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반.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고… 그때가 되도록 하루종일 하다못해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미치도록 화가 났고, 배가 고팠다.
'침 뱉은 우물에 가서 물 긷는 기분이구만'
아까 홧김에 던져놓은 냄비에 물을 받아 라면을 끓여 먹고는, 밥이 없어 찬장을 뒤져 햇반을 뜯었다.
김치 쪼가리 하나 없이 그대로 라면에 꾸역꾸역 말아먹었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 맛도 없었건만 그냥
왠지 허기가 졌다. 아니아니, 무엇이라도 입 속에 쳐넣어야 했다. 가슴인지 뱃 속인지 둘 중 하나가 정말
미치도록 공허했으니까.
'후우'
뭐 하나 되는 것이 없다. 급하게 쳐먹은 것이 얹혔는지 저녁이 되도록 속이 꺼지지도 않고 헛트름만 계속
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를 하염없이, 밑도 끝도 없이 한숨만 계속 쉬며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길게 한숨을 쉬며 TV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아 불륜, 바람난 아내, 이혼 같은 키워드로 온 포털을
다 뒤지고 다녔다.
"에효"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글이 별로 없었다. 하기사 무엇에 대한 도움 말인가? 이혼에 대한 도움인지, 아니면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도움인지도, 아직 나 자신조차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컴퓨터 앞에서 맴맴 돌다가 아직도 부른 배를 안고 방의 모든 불을 다 끄고는 침대에 누웠다. 연애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조금 떠올리다가, 씨발, 하는 욕 한마디를 내뱉고는 나는 그렇게 부른 배에 힘입어 금방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으음, 여보세요?"
"잤어?"
아내의 전화였다. 기가 막힌 것은, 잠결에 일어나 받은 전화 속의 발칙한 그 목소리가 왜 그리도 반가운 것
인지. 한심한 놈.
"어, 조금 일찍 잤어. 지금 들어오는거야?"
어쩌면 아내 목소리를 듣고나서 그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픈 바보같은 충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때 아내가 10시 이전에만 들어온다고 했으면 난 어쩌면 아내의 불륜을 한번쯤은 모르는
척 눈 감아줬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그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무척이나 맑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다 꿈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인생지사 일장춘몽 아니겠는가, 살면서
일탈 한번 없는 사람이 어디있나, 하고 억지로 참아넘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그 씁쓸한 자기기만의
기회조차, 아내는 저버리고 말았다.
"어? 아니, 나 조금 늦을 거 같다구. 저녁은 먹었어?"
늦을거 같다라…
"어, 라면 먹었어"
아내의 전화가 그토록이나 반가웠던만큼 나는 아내의 늦을 거 같다는 통보가 그렇게나 실망스러웠고, 겨우
잦아든 나의 짜증과 분노는 새삼 다시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지금 전화론 무엇이라 말할 명분이 없었다.
그저 간신히 감정을 꾸역꾸역 누르면서 아내의 별 의미없는 질문에 라면 먹었다는 한심스러운 대답을 할
따름이었다.
"뭐라도 그냥 시켜먹지 그랬어. 알았어 하여튼 이따 들어갈께. 피곤하면 먼저 자"
"…알았어"
전화를 끊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 10시 11분… 얼마를 더 늦을 것일까. 전화를 끊은 나는 씨팔조팔을
찾으며 미친듯이 아내를 욕했고,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배게에 머리를 대었다.
차라리, 잠자는 것이 속 편했다.
아내는 새벽 1시 반이 넘어서 들어왔다. 문소리와 신발 벗는 소리,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슬몃 눈을 뜬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러고보니 돌아오면서 전화도 안 했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남자랑 있었을텐데 나한테 어떻게 전화를 하겠는가.
'아니 무엇보다'
괘씸했다. 시간이 너무하지 않은가. 무슨 놈의 아줌마 동창 모임이 새벽 1시를 넘겨서 파한단 말인가. 이것은
아예 더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내 코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실 문 밖에서 말했다.
"이제 온거야?"
…아내는 듣지 못했지만 두어번 내가 더 묻자 그제서야 "어? 어어. 일어났어? 에이 더 자지. 내가 깨웠네"
하고 대꾸했다. 철면피라도 깐 것일까. 난 더이상의 대화를 하는 대신 아내가 벗어놓은 가디건과 가방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아내의 휴대폰을 꺼냈다.
