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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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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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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들 셋과 저녁으로 갈비를 뜯고 있노라니 대학동창인 보성이한테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집 근처지. 약속은 내일인데.

"우리 내일 보기로 한 거 아니었어?"
"문자 보냈잖아. 오늘 8시에 보기로. 너도 답장 응 하고 보내놓구선"
"그래? 아 씨, 나는 걍 시간만 바뀐 건 줄 알았지. 알았어, 그럼 일단 조금 이따가 다시 연락할께"
"야야야, 장소도 바뀌었어, 신림에서 보는 걸로"
"알았어"

전화를 끊고 문자를 확인해보니 정말이다. 시간만 바뀐게 아니라 날짜까지 오늘 보는 걸로 물어보는 문자
였다. 아 대충 오케이하고 보냈더니만…

"오빠 뭐 다른 약속 있어요?"

주연이가 묻는다.

"어, 아까 말했잖아. 일본으로 이직하는 친구 있다고. 내일 보기로 한 줄 알았는데 오늘 약속이네? 어떡하지?"
"정말요?"
"아 오빠 그렇다고 설마 우리 두고 다른 사람 만나러 가는거에요? 실망이야"

옆에 있던 수정이도 짖궂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서운함을 드러낸다. 약속이 겹쳤다. 보통의 경우라면 난 
여자 친구들이 우선이지만(사내 새끼들이야 나중에 따로 거하게 술 한잔 하면 그만 아닌가)  오늘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다. 이래저래 요즘 많이 안 좋았던, 아주 친했던 대학동창이 겨우 일이 조금 풀려 일본으로 이직을
하게된 것. 그 송별 겸 축하 모임이라 빠지는 것이 조금 그랬다. 시간적 여유라도 있다면 나중에 따로 밥이
라도 먹겠지만 당장 이번 주에 출국이라…

"뭐 당장 가는 건 아니고, 천천히 가도 되니까 일단 먹고 놀자"



갈비를 다 먹고 근처 커피빈에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너무 배가 불러 물 한 모금 못 넘기겠구만 얘들은 또
커피 한잔씩을 잘도 마신다. 확실히 디저트에 관한한 여자애들의 식욕은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데가 있다.

"나 요즘 확실히 나이를 먹긴 먹었나 봐. 입이 짧아졌어"

수정이는 그런 나를 보며 부럽다고 했다. 부럽기는. 배 부르다고 안 먹는게 아니니까 문제. 여튼 이윽고 올
여름 각자의 휴가 계획과 놀이공원 약속, 워터파크 같이 갈까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시간을 확인
하니 9시 반. 고기 먹느라 온 몸에 갈비 냄새 풍길테니,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또 약속장소까지 갈
생각하면 슬슬 일어나야 될 시간이다.

"미안, 다들 오늘 재밌게 놀고 나 먼저 일어날께"

미나도 "아 박스 오빠가 우리 두고 남자 만나러 간다" 하고 짖궂게 한 마디 했지만 모두들 조만간 또 보자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샤워부터 하고 싶었지만 너무 약속시간에 늦게 가는
것도 그렇고, 아마 그리 늦게 끝날 모임도 아니라 서둘러 옷만 갈아입고, 가볍게 향수 좀 살짝 뿌리고 집을
나섰다.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익숙한 범수의 바이크가 보였다. 모인 것은 나까지 넷이었다.

범수, 진우, 보성, 그리고 나.

범수를 제외한 둘은 이미 적당히 마신 듯 했고, "간만이다 얘들아" 하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 착석한 나. 지들
끼리 먼저 했겠지만 뒤늦게 다시 한번 근황을 주고받은 나. 범수는 여전히 H모 미제 바이크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진우는 IT회사 개발직으로 일하다가 얼마 전 이직했는데, 아무래도 똥 밟은 느낌이라며 재이직을
고려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 보성은 K모 자동차 하청공장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얼마 전 계약 만료에 재계약 불가통보
받고 백수가 될 처지에 마침 알고 지내던 분 덕분에 뜬금없이 일본 회사로 낙하산 이직을 하기로 했단다.

