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일이 좀 생겼다는 핑계를 대고 회사에 오후 반차를 냈다. 그리고는 집으로 가는 길에 몇 번 간판을
본 적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방문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 사무소는 아니었지만 알아서 잘 상담해주겠지.
사법고시가 어디 껌인가.
"예약을 하고 오셨나요?"
"아닙니다"
"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외견과는 달리, 사무실 안은 깔끔했다. 내 평생 변호사 사무실에를 다 와보는구나,
싶어 두리번 거리고 있노라니 '그게 하필이면 이혼 상담이라니' 싶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기다리
니까 금방 깔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 하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라오시죠" 하면서 상담실 비슷한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이 사람이 변호사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변호사 상담 이전에 내 개인 정보와 상담인지 선임인지,
상담 방향과 비용, 문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상담 등 사전 인터뷰를 해서 그 내용을 정리해주는 직원이었
다. 사전 상담이 끝난 후 나는 복도 구석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가는 길에 흘낏보니 변호사가 여럿
이었다. 일종의 로펌 같은 곳인가. 하기사 요새는 강남에 개인 병원들도 의사 여럿이 운영하더만.
똑똑똑
변호사 조수완, 이라고 써있는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밖에서 듣기엔 꽤 젊은 목소리였는데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변호사였다. 흐음.
기왕이면 젊은 사람이 더 빠릿빠릿하고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딱 보기에도 사람이 총기있게 생긴게
일단 믿음이 아주 없진 않았다.
"앉으세요. 이혼 관련해서 상담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미리 앞서 직원에게 설명한 내 사전 인터뷰 내용을 죽 읽어본 조수완 변호사는 나에게 물었다.
"결혼이 정확히 몇 년 차이십니까"
"올해로 3년 차입니다. 그 전에 연애는 약 1년 정도했구요"
나의 답변 내용을 몽블랑 만년필로 일일히 종이에 적으면서 그는 직설적으로 계속 물었다.
"음, 부부 관계는 원활한 편이었습니까"
조금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부끄러움을 가릴 처지이랴. 마누라가 바람난 거보다 더
쪽팔린 일이 남자에게 뭐가 있단 말인가.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둘 다 맞벌이를 하는데다 워낙에 바쁘기도 해서 정작 신혼 1,2년 차에는 조금
소원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말 즈음에 주 1회 정도는 뭐… 올해 들어서는 확실히 조금 소원해지기는
했습니다. 둘 다 성적으로는 별 불만 없었구요"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연봉이나, 혹시 술 담배 문제, 혹은 기타 배우자로서 본인의 문제점, 이런 것은 없습니까. 여자 문제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꽤 깊이 있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될 법한 질문들이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연봉은 또래에 비해서 제법 받는 편이라서 큰 문제는 없고, 담배는 안 합니다. 술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1~2주에 한번 정도 회사 사람들과 마시는 일 이외에는 잘 없구요. 뭐 배우자로서의 문제라면,
신혼 초에 둘 다 많이 바빠서 신혼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정도? 아, 근래에는 아무래도 서로 아침에 얼굴
보고 저녁에 얼굴 보기 전까지 전화가 좀 뜸해졌다는 정도. 하지만 이거야 저만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전화를 안 하는거고, 또 결혼 몇 년차 접어들면 다들 이러는거 아닙니까. 여자 문제는 완전 깨끗합
니다. 그래서 더 열받는거구요"
변호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이야기를 모두 적당히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곤
필기를 계속하며 물었다.
"혹시 시댁이나, 아니면 출산, 육아 관련해서 충돌이 있었던 적은 없습니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시댁…은, 글쎄요, 뭐 본인이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우리 부부 일에 최대한
터치를 안 하는 방향으로 프리하게 해주시는 분들이고, 또 출산은 우리 부부 둘 다 아직은 조금 더 여유를
갖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내년쯤 생각했었지만"
출산이라…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 서글펐다. 그렇구나. 이제 아내와 함께 내 새끼를 만들 일은
이제 없겠지. 설령 내가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하더라도… 으음.