'허허'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허허, 참. 결혼 3년차 유부녀의 휴대폰에 비밀번호가 걸린다는 사실도 웃기지만,
그거야 직장생활하는 여자니까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갑자기 또 바뀌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길게 콧바람을 내쉬며 가방 속에 다시 휴대폰을 넣어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가방 속 구석에
몰래 장치해두었던 도청기를 꺼내어 침대 옆 협탁 마지막 서랍에 숨겨넣었다.
이 도청기가, 내일 모든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아내는 씻고 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
"자?"
자는 척을 할까, 아니면 대꾸를 할까 망설이다가 나는 말했다.
"안 자"
아내는 살포시 웃었다.
"오늘 하루종일 뭐했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년아. 하지만 나는 욕설 대신 자상하게 대답을 했다.
"그냥 하루종일 집 지켰지"
"수고했네 우리 남편"
아내의 흐뭇해하는 목소리가, 그토록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그 더러운 목소리가… 왜 그저 나는 이리도
반갑단 말인가.
"우리 여보는 하루종일 뭐했나"
나같은 놈을 세상 사람들은 호구라고 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종일, 친구들이랑 놀았지. 몇 년 사이 다들 많이 늙었더라"
허허, 저 씁쓸해하는 목소리 좀 보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일세.
"그래? 우리 마누라는 하나도 안 늙었는데"
나는 그토록이나 가식적인 그 말과 함께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이건 내꺼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유아적이라 미친듯이 속으로 나를 비웃었지만 표정을 내보
이지는 않았다. 마누라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
우리? 너와 나 사이가 '우리'라고 불러도 정말 좋은 사이일까.
"우리 뭐?"
나는 마음 속의 목소리와는 달리 너무나 자상한 목소리로 아내의 가슴을 그렇게 손에 쥔 채로 물었다.
아내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아니야" 하고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두어번 더 캐물었지만 아내는 끝내
대답 대신 그저 가슴에 얹은 내 손을 밀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 역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밥 차려놨어, 챙겨먹고 자꾸 라면 같은거 먹지 마"
아침부터 아내는 또 어디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설마 이틀 연속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건가 싶어
기가 차서 어디가는 거냐고 묻자 아내는 친정에 간다고 했다. 버럭 의심이 들었지만 마침 걸려온 아내
친정에서의 장모님 전화로, 그 말은 진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화가 누그러졌고, 또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제의 아내 가방 속 도청기 내용을 확인할 기회가 왔으니까.
아내가 떠나자 나는 잽싸게 도청기를 꺼내들고 컴퓨터 앞으로 가서 USB 케이블을 연결한 후 그 전용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녹음파일 자체는 흔한 MP3 파일로 녹음되었지만 GPS 내장 도청기답게 전용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이동경로가 화면에 구글 맵과 연동되어 표시되었다.
"으음"
GPS 이동경로에는 아내가 상수동 까페골목을 지나 한정식집, 그리곤 신촌의 모텔 밀집지역으로 향하는
루트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물론 메뉴얼도 그렇고 프로그램상에서도 GPS정보는 기본 15m, 최대
100m 가까운 오차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아줌마들 모임이라고는
해도 한 장소에서 8시간 이상 앉아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두 년놈들이 체력도 좋구만'
일단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믿기로 했다. 30분 간격으로 끊겨서 녹음된 MP3 기록은… 생각보다 음질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도청기를 가방 속에 넣어놓아서인지 일단 녹음된 소리가 너무 작았다. 초반부, 아내의
이동 도중에 녹음된 내용들은 그저 길거리의 차소리와 가방 속 잡동사니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흐음'
하지만 곧 택시에 올라타고 주변 소음이 작아지자 그제서야 작게나마 아내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실까요"
"합정…쪽으로 …주세요"
"네"
그 다음은 그저 계속 차 소리 뿐. 별 소득없이 첫 번째 파일을 그렇게 띄엄띄엄 확인을 완료했고, 두 번째
세 번째 파일에서도 주변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확인이 어려웠지만, 이윽고 다섯번째 파일에서 드디어 난
확증을 잡았다.
"…말이야, …가 더 낫지 않을까?"
