 리가 있나. 대충 예능 채널에 맞춰놓고 라면 물을 올리는 보라의 뒷태를 감상한다.
'흠'
딱히 엄청나게 잘 빠진 라인이라거나 여신, 이런 다리야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올데 나오고 들어갈데
들어간 좋은 몸매. 가볍게 흥분이 된다. 물을 올리고는 싱크대에 남은 접시 한 장을 대충 물로 씻으면서
보라는 그 돌아선채로 물었다.
"근데 오빠, 늦게 라면 먹어도 괜찮아요? 내일 아침에 막 얼굴 엄청 부으면 어떡해?"
"내일 나도 약속 없는걸 뭐. 아침 나절에만 큰 바위 얼굴 하다가 오후에 가지 뭐"
"나 오빠 자고 가라고 말한 적 없는데?"
뒤늦게 태클을 건 그녀의 말에 농담으로 받아야 할지 뭘 어쩌면 좋을지, 괜히 어설픈 대답했다가 너무
쌈마이 양아치처럼 보일까 싶어 어색하게 멋적은 웃음만 짓고 있노라니 보라가 슥 고개를 돌려 웃었다.
"자고 가요 오빠"
그렇지.
"대신에 바닥에서 자요 오빠는"
순간 개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이럴 때가 더 중요한 법이다. 적당히 참고는 "그래, 바닥에서 잘께. 허리는
좀 아프겠지만" 정도의 말로 대꾸했다. 그리자 이윽고 보라는 몸을 돌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이런 식으로 여자애들이랑 많이 잤죠?"
마지막 관문. 보라의 테스트에 무어라 대답을 하며 좋을까 싶었지만 이럴 때의 대답은 사실 뭘 어떻게
대답을 하더라도 살짝 그녀에게 실망을 안기기 마련이다.
"아니 무슨. 뭐, 에이 그냥… 아니야. 정말. 아니야"
당황하며 어색하게 부정하는 내 얼굴을 보며 보라는 피식 웃고는 핀찬을 준다.
"아 오빠 실망이에요"
"왜?"
"여자는 그게 가끔 뻔한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 정답이 있단 말이에요"
특히 너같이 어린 애는. 하고 속으로 대꾸하고는 "그래, 그래서 아니라니깐? 나 정말 순수한 사람이야"
라고 얼버무렸지만 보라는 "대답이 좀 늦더라구요" 하고 웃는다.
그리고 때마침 라면 물이 끓었고, 보라가 라면 봉지를 뜯으려는 순간 나는 말했다.
"보라야"
"네?"
"라면은 조금 이따가 먹자"
긴장한 나머지 내 목구멍에 침이 꼴깍 넘어갔고, 그렇게 개드립을 치고 나니 그녀도 조금은 황당한 듯
귀여운 듯 "아 정말 오빠 너무하네" 하고 툴툴댔다. 하지만 또 별 군말 없이 보라는 기껏 올린 라면의 불을
끄고는 말했다.
"먼저 씻으세요. 오빠 먼저"
"그래"
나는 걸터앉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어슬렁어슬렁 욕실로 향하던 찰나, 보라는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적극적인 스킨십에 조금 놀랐지만, 싫진 않았다. 보라는 또
말했다.
"오빠 나 되게 집착 심한 여잔거 알죠?"
어… 사실은 지금 방금 떠올랐는데. 그리고 그래서 한숨이 절로 쉬어졌지만 "알지"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보라는 내 등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오늘 전화해서 나 먼저 꼬신 것도, 나랑 자자고 먼저 한 것도 오빤거 알죠?"
음, 그거야 잘 알지. 나는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면서, 내 허리를 휘감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그럼, 잘 알지"
그래… 알기는 잘 알지….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주 어색한, 연인처럼.
싶다가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그 끈적이는 발걸음을 옮긴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려 담배에 불을 붙이다, 흘낏 뒤를 돌아보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
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그 후끈했던 낮과는 달리 어느새 날씨는 싸늘하다. 팔뚝이 다 싸늘하다.
'그런데 나 지금 뭐하는거지'
큼, 큼 하고 낀 듯 만 듯한 가래를 정리해 뱉는다. 잠깐 멈춰서 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고 내쉬고.
'다시 그냥 얌전히 곱게 집으로 갈까?'