"가장 최근에 싸운 기억이 언제이십니까"
슬슬, 무슨 죄인 심문하듯 계속 캐묻기만 하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났지만-무슨 검사 출신인가?- 일단은
상담에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최근에 싸운 기억이라…음…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나의 대답에 변호사는 메모를 위해 썼던 안경을 벗어놓고 다시 물었다.
"근래에는 싸우지 않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간단히 의견이 엇갈리는 정도는 있지만, 제대로 싸운 기억은… 적어도 근 몇 달 이내에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 대답을 하면서 문득 그제서야 우리 부부가 그동안 뭔가 정말로 큰 소통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몸 부대끼고 사는 두 사람이 싸운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싸움 한번 안 하고
산단 말인가. 그렇다고 무슨 잉꼬부부도 절대 아니면서. 나는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변호사는 "평소에 대화가 많이 없으신 편인가요? 배우자 분과?" 하고 물었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요새
둘이 제대로 30분 이상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조차도 아내와 길게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했던 것 같다.
그런 건가. 그래서 아내가 떠난건가. 하지만 혼자 내가 자조하기에 앞서 변호사가 말했다.
"상담 내용을 보면, 아내의 불륜에 대해 간통죄로 고소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랬다.
"네"
하지만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녹음된 내용을 들어보지 않아 정확하게는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간통죄라는게…사실 현장을 덮치지
않고서는 쉽지 않아요. 음성 파일에 명확하게 신원이 밝혀져 있다면 또 몰라도… 이게 어렵습니다"
그렇구만. 뭐 나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내의 외도에 대한 증명은 되지 않겠습니까"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적인 처벌은 힘들어도, 이혼 소송이나 위자료 청구 문제에서는 뭐…많이 유리하겠습니다만"
유리하다라… 글쎄. 쥐뿔 가진거 없는 남자가 위자료 몇 푼 받아봐야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아내 분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은 나눠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그제서야 어쩌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절차를 걸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뭐 말할 필요 자체를 못 느꼈다. 바람 피우는 마누라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변호사는 지금까지 적은 내용을 죽 훑어보면서 말했다.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고, 여자 문제도 깨끗하고, 연봉 괜찮고, 시댁 문제 없고, 육아 스트레스 없고
완벽까지는 몰라도 좋은 남편이긴 하십니다. 대화가 없는거야, 대한민국 어느 부부가 진짜로 속을 터놓고
산답니까 허허"
위로의 말인가. 씁쓸했다. 변호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게 그렇듯이, 한쪽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고 반대쪽도 꼭 그러라는 법은 없는거고
결혼식날 수백명 앞에서 서약한 것을 내팽겨 친 마누라, 많이 미우시겠지요"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내가 밉기보다, 그냥 내가 한심했고, 내 처지가 측은했다. 변호사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을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까지 확실한 이혼 사유와 증거자료까지 갖고 있다면 뭐 굳이 저희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지요.
다만…"
다만?
"어쨌든 뭐 다 떠나서, 만에 하나 이혼소송을 가게 된다고 쳤을 때 말입니다"
변호사는 꽤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자가 진짜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소송을 걸면 말입니다, 거의 80% 이상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남자가 암만 매달려도 여자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잘 안 돌립니다. 근데 남자가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
소송을 하면… 뭐 여자도 이혼하자고 덤비지 않는 이상, 중간에 소 취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걸까.
"왜 그렇죠?"
그러자 변호사는 빙긋 웃으면서 "오늘은 일단 집에 가셔서, 잘 생각해보시고 정말 결심이 섰을 때 그때
다시 오십시오" 하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담료 15만원을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허무했다. 무슨 선문답 하자는 것도
아니고 허세는. 날은 이토록 무더운데 가슴 한구석은 뻥 뚫린 듯 허무했고 그저 내 팔자가 원망스러웠다.