"야 근데 진짜 씨발 요즘에 일본 가는건 좀 그렇지 않냐? 다시 잘 생각해보지"
"아 몰라, 가서 방사능 쐬다 병신되나, 여기서 백수로 빌빌 기다 자살하나 매한가지야"
"너 지금도 생긴거 좆같은데 방사능 쬐고 아주 진짜 괴물 되는거 아냐?"
"아 개새끼야ㅋㅋ"

…대학친구. 그것도 30대 이후에 다시 모처럼 모이니 어느새 슬슬 각자의 입장과 위치가 갈리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다들 모처럼에 보는 얼굴들이다 보니 반가웠다.

"범수 너는 갈수록 멋있어지네. 밖에 바이크는 할부 다 끝나가냐?"
"아 미치겠다. 아니, 아직 멀었지. 야 한달에 저거 할부금만 180만원씩 나가. 미친다니까. 자차보험은 천만원.
아주 씨발 사지 말라는 얘기야"
"니네는 직원 할인가 이런거 없어?"
"무이자 할부. 여직원들은 그래서 막 50개월로 끊고 그래"
"50개월 무이자 할부, 야 뒤진다" 

기천만원짜리 고가의 바이크. 게다가 국내에는 3대 밖에 없는 모델이란다. 한 대는 미중년 중년배우 D씨,
한대는 자기, 한대는…

"그럼 남은 한 대는?"
"그냥 일반인. 몰라 뭔 아저씨야"


내가 오기 직전 시킨 순대볶음을 먹고, 게눈 감추듯 10분 만에 먹어치운 우리는 다시 2차로 장소를 옮겼다.
사실은 일하고 온 터라 피곤하기도 피곤한데다, 이미 저녁을 갈비로 양껏 배 채운 다음이라 졸음도 오고,
다른 애들과 달리 현충일에도 근무가 있는 나는 꽤 피곤했다. 일단 2차로, 우리는 치킨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너 원래 다니던 회사 괜찮지 않았냐?"
"아 그럼. 솔직히 내가 어디가서 월 350씩 받고 일하겠냐? 내 주제에"
"거기 수당 쎄네"
"야간 알바들도 시급 만 천원 막 이래"
"거기야말로 무슨 시급이 일본 회사급이네. 그나저나 일본 가면 너 잘 데는 있냐?"
"다음 달부터는 회사 기숙사에서 살던지 아니면 근처에서 자취하면 그만이고, 당장은 아는 사람 집에서
기생하려고"
"누구?"
"아 나 거기 꽂아준 여기 아는 분이, 그 사람이 일본 사람이란 말이야. 마누라도 한국에 있고. 근데 그 아들
둘은 그냥 일본 집에서 사는데, 방이 하나 남는대. 당분간은 그래서 거기서 살기로 했지"
"어디로 가는데? 도쿄?"
"오사카"
"오사카면 어디 좀 뭐, 안전한 데야?"
"뭐 어디가 안전하겠냐만 후쿠시마에서 도쿄보단 멀어"


또 이제 이야기는 일본 이야기, 일본 여자 이야기, 일본 풍속업소 이야기로 돌고 돌다가 문득 범수가 휴대폰
에서 800만 관객의 흥행작 영화 S에 출연한 바 있는 영화배우 M양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어? 와, 대박. 어떻게 찍은거야?'
"아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영화 협찬 존나 한단 말이야. 그때 바이크 가르쳐주면서 찍었지"
"야 졸라 이쁘지?"
"아냐 근데 실제로 보니까, 머리가 진짜 내 주먹만하긴 한데, 얼굴은 존나 플라스틱이야. 성괴 성괴"
"그래도"
"두 번째 볼 때 오빠라고 하니까 좋긴 좋더라"
"아 씨발 여배우한테 오빠 소리 듣고, 아 좋네 진짜"

범수가 연예계 협찬쪽 일도 담당하다보니 연예계,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들이 많았다.