망설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생각에 조금 더 걷는다.
그녀의 원룸 집 근처, 두 개피를 다 피우도록 나는 그저 골목에서 망설이고만 있다. 그러다 손에 들린 장초를 슥
짓밟아 끄고는 전화를 건다.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루-
안 받으면 그것도 난처한데, 라고 생각할 찰나, 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
"어, 보라야"
"네 오빠"
늦은 시간에 건 전화인데도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함 없이 밝은 목소리로 받는 그녀.
"어… 음, 뭐하냐?"
나올래?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다가, 일단 그녀의 현재 상태부터 점검하기로 했다. 날씨가 쌀쌀하다.
전화기를 귀와 어깨 사이에 끼우고 팔을 부빈다. 날씨가 차다. 아니, 암만 밤이래도 지금이 몇 돈데. 초여름에
뭔 지랄인가, 그만큼 내가 떨고 있다는 소리겠지.
"아, 그냥 집에 있어요. 오빠는요?"
"불타는 금요일에 집에서 뭐해. 어 나도 그냥, 잠깐 낮에 볼일 있어서 어디 가던 길에…"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고 말아버릴까, 아니면 나오라고 할까. 이제와서 전자는 너무 웃기지만 막상 또
지금 나가기 그렇다고 하면 아 씨, 좀 또 그런데. 하지만 하기사 금요일 밤 늦게 뜬금없이 전화 하는 거부터가
완전 구린 짓인데 뭐. 기왕 구린거 똥 한번 제대로 싸보자.
"그냥 가던 길에 마침 너네 집 근처거든 여기가. 그래서 생각나서 전화 한번 해봤지"
일단 숨 한번 돌려보는데…
"아 그렇구나. 오빠 그럼 어디에요?"
오케이, 어디냐고 물어봐주니 고맙다. 이러면 말이 나가기가 쉽지. 아 이래서 보라 니가 좋아.
"어, 그, 너네 집 그 근처에 마트 있잖아? 그 근처에서 가는 중이야. 뭐, 간만인데, 커피라도 한잔 할래?"
마트는 얼어죽을 너네 집 바로 앞이야. 그나저나 이 동네에 24시간 까페는 없고 모두 11시면 닫는 판에
12시 반에 전화해서 커피를 마시자니 참 거시기하고 구렸지만, 그래도 뭐 어디까지나 핑계니까.
"아…지금요? 음, 저 지금 완전 구린데"
야, 나도 이 시간에 혼자 집에 있으면서 풀 메이크업하고 있으리라 기대하지는 않아.
"난 맨날 구리잖아"
내 말에 픽 웃은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한다.
"그럼요, 나 옷만 갈아입고 바로 나갈테니깐 거기, 까페베네 근처에 있는거 스페이스 바 알아요? 저번에
우리 같이 마셨던데"
"어…아! 어어, 알아"
"거기 먼저 가 있으세요. 금방 갈께요"
"그으래"
"네에, 금방 갈께요"
흐, 고맙네.
바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장장 45분만에 그녀가 도착했다. 아 대충 그냥 입고 나오지 뭘 또 이리
꾸몄어. 미안하게.
"오빠, 나 왔어요. 오래 기다렸죠?"
"어 백년 기다렸어. 흣, 아냐. 야 잠깐 얼굴 보자고 했지 누가 이렇게 이쁘게 꾸미라고 했어. 아 미안하네"
"아이, 아니에요"
"여튼, 이쁘다"
"아 맨날 그 소리는. 저 이쁘다고 말해주는 사람 오빠 밖에 없는거 알죠?"
부랴부랴 세안부터 다시 하고 가볍게나마 얼굴에 분칠 좀 했겠지. 그리고 뭘 입나 고민하다, 너무 꾸미는
것도 웃기다 싶어 샌들에 핫팬츠, 검은색 루즈한 핏의 티를 입고 나왔겠지. 손목에는 가는 매듭 팔찌 하나
차고, 에나멜 장지갑 손에 들고.
"뭐 마실래?"
"음, 칵테일 한잔 가볍게?"