머리라도 식힐겸 걸을까 했는데 식히기는 커녕 머리가 타버릴 것 같아서 택시에 올라탔다.
"대림동이요"
머릿 속으로 지난 3년 간의 결혼생왈을 회고해보았다. 물론 중간에 힘든 기억도 많았고, 솔직히 그렇게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부부가 아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모든게 '무난했던' 부부였다. 바로 그게 더
문제였을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짱구 굴려봐야 답이 나올 리 없는 문제다. 정말로 아내가 힘들었을 때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다른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거고, 아니면 뒤늦게 그녀에게 불타는 사랑이 찾아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느 못된 놈의 꼬임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고. 다 모른다. 나는 아내에 대해 뭘 아는 놈이란 말인가.
"에에이, 하여간에 운전 개같이 하는 것들은 누군가 해서 보면 죄다 기집년들이야"
나의 우울한 사색을 방해한 것은 택시 기사였다. 그는 룸미러로 언뜻 이쪽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저 말이에요. 아주 그냥 운전을 아주 개같이 한다니까. 기집애들은 아예 운전을 못하게 해야 돼"
우리 마누라 운전 실력도 가관이지. 왠지 미운 그녀가 싫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럼요, 암요"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기사는 흡족해졌는지 고리타분한 마초론을 늘어놓았다.
"아주, 요즘 여자들 건방져요 건방져. 땍땍거리기나 할 줄 알고. 그리고 뭐라고 하면 어디 기집들이 기냥
드세기나 해서. 아주, 나라가 망조가 들려 망조가. 여자가 어디… 정치도 봐. 여자들이 대가리를 하니까
나라가 아주 망조가 들잖아. 여자들이 말이에요. 보면 운전 이상하게 하고 빌빌 거리는 차들은 요러고
보면 다 여자야 여자. 아주 참 기가 막히는게…아주, 기집들이 문제야 문제. 안 그렇습니까, 요즘 진짜
이 나라 역사에 없는, 아주…"
아 씨발 이게 뭐 말이야 방구야. 듣기 싫다. 1절만 해 개새끼야. 그리고 문득 이런 새끼도 마누라랍시고
여자를 데리고 잘만 살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기가 막혔다. 딱 3초 전 맞장구를 쳐 준 내가 한심했다.
"저기요, 아저씨"
"예, 예"
"그냥 운전이나 합시다"
나의 말에 무안한지 힐끔 룸머리로 나를 다시 쳐다본 그는 말없이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래, 닥쳐라.
집에 들어와 누워 잠이나 잘까 하다 문득 선반 위의 앨범을 펴보였다. 살짝 먼지를 털어내고 사진을 다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좋았는데'
하지만 금방 두 서너 페이지 넘기다가 그냥 덮었다. 찌질하게 이게 뭐란 말인가. 마누라는 바람나고 나는
혼자 앨범 보며 궁상떨고, 참 좆같기도 이렇게 좆같을 수가 없다. 앨범을 저 멀리 던져놓고 나는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이혼하고 나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그냥 좆되는거지.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며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냥 우울증에 자살이나 안 하면 그만이지. 아니, 자살은 내가 왜 해? 내가 무슨 죄졌어?
그런데 이 시점에 오니까 기분이 참 묘한게, 아까 그 변호사의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 물론 어제는 멀쩡한 미니 컴퍼넌트를 아작낼 정도로 펄펄
뛰고 미친 지랄을 하긴 했다만, 그게 이미 내 화를 다 썻어내버렸는지 오늘은 솔직히 별로 화도 안 났다.
그냥 모르는 척 참고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봤을 때 마누라도, 아마 나와의 이혼까지 생각하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왠지 지나가는 바람에 한번 떡 집어먹은 것이겠지. 당장 진지하게 나랑 이혼
하고 그 새끼랑 살라고 하면 마누라 년도 답이 없겠지. 아무렴. 연봉 3천도 될까말까 한 새끼랑 무슨.