"그래요? 전 아무거나 다 좋아요"
차에 오른 아내. 그리고 옆에서 또렷하게 들리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 전 직장의 '그 놈'인지 어쩐지는
확신이 어려웠지만, 이윽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어쨌든 아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나 친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여섯 번째 파일 속에서, 나는 아주 가늘지만 분명히 확실한, 남녀의 은밀한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방을 침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는지 소리가 아주 작았지만, PC볼륨을 최대 볼륨으로
하고 스피커를 후진 음질의 싸구려 만원짜리 PC스피커가 아니라 몇 년째 TV선반 밑에 묵혀놓은 소니
미니 컴퍼넌트의 아웃풋으로 연결하자 그 소리는 미세하게나마 확실하게 들려왔다.
"아…으응…하아…으응…"
나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죄없는 미니 컴퍼넌트를 집어 벽에 던져버렸다. 손발이
다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덜덜덜 떨려왔다. 눈 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질 정도였고, 뒷머리가 지끈거렸다.
만약 내가 고혈압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내가 그토록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그 죄없는 미니 컴퍼넌트를
때려부수었다. 아니 죄가 있다. 아내가 사온 혼수니까. 그게 죄다. 이미 망가진 집기가 있다면 다른 죄
없는 집기를 때려부수는 것보다 그냥 망가진 것을 때려부수는 것이 차라리 싸게 먹히리라. 폭발하는
미친 분노 속에 유일한 이성이 있다면 그것 뿐이이었다.
미니 컴퍼넌트는 생각보다 잘 부서지지 않았다. 맨 손과 맨 발로는 오히려 내가 더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주먹이 아주 살짝 찢어져 피가 흐를 무렵에야 나는 공구상자에서 장도리를 들고 와서 그 미니 컴퍼넌트를
철저하게 박살내었다. 그 미니 컴퍼넌트에서 아내의 얼굴과,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어떤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친듯이 박살을 내었다.
쓰레기봉투에 그 잔해를 모두 담아 버리고, 찢어진 주먹은 한참 지혈을 하다가-그 작은 상처로 무슨 피가
그리도 많이 났는지- 반창고로 대충 감았다. 그리고 도청기 속 MP3 파일은 USB에 옮겨담았다. 욱신꺼리
는 주먹의 통증이 그야말로 내 안의 사그라드는 증오를 계속 불태우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
티를 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 왔어"
아내는 월요일의 출근을 감안해서인지 일찍 친정에서 돌아왔다. 친정에서 이것저것 밑반찬을 가져왔다.
특히 장모님 솜씨가 듬뿍 배인 그 맛 좋은 간장게장까지 들고 왔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식욕이 없다는
핑계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사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굶었다. 이 더러운 년과 그 년의 식구들 손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꼬르르륵-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친듯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먹었다가는 내 안의 분노가 다시 약해질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놈이었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화를 풀어버리는 놈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놈에게도 그리 오랫동안 악감정을 묻어두지 못하는, 천하에 병신같은 놈이다. 한때는 그것이 나의
큰 장점이라고 나를 속여왔다. 하지만 내 인생을 돌아보건데 그것은 모두 그저 나의 자기합리화에 불과
했다.
어쩌면 작금의 사태도, 그런 나의 모질지 못한 등신같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그 아내
친정의 그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나에 대한 벌이자, 와신상담이다.
그러자 기억 너머 묻어두었던 연애 초창기의 굴욕적인 기억들이 새삼 떠올랐다. 사내 연애였기에 티를
낼 수 없었고 몇 번인가 회식자리에서 아내에게 건내어지던 음담패설, 문제제기를 할 수위까지는 아니
었지만 분명히 내 입장에서는 짜증날 수 밖에 없던 회사 다른 남자들의 이런저런 대시… 내 입장에서
참 못 마땅하던 아내의 대처, 그러나 그 모두 입을 꾹 닫았던 나…모두 오늘의 복선이었을까?
항상 아내와 나는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합리화를 시켰다. 그리고 금방 나는 꿀꺽 화를 뱃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하하 웃어보였다. 어쩌면 지금 나의 행동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분명 나는 적당히 또 용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이번 일을 용서하면, 내 남은 인생이 너무나도 가여웠다. 결혼식 날 나는 나 자신과 다짐했다. 내 평생
가장 큰 선물을 오늘 나 자신에게 주었으니, 남은 인생은 이제 아내를 위해 봉사하자고.
…그런 다짐을 했던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세 끼를 굶어도 참을만했다. 분노의 힘이라는게 그런 것일까. 아내는 걱정이 되었
는지 몇 번이나 어디 몸 안 좋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어제부터 체끼가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대었다.