"근데 이 아저씨는 또 누구야? 연예인은 아닌데"
"아 H자동차 전무. 이 일이 좋은게, 우리 고객들은 쩌리들이 아니잖아. 다 유명인 아니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아냐. 인맥의 질이 달라진다니까. 하기사 뭐 인맥이랄 것도 없지. 이 사람들이 나를 뭐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겠냐, 여튼. 근데 진짜 멋있는 사람들 많아. 부자들이 역시 뭘 즐길 줄 알더라고. 나이 막 50먹은 사람
들이 여가시간에는 우리 회사 바이크 끌고 라이딩 다니고 그래"

휴대폰 사진을 넘기면서 보다보니 영화배우 사진에다 탤런트, 올림픽 메달리스트 사진까지 있었다.

"어? 이 사람 어디서 봤는데"
"체조선수 있잖아"
"아, 맞다. 이 사람은 지금 뭐한데?"
"Y대 교수로 있어. 그냥 잠깐 우리 회사에 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딱 보고 어? 하고 같이 사진
찍었지"

그러다가 또 다음 장에 유명인이 있었다.

"오 P도 있네"

그러자 할 말이 많다는 듯 범수가 웃으며 이야기 했다.

"아 이 사람, 대박이야. 야 씨발 잘나가는 가수에다가 연예 매니지먼트 싸장님 아냐? 영화 촬영 때문에
우리가 그 영화 T에도 나오는 바이크를 협찬해줬단 말이야. 이렇게 타는거. 졸라 멋있는거. 여튼 이거
협찬해주면서 바이크도 가르쳐주는데, 아 잘 타더라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고"

그 즈음해서 아까 시킨 후라이드 치킨이 아직도 안 나와서 내가 살짝 클레임을 걸었더니 알바생이 당황
하면서 확인하고는 "아 죄송합니다. 금방 내오겠습니다" 하면서 굽신댄다. 씨발 어째 너무 늦더라니
주문이 아예 안 들어갔다. 사내 넷이 뻥튀기만 씹으면서 계속 썰을 풀어나간다.

"아니 근데, 그래서 나는 진짜 그거 사줄 줄 알았어. 아 그래 뭐, 부자들이 검소한거, 좋지. 안 살 수도
있지. 근데 씨발 뭐라는 줄 알아? 딱 이제 협찬 끝나고 나니까 이러는거야.

'내가 타고 다니면, 그게 내 사회적 위치로 봤을 때 홍보도 되고 그럴테니까, 이거 달라'

아 미친 새끼 아니야? 지가 무슨 탐 크루즈쯤 돼? 여튼. 당연히 안되는데, 회사에 알아본다고는 말했지.
알아보니 회사에서 당연히 안된다고 그러지. 당연히. 그래서 이제 매니저한테 전화해서 안된다니까
매니저가 전화기 저 편에서 딱 P를 부르면서 그러는거야.

'혀엉~ 안된다는데? 어떻게 해?'

그러니까 전화기 저 편에서, 다들려. 여튼 P가 딱

'공짜 아니면 안 산다고 그래~'

하고 말았지. 씨발"

범수의 말에 우리는 다들 실소를 흘렸다.

"아 존나 간지인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니네"
"양아치네 완전"
"연예인들이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연예인이 다 그렇다는 말에 범수가 또 아니란다. 예능프로 N에 나오는 개그맨 K는 또 그렇게 사람이
좋을 수가 없단다.

"난 진짜 아, 사람이 이래서 이 사람이 한때 그렇게 잘나갔구나 싶더라니까. 진짜 꼬바꼬박 깍듯하게 대하고
아 정말 사람 매너있어"
"아, 그 방송에서 바이크 타기 그 편?"
"어어. 한번 떨어지고 다음에 바로 잘 타더라"

어느새 시간은 12시를 지나고 있었고, 늦게 나온 치킨을 후다닥 다 비워내고도 한참을 더 수다를 떨던 우리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여튼 일본 잘 다녀오고, 가서 자리 잡으면 연락해라"
"그래"
"조만간 또 보자"
"어어 잘 들어가라"

쏟아지는 피곤함에 눈꺼풀을 겨우 붙잡으며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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