게다가 까놓고 말해서 나 역시 마누라에 대한 큰 애정이 있는건 아니잖는가. 허허.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밥이나 해주고 청소나 좀 하고, 돈이나 좀 벌어오고, 밤에 몸이나 좀 주면, 그거면 솔직히 난 됐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우리 부부의 결혼은 이렇게 참 의미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덧없고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다 허무했다.
'남들도 이렇게 살까'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을 하니, 굳이 그렇다면 뭐하러 그런 애정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나 싶기도 하고,
까놓고 말해 내 연봉에 나 혼자 산다치면 까짓거 미래 걱정하면서 적금 그리 열심히 안 부어도 되고 뭐
집도 원룸으로 옮긴다 치고 그러면 얼마든지 화려하게 살 수 있지 않는가 싶기도 했지만
'것도 하던 놈이나 잘하는거지'
영업부 김대리 봐라. 이혼하고 이제 독신 귀족 될거라고 자신있게 소리치더만 하루하루 사람이 찌질해
지고 망가지지 않던가. 남자는 아무래도 나이가 먹으면 여자가 필요하긴 한 거 같다.
"갑갑하구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대뜸 휴대폰을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회의도 잦고
이래저래 낮 시간대에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지 않게 된지 거의 반 년째. 참 오래간만에 평일 대낮에
아내에게 전화다. 그렇구나. 이런 부분에서 우리 부부관계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구나.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하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전화를 슥 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렇구만"
뭐가 그렇다는건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겠지만 어쨌근 그렇게 한 마디를 던져놓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 계속 -
본 적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방문했다. 이혼 전문 변호사 사무소는 아니었지만 알아서 잘 상담해주겠지.
사법고시가 어디 껌인가.
"예약을 하고 오셨나요?"
"아닙니다"
"네,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 외견과는 달리, 사무실 안은 깔끔했다. 내 평생 변호사 사무실에를 다 와보는구나,
싶어 두리번 거리고 있노라니 '그게 하필이면 이혼 상담이라니' 싶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기다리
니까 금방 깔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 하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따라오시죠" 하면서 상담실 비슷한 곳으로
데려갔다.
나는 이 사람이 변호사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변호사 상담 이전에 내 개인 정보와 상담인지 선임인지,
상담 방향과 비용, 문의 내용에 대한 간단한 상담 등 사전 인터뷰를 해서 그 내용을 정리해주는 직원이었
다. 사전 상담이 끝난 후 나는 복도 구석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가는 길에 흘낏보니 변호사가 여럿
이었다. 일종의 로펌 같은 곳인가. 하기사 요새는 강남에 개인 병원들도 의사 여럿이 운영하더만.
똑똑똑
변호사 조수완, 이라고 써있는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밖에서 듣기엔 꽤 젊은 목소리였는데 실제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 변호사였다. 흐음.
기왕이면 젊은 사람이 더 빠릿빠릿하고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딱 보기에도 사람이 총기있게 생긴게
일단 믿음이 아주 없진 않았다.
"앉으세요. 이혼 관련해서 상담하고 싶으시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미리 앞서 직원에게 설명한 내 사전 인터뷰 내용을 죽 읽어본 조수완 변호사는 나에게 물었다.
"결혼이 정확히 몇 년 차이십니까"
"올해로 3년 차입니다. 그 전에 연애는 약 1년 정도했구요"
나의 답변 내용을 몽블랑 만년필로 일일히 종이에 적으면서 그는 직설적으로 계속 물었다.