씨발년, 아주 가증스럽다. 당장이라도 공구상자에서 다시 장도리를 들고와서 잘 때 그녀의 머리통을,
광대뼈를, 눈을, 목을, 가슴을, 심장을 다 깨부수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아랫도리 함부러 놀리는 미친 바람난 마누라년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조질 생각은 없다. 그저 차분하게,
아니 내 안의 미친 악마를 겨우 억누르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보복이 될지 머릿 속으로 끝없이 생각
할 따름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물어보았다.
지금 이렇게, 바람 피운 마누라 옆에서 표정을 감추고 눈을 감는 것은 자기합리화가 아니냐고. 솔직히
답변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일 반차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변호사 사무실에
들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 계속 -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미치도록 화가 났고, 배가 고팠다.
'침 뱉은 우물에 가서 물 긷는 기분이구만'
아까 홧김에 던져놓은 냄비에 물을 받아 라면을 끓여 먹고는, 밥이 없어 찬장을 뒤져 햇반을 뜯었다.
김치 쪼가리 하나 없이 그대로 라면에 꾸역꾸역 말아먹었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 맛도 없었건만 그냥
왠지 허기가 졌다. 아니아니, 무엇이라도 입 속에 쳐넣어야 했다. 가슴인지 뱃 속인지 둘 중 하나가 정말
미치도록 공허했으니까.
'후우'
뭐 하나 되는 것이 없다. 급하게 쳐먹은 것이 얹혔는지 저녁이 되도록 속이 꺼지지도 않고 헛트름만 계속
나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TV를 하염없이, 밑도 끝도 없이 한숨만 계속 쉬며 들여다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길게 한숨을 쉬며 TV를 끄고 컴퓨터 앞에 앉아 불륜, 바람난 아내, 이혼 같은 키워드로 온 포털을
다 뒤지고 다녔다.
"에효"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 글이 별로 없었다. 하기사 무엇에 대한 도움 말인가? 이혼에 대한 도움인지, 아니면
다시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한 도움인지도, 아직 나 자신조차 확신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컴퓨터 앞에서 맴맴 돌다가 아직도 부른 배를 안고 방의 모든 불을 다 끄고는 침대에 누웠다. 연애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조금 떠올리다가, 씨발, 하는 욕 한마디를 내뱉고는 나는 그렇게 부른 배에 힘입어 금방
노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웅-
"으음, 여보세요?"
"잤어?"
아내의 전화였다. 기가 막힌 것은, 잠결에 일어나 받은 전화 속의 발칙한 그 목소리가 왜 그리도 반가운 것
인지. 한심한 놈.
"어, 조금 일찍 잤어. 지금 들어오는거야?"
어쩌면 아내 목소리를 듣고나서 그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고 픈 바보같은 충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때 아내가 10시 이전에만 들어온다고 했으면 난 어쩌면 아내의 불륜을 한번쯤은 모르는
척 눈 감아줬을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그 지끈지끈하던 머리가 무척이나 맑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다 꿈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인생지사 일장춘몽 아니겠는가, 살면서
일탈 한번 없는 사람이 어디있나, 하고 억지로 참아넘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그 씁쓸한 자기기만의
기회조차, 아내는 저버리고 말았다.
"어? 아니, 나 조금 늦을 거 같다구. 저녁은 먹었어?"
늦을거 같다라…
"어, 라면 먹었어"
아내의 전화가 그토록이나 반가웠던만큼 나는 아내의 늦을 거 같다는 통보가 그렇게나 실망스러웠고, 겨우
잦아든 나의 짜증과 분노는 새삼 다시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지금 전화론 무엇이라 말할 명분이 없었다.
그저 간신히 감정을 꾸역꾸역 누르면서 아내의 별 의미없는 질문에 라면 먹었다는 한심스러운 대답을 할
따름이었다.
"뭐라도 그냥 시켜먹지 그랬어. 알았어 하여튼 이따 들어갈께. 피곤하면 먼저 자"
"…알았어"
전화를 끊고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 10시 11분… 얼마를 더 늦을 것일까. 전화를 끊은 나는 씨팔조팔을
찾으며 미친듯이 아내를 욕했고,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는 다시 배게에 머리를 대었다.
차라리, 잠자는 것이 속 편했다.