"그래, 골라 봐. 아, 저기, 여기 메뉴 좀 주세요"
앞머리 내리니까 되게 귀여워 보인다, 라는 말에 "그래요? 나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난 좀 망한거 같은데"
하고 머리를 만지작 거리는 그녀. 그리고 요즘 지내는 거에 대해 새삼스레 또 물어본다. 한 모금 한 모금
나도 그녀도 칵테일을 마시고, 서로의 칵테일 맛도 보고, 이런저런 주변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조금 피곤하긴 하다'
싶어 슬쩍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새벽 1시 10분.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다가 자연스레 보라의 옆 자리에
앉는다. 보라는 순간 움찔하다 곧 피식 웃고 말했다.
"오빠 왜 갑자기 내 옆 자리 앉아요?"
"어? 어 여기에 막 앉고 싶네. 왜 좁냐?"
"치"
노골적이고 손발 오그라들게 유치하지만 어차피 피차 눈치 볼 거 있나. 아저씨스럽게 눙청 좀 피우지 뭐.
저기 바 한쪽 벽면에 프로젝터로 쏘와주는 엠넷 영상이나 보다가 말을 돌렸다.
"여기 몇 시까지 해?"
"모르겠는데…왜요? 오빠 피곤해요?"
"어? 어어 아니. 뭐 피곤하기 보다도. 넌 피곤해?"
"저요? 음, 모르겠어요"
바로 옆 자리에 앉으니 그녀의 은근한 향기가 느껴진다. 또 그녀의 좋은 머리결을 살짝 손가락으로 따르다
물었다.
"내일은 뭐해?"
"저요? 음, 뭐 없는데"
"근데 너 왜 저요 저요 물어보냐? 여기 내가 너 말고 물어볼 사람 있냐"
쿡쿡 웃으면서 묻자 그녀도 순간 그제서야 "아" 하고 자신의 말버릇을 깨닫고는 웃었다.
"그르네요"
그리고 그 말에 함께 잠시 서로 할 말을 찾는다. 잠깐 끊어진 대화, 그리고 난 바로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네, 아까요. 좀 출출하긴 하네요. 오빠 배고프죠? 뭐 드실래요? 안주 제가 쏠께요"
아니, 그보다.
"걍 너네 집에 라면 있냐? 라면 좀 끓여주라"
그리고 아주 순간 보라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고민. 분명 그녀도 이렇게 나오면서 생각은 했겠지만
'그건' 그거고, 집에 데려가는건 또 다른 문제. 하지만 보라는 제법 쿨하게 응락했다.
"네 있어요, 내가 라면 맛있게 끓여줄께요"
"그래 가자"
계산을 마치고 그녀의 집까지 가는 길,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실… 뭐 아니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만약에 그녀가 아까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혹은 집 근처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나오기 좀 그렇다고
했다면,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눈치껏 살폈을 때 좀 아니다 싶었으면…
뭐 그랬더라면 뭐. 아닌거지. 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나를 받아주었고…
사실 보라와는 그동안 참 오랫동안 뭔가가 맞지 않았다. 내가 솔로일 때는 그녀가 연애 중이었고, 그녀가
어디 좋은 남자 없냐며 투정 부릴 때 나는 여친이 있었다.
분명 서로에 대한 이성적인 호감을 알고 있었으면서, 가끔 볼 때면 항상 분명한 그런 성적 긴장감을 느끼
면서도 그저 마음을 숨긴 채 그저 밥이나 먹고…어찌보면 우리는 서로를 그 '어장'에 가둬둔 채 관리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놈의 어장이니 뭐니 하는 표현을 굳이 빌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애써 서로를 그저 좋은 오빠 동생이라고 애둘러 숨겨왔지만 나는 오늘 노골적으로 그 빗장을
풀었고, 다행히 보라 역시도 나의 무례를 그리 싫지 않은 듯 받아주는 눈치. 그게 고맙고 좋았다.
"와 방 생각보다 넓다"
여자 혼자 살기에는 제법 원룸치고는 평 수가 있었다.
"그쵸? 13평이에요. 여기 이 동네에, 이 가격에 이런 집 잘 없어요"
"얼만데?"
"1000에 40이요. 대박이죠?"
"그러네. 괜찮다"
사실 건물은 몇 년 된 주택 건물이라 제법 낡았지만 그래도 깨끗한 방 안에, 또 보라가 방을 이쁘게 쓰는
덕분에 꽤 좋아보였다. 난 그렇게 방을 슥 돌아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자 혼자 사는 원룸에 남녀가
들어서자 곧바로 조성되는 적막한 어색함. 보라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짓더니 서둘러 TV를 켠다.