"음, 부부 관계는 원활한 편이었습니까"
조금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부끄러움을 가릴 처지이랴. 마누라가 바람난 거보다 더
쪽팔린 일이 남자에게 뭐가 있단 말인가.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둘 다 맞벌이를 하는데다 워낙에 바쁘기도 해서 정작 신혼 1,2년 차에는 조금
소원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말 즈음에 주 1회 정도는 뭐… 올해 들어서는 확실히 조금 소원해지기는
했습니다. 둘 다 성적으로는 별 불만 없었구요"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연봉이나, 혹시 술 담배 문제, 혹은 기타 배우자로서 본인의 문제점, 이런 것은 없습니까. 여자 문제같은
것이나"
생각해보면 꽤 깊이 있는, 자기반성의 시간이 될 법한 질문들이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연봉은 또래에 비해서 제법 받는 편이라서 큰 문제는 없고, 담배는 안 합니다. 술도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1~2주에 한번 정도 회사 사람들과 마시는 일 이외에는 잘 없구요. 뭐 배우자로서의 문제라면,
신혼 초에 둘 다 많이 바빠서 신혼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정도? 아, 근래에는 아무래도 서로 아침에 얼굴
보고 저녁에 얼굴 보기 전까지 전화가 좀 뜸해졌다는 정도. 하지만 이거야 저만 잘못하는 것도 아니고,
서로 전화를 안 하는거고, 또 결혼 몇 년차 접어들면 다들 이러는거 아닙니까. 여자 문제는 완전 깨끗합
니다. 그래서 더 열받는거구요"
변호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이야기를 모두 적당히 노트에 메모했다. 그리곤
필기를 계속하며 물었다.
"혹시 시댁이나, 아니면 출산, 육아 관련해서 충돌이 있었던 적은 없습니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시댁…은, 글쎄요, 뭐 본인이 어떻게 느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 부모님은 우리 부부 일에 최대한
터치를 안 하는 방향으로 프리하게 해주시는 분들이고, 또 출산은 우리 부부 둘 다 아직은 조금 더 여유를
갖자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내년쯤 생각했었지만"
출산이라… 생각하니 문득 마음이 씁쓸해졌다. 서글펐다. 그렇구나. 이제 아내와 함께 내 새끼를 만들 일은
이제 없겠지. 설령 내가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하더라도… 으음.
"가장 최근에 싸운 기억이 언제이십니까"
슬슬, 무슨 죄인 심문하듯 계속 캐묻기만 하는 것이 조금 짜증이 났지만-무슨 검사 출신인가?- 일단은
상담에 집중하기로 했다. 가장 최근에 싸운 기억이라…음…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나의 대답에 변호사는 메모를 위해 썼던 안경을 벗어놓고 다시 물었다.
"근래에는 싸우지 않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간단히 의견이 엇갈리는 정도는 있지만, 제대로 싸운 기억은… 적어도 근 몇 달 이내에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 대답을 하면서 문득 그제서야 우리 부부가 그동안 뭔가 정말로 큰 소통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몸 부대끼고 사는 두 사람이 싸운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싸움 한번 안 하고
산단 말인가. 그렇다고 무슨 잉꼬부부도 절대 아니면서. 나는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변호사는 "평소에 대화가 많이 없으신 편인가요? 배우자 분과?" 하고 물었다. 그런가? 생각해보니 요새
둘이 제대로 30분 이상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나조차도 아내와 길게 대화를 하는 것보다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했던 것 같다.
그런 건가. 그래서 아내가 떠난건가. 하지만 혼자 내가 자조하기에 앞서 변호사가 말했다.
"상담 내용을 보면, 아내의 불륜에 대해 간통죄로 고소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랬다.