아내는 새벽 1시 반이 넘어서 들어왔다. 문소리와 신발 벗는 소리,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슬몃 눈을 뜬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조소했다. 그러고보니 돌아오면서 전화도 안 했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남자랑 있었을텐데 나한테 어떻게 전화를 하겠는가.
'아니 무엇보다'
괘씸했다. 시간이 너무하지 않은가. 무슨 놈의 아줌마 동창 모임이 새벽 1시를 넘겨서 파한단 말인가. 이것은
아예 더이상 내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내 코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아아-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화장실 문 밖에서 말했다.
"이제 온거야?"
…아내는 듣지 못했지만 두어번 내가 더 묻자 그제서야 "어? 어어. 일어났어? 에이 더 자지. 내가 깨웠네"
하고 대꾸했다. 철면피라도 깐 것일까. 난 더이상의 대화를 하는 대신 아내가 벗어놓은 가디건과 가방을
들고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아내의 휴대폰을 꺼냈다.
'허허'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허허, 참. 결혼 3년차 유부녀의 휴대폰에 비밀번호가 걸린다는 사실도 웃기지만,
그거야 직장생활하는 여자니까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비밀번호가 갑자기 또 바뀌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길게 콧바람을 내쉬며 가방 속에 다시 휴대폰을 넣어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가방 속 구석에
몰래 장치해두었던 도청기를 꺼내어 침대 옆 협탁 마지막 서랍에 숨겨넣었다.
이 도청기가, 내일 모든 진실을 말해줄 것이다.
아내는 씻고 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
"자?"
자는 척을 할까, 아니면 대꾸를 할까 망설이다가 나는 말했다.
"안 자"
아내는 살포시 웃었다.
"오늘 하루종일 뭐했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다 이년아. 하지만 나는 욕설 대신 자상하게 대답을 했다.
"그냥 하루종일 집 지켰지"
"수고했네 우리 남편"
아내의 흐뭇해하는 목소리가, 그토록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그 더러운 목소리가… 왜 그저 나는 이리도
반갑단 말인가.
"우리 여보는 하루종일 뭐했나"
나같은 놈을 세상 사람들은 호구라고 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종일, 친구들이랑 놀았지. 몇 년 사이 다들 많이 늙었더라"
허허, 저 씁쓸해하는 목소리 좀 보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일세.
"그래? 우리 마누라는 하나도 안 늙었는데"
나는 그토록이나 가식적인 그 말과 함께 아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이건 내꺼라고.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유아적이라 미친듯이 속으로 나를 비웃었지만 표정을 내보
이지는 않았다. 마누라는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우리…"
우리? 너와 나 사이가 '우리'라고 불러도 정말 좋은 사이일까.
"우리 뭐?"
나는 마음 속의 목소리와는 달리 너무나 자상한 목소리로 아내의 가슴을 그렇게 손에 쥔 채로 물었다.
아내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아니야" 하고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두어번 더 캐물었지만 아내는 끝내
대답 대신 그저 가슴에 얹은 내 손을 밀어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 역시 더 캐묻지는 않았다.
"밥 차려놨어, 챙겨먹고 자꾸 라면 같은거 먹지 마"
아침부터 아내는 또 어디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설마 이틀 연속 남자를 만나러 나가는 건가 싶어
기가 차서 어디가는 거냐고 묻자 아내는 친정에 간다고 했다. 버럭 의심이 들었지만 마침 걸려온 아내
친정에서의 장모님 전화로, 그 말은 진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화가 누그러졌고, 또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제의 아내 가방 속 도청기 내용을 확인할 기회가 왔으니까.
아내가 떠나자 나는 잽싸게 도청기를 꺼내들고 컴퓨터 앞으로 가서 USB 케이블을 연결한 후 그 전용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녹음파일 자체는 흔한 MP3 파일로 녹음되었지만 GPS 내장 도청기답게 전용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이동경로가 화면에 구글 맵과 연동되어 표시되었다.