"오빠 TV보고 있어요. 내가 라면 끓여줄께요"
"어"
왠지 나까지 어색해져 적당히 리모콘을 찾아 채널을 돌린다. 지금 채널에 어디 뭐 케이블이라고 딱히
재미나는게 할 리가 있나. 대충 예능 채널에 맞춰놓고 라면 물을 올리는 보라의 뒷태를 감상한다.
'흠'
딱히 엄청나게 잘 빠진 라인이라거나 여신, 이런 다리야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올데 나오고 들어갈데
들어간 좋은 몸매. 가볍게 흥분이 된다. 물을 올리고는 싱크대에 남은 접시 한 장을 대충 물로 씻으면서
보라는 그 돌아선채로 물었다.
"근데 오빠, 늦게 라면 먹어도 괜찮아요? 내일 아침에 막 얼굴 엄청 부으면 어떡해?"
"내일 나도 약속 없는걸 뭐. 아침 나절에만 큰 바위 얼굴 하다가 오후에 가지 뭐"
"나 오빠 자고 가라고 말한 적 없는데?"
뒤늦게 태클을 건 그녀의 말에 농담으로 받아야 할지 뭘 어쩌면 좋을지, 괜히 어설픈 대답했다가 너무
쌈마이 양아치처럼 보일까 싶어 어색하게 멋적은 웃음만 짓고 있노라니 보라가 슥 고개를 돌려 웃었다.
"자고 가요 오빠"
그렇지.
"대신에 바닥에서 자요 오빠는"
순간 개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이럴 때가 더 중요한 법이다. 적당히 참고는 "그래, 바닥에서 잘께. 허리는
좀 아프겠지만" 정도의 말로 대꾸했다. 그리자 이윽고 보라는 몸을 돌리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 이런 식으로 여자애들이랑 많이 잤죠?"
마지막 관문. 보라의 테스트에 무어라 대답을 하며 좋을까 싶었지만 이럴 때의 대답은 사실 뭘 어떻게
대답을 하더라도 살짝 그녀에게 실망을 안기기 마련이다.
"아니 무슨. 뭐, 에이 그냥… 아니야. 정말. 아니야"
당황하며 어색하게 부정하는 내 얼굴을 보며 보라는 피식 웃고는 핀찬을 준다.
"아 오빠 실망이에요"
"왜?"
"여자는 그게 가끔 뻔한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 정답이 있단 말이에요"
특히 너같이 어린 애는. 하고 속으로 대꾸하고는 "그래, 그래서 아니라니깐? 나 정말 순수한 사람이야"
라고 얼버무렸지만 보라는 "대답이 좀 늦더라구요" 하고 웃는다.
그리고 때마침 라면 물이 끓었고, 보라가 라면 봉지를 뜯으려는 순간 나는 말했다.
"보라야"
"네?"
"라면은 조금 이따가 먹자"
긴장한 나머지 내 목구멍에 침이 꼴깍 넘어갔고, 그렇게 개드립을 치고 나니 그녀도 조금은 황당한 듯
귀여운 듯 "아 정말 오빠 너무하네" 하고 툴툴댔다. 하지만 또 별 군말 없이 보라는 기껏 올린 라면의 불을
끄고는 말했다.
"먼저 씻으세요. 오빠 먼저"
"그래"
나는 걸터앉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개선장군이라도 된 양 어슬렁어슬렁 욕실로 향하던 찰나, 보라는
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적극적인 스킨십에 조금 놀랐지만, 싫진 않았다. 보라는 또
말했다.
"오빠 나 되게 집착 심한 여잔거 알죠?"
어… 사실은 지금 방금 떠올랐는데. 그리고 그래서 한숨이 절로 쉬어졌지만 "알지" 하고 대꾸했다. 그러자
보라는 내 등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오늘 전화해서 나 먼저 꼬신 것도, 나랑 자자고 먼저 한 것도 오빤거 알죠?"
음, 그거야 잘 알지. 나는 가볍게 헛웃음을 지으면서, 내 허리를 휘감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그럼, 잘 알지"
그래… 알기는 잘 알지….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었다. 아주 어색한, 연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