"네"
하지만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녹음된 내용을 들어보지 않아 정확하게는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간통죄라는게…사실 현장을 덮치지
않고서는 쉽지 않아요. 음성 파일에 명확하게 신원이 밝혀져 있다면 또 몰라도… 이게 어렵습니다"
그렇구만. 뭐 나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내의 외도에 대한 증명은 되지 않겠습니까"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적인 처벌은 힘들어도, 이혼 소송이나 위자료 청구 문제에서는 뭐…많이 유리하겠습니다만"
유리하다라… 글쎄. 쥐뿔 가진거 없는 남자가 위자료 몇 푼 받아봐야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아내 분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은 나눠보셨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을 받는 순간, 그제서야 어쩌면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절차를 걸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뭐 말할 필요 자체를 못 느꼈다. 바람 피우는 마누라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변호사는 지금까지 적은 내용을 죽 훑어보면서 말했다.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고, 여자 문제도 깨끗하고, 연봉 괜찮고, 시댁 문제 없고, 육아 스트레스 없고
완벽까지는 몰라도 좋은 남편이긴 하십니다. 대화가 없는거야, 대한민국 어느 부부가 진짜로 속을 터놓고
산답니까 허허"
위로의 말인가. 씁쓸했다. 변호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게 그렇듯이, 한쪽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고 반대쪽도 꼭 그러라는 법은 없는거고
결혼식날 수백명 앞에서 서약한 것을 내팽겨 친 마누라, 많이 미우시겠지요"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내가 밉기보다, 그냥 내가 한심했고, 내 처지가 측은했다. 변호사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내 손을 툭툭 두드렸다.
"이렇게까지 확실한 이혼 사유와 증거자료까지 갖고 있다면 뭐 굳이 저희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지요.
다만…"
다만?
"어쨌든 뭐 다 떠나서, 만에 하나 이혼소송을 가게 된다고 쳤을 때 말입니다"
변호사는 꽤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자가 진짜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소송을 걸면 말입니다, 거의 80% 이상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됩니다.
남자가 암만 매달려도 여자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잘 안 돌립니다. 근데 남자가 이혼을 결심하고 이혼
소송을 하면… 뭐 여자도 이혼하자고 덤비지 않는 이상, 중간에 소 취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걸까.
"왜 그렇죠?"
그러자 변호사는 빙긋 웃으면서 "오늘은 일단 집에 가셔서, 잘 생각해보시고 정말 결심이 섰을 때 그때
다시 오십시오" 하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담료 15만원을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허무했다. 무슨 선문답 하자는 것도
아니고 허세는. 날은 이토록 무더운데 가슴 한구석은 뻥 뚫린 듯 허무했고 그저 내 팔자가 원망스러웠다.
머리라도 식힐겸 걸을까 했는데 식히기는 커녕 머리가 타버릴 것 같아서 택시에 올라탔다.
"대림동이요"
머릿 속으로 지난 3년 간의 결혼생왈을 회고해보았다. 물론 중간에 힘든 기억도 많았고, 솔직히 그렇게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부부가 아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모든게 '무난했던' 부부였다. 바로 그게 더
문제였을까.
하지만 내가 아무리 짱구 굴려봐야 답이 나올 리 없는 문제다. 정말로 아내가 힘들었을 때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다른 남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는거고, 아니면 뒤늦게 그녀에게 불타는 사랑이 찾아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느 못된 놈의 꼬임에 넘어갔을지도 모르고. 다 모른다. 나는 아내에 대해 뭘 아는 놈이란 말인가.
"에에이, 하여간에 운전 개같이 하는 것들은 누군가 해서 보면 죄다 기집년들이야"
나의 우울한 사색을 방해한 것은 택시 기사였다. 그는 룸미러로 언뜻 이쪽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저 말이에요. 아주 그냥 운전을 아주 개같이 한다니까. 기집애들은 아예 운전을 못하게 해야 돼"
우리 마누라 운전 실력도 가관이지. 왠지 미운 그녀가 싫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럼요, 암요"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기사는 흡족해졌는지 고리타분한 마초론을 늘어놓았다.
"아주, 요즘 여자들 건방져요 건방져. 땍땍거리기나 할 줄 알고. 그리고 뭐라고 하면 어디 기집들이 기냥
드세기나 해서. 아주, 나라가 망조가 들려 망조가. 여자가 어디… 정치도 봐. 여자들이 대가리를 하니까
나라가 아주 망조가 들잖아. 여자들이 말이에요. 보면 운전 이상하게 하고 빌빌 거리는 차들은 요러고
보면 다 여자야 여자. 아주 참 기가 막히는게…아주, 기집들이 문제야 문제. 안 그렇습니까, 요즘 진짜
이 나라 역사에 없는, 아주…"
아 씨발 이게 뭐 말이야 방구야. 듣기 싫다. 1절만 해 개새끼야. 그리고 문득 이런 새끼도 마누라랍시고
여자를 데리고 잘만 살텐데, 하는 생각이 들자 기가 막혔다. 딱 3초 전 맞장구를 쳐 준 내가 한심했다.
"저기요, 아저씨"
"예, 예"
"그냥 운전이나 합시다"
나의 말에 무안한지 힐끔 룸머리로 나를 다시 쳐다본 그는 말없이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래, 닥쳐라.
집에 들어와 누워 잠이나 잘까 하다 문득 선반 위의 앨범을 펴보였다. 살짝 먼지를 털어내고 사진을 다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많은 추억들이 떠올랐다.
'좋았는데'
하지만 금방 두 서너 페이지 넘기다가 그냥 덮었다. 찌질하게 이게 뭐란 말인가. 마누라는 바람나고 나는
혼자 앨범 보며 궁상떨고, 참 좆같기도 이렇게 좆같을 수가 없다. 앨범을 저 멀리 던져놓고 나는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이혼하고 나면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그냥 좆되는거지. 이 나이에 무슨 재혼이며 무슨
미래가 있을까. 그냥 우울증에 자살이나 안 하면 그만이지. 아니, 자살은 내가 왜 해? 내가 무슨 죄졌어?
그런데 이 시점에 오니까 기분이 참 묘한게, 아까 그 변호사의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 물론 어제는 멀쩡한 미니 컴퍼넌트를 아작낼 정도로 펄펄
뛰고 미친 지랄을 하긴 했다만, 그게 이미 내 화를 다 썻어내버렸는지 오늘은 솔직히 별로 화도 안 났다.
그냥 모르는 척 참고 지나가면 되지 않을까. 내가 봤을 때 마누라도, 아마 나와의 이혼까지 생각하고 불을
지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왠지 지나가는 바람에 한번 떡 집어먹은 것이겠지. 당장 진지하게 나랑 이혼
하고 그 새끼랑 살라고 하면 마누라 년도 답이 없겠지. 아무렴. 연봉 3천도 될까말까 한 새끼랑 무슨.
게다가 까놓고 말해서 나 역시 마누라에 대한 큰 애정이 있는건 아니잖는가. 허허.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밥이나 해주고 청소나 좀 하고, 돈이나 좀 벌어오고, 밤에 몸이나 좀 주면, 그거면 솔직히 난 됐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우리 부부의 결혼은 이렇게 참 의미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덧없고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다 허무했다.
'남들도 이렇게 살까'
그런데 또 그렇게 생각을 하니, 굳이 그렇다면 뭐하러 그런 애정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나 싶기도 하고,
까놓고 말해 내 연봉에 나 혼자 산다치면 까짓거 미래 걱정하면서 적금 그리 열심히 안 부어도 되고 뭐
집도 원룸으로 옮긴다 치고 그러면 얼마든지 화려하게 살 수 있지 않는가 싶기도 했지만
'것도 하던 놈이나 잘하는거지'
영업부 김대리 봐라. 이혼하고 이제 독신 귀족 될거라고 자신있게 소리치더만 하루하루 사람이 찌질해
지고 망가지지 않던가. 남자는 아무래도 나이가 먹으면 여자가 필요하긴 한 거 같다.
"갑갑하구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대뜸 휴대폰을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회의도 잦고
이래저래 낮 시간대에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지 않게 된지 거의 반 년째. 참 오래간만에 평일 대낮에
아내에게 전화다. 그렇구나. 이런 부분에서 우리 부부관계는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구나.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두루루루루-
하지만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전화를 슥 밀어놓고, 침대에 누웠다.
"그렇구만"
뭐가 그렇다는건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겠지만 어쨌근 그렇게 한 마디를 던져놓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