"으음"
GPS 이동경로에는 아내가 상수동 까페골목을 지나 한정식집, 그리곤 신촌의 모텔 밀집지역으로 향하는
루트가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물론 메뉴얼도 그렇고 프로그램상에서도 GPS정보는 기본 15m, 최대
100m 가까운 오차가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엉덩이 무거운 아줌마들 모임이라고는
해도 한 장소에서 8시간 이상 앉아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두 년놈들이 체력도 좋구만'
일단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믿기로 했다. 30분 간격으로 끊겨서 녹음된 MP3 기록은… 생각보다 음질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도청기를 가방 속에 넣어놓아서인지 일단 녹음된 소리가 너무 작았다. 초반부, 아내의
이동 도중에 녹음된 내용들은 그저 길거리의 차소리와 가방 속 잡동사니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흐음'
하지만 곧 택시에 올라타고 주변 소음이 작아지자 그제서야 작게나마 아내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디로 …실까요"
"합정…쪽으로 …주세요"
"네"
그 다음은 그저 계속 차 소리 뿐. 별 소득없이 첫 번째 파일을 그렇게 띄엄띄엄 확인을 완료했고, 두 번째
세 번째 파일에서도 주변 소음이 너무 시끄러워 확인이 어려웠지만, 이윽고 다섯번째 파일에서 드디어 난
확증을 잡았다.
"…말이야, …가 더 낫지 않을까?"
"그래요? 전 아무거나 다 좋아요"
차에 오른 아내. 그리고 옆에서 또렷하게 들리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 전 직장의 '그 놈'인지 어쩐지는
확신이 어려웠지만, 이윽고 나누는 대화 속에서 어쨌든 아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최소한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만나 친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여섯 번째 파일 속에서, 나는 아주 가늘지만 분명히 확실한, 남녀의 은밀한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가방을 침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는지 소리가 아주 작았지만, PC볼륨을 최대 볼륨으로
하고 스피커를 후진 음질의 싸구려 만원짜리 PC스피커가 아니라 몇 년째 TV선반 밑에 묵혀놓은 소니
미니 컴퍼넌트의 아웃풋으로 연결하자 그 소리는 미세하게나마 확실하게 들려왔다.
"아…으응…하아…으응…"
나는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죄없는 미니 컴퍼넌트를 집어 벽에 던져버렸다. 손발이
다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덜덜덜 떨려왔다. 눈 앞이 순간적으로 흐려질 정도였고, 뒷머리가 지끈거렸다.
만약 내가 고혈압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내가 그토록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그 죄없는 미니 컴퍼넌트를
때려부수었다. 아니 죄가 있다. 아내가 사온 혼수니까. 그게 죄다. 이미 망가진 집기가 있다면 다른 죄
없는 집기를 때려부수는 것보다 그냥 망가진 것을 때려부수는 것이 차라리 싸게 먹히리라. 폭발하는
미친 분노 속에 유일한 이성이 있다면 그것 뿐이이었다.
미니 컴퍼넌트는 생각보다 잘 부서지지 않았다. 맨 손과 맨 발로는 오히려 내가 더 상처를 입을 뿐이었다.
주먹이 아주 살짝 찢어져 피가 흐를 무렵에야 나는 공구상자에서 장도리를 들고 와서 그 미니 컴퍼넌트를
철저하게 박살내었다. 그 미니 컴퍼넌트에서 아내의 얼굴과, 아내와 바람을 피우는 '어떤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친듯이 박살을 내었다.
쓰레기봉투에 그 잔해를 모두 담아 버리고, 찢어진 주먹은 한참 지혈을 하다가-그 작은 상처로 무슨 피가
그리도 많이 났는지- 반창고로 대충 감았다. 그리고 도청기 속 MP3 파일은 USB에 옮겨담았다. 욱신꺼리
는 주먹의 통증이 그야말로 내 안의 사그라드는 증오를 계속 불태우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
티를 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 왔어"
아내는 월요일의 출근을 감안해서인지 일찍 친정에서 돌아왔다. 친정에서 이것저것 밑반찬을 가져왔다.
특히 장모님 솜씨가 듬뿍 배인 그 맛 좋은 간장게장까지 들고 왔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식욕이 없다는
핑계로 저녁을 먹지 않았다. 사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굶었다. 이 더러운 년과 그 년의 식구들 손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꼬르르륵-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친듯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먹었다가는 내 안의 분노가 다시 약해질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놈이었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화를 풀어버리는 놈이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놈에게도 그리 오랫동안 악감정을 묻어두지 못하는, 천하에 병신같은 놈이다. 한때는 그것이 나의
큰 장점이라고 나를 속여왔다. 하지만 내 인생을 돌아보건데 그것은 모두 그저 나의 자기합리화에 불과
했다.
어쩌면 작금의 사태도, 그런 나의 모질지 못한 등신같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그 아내
친정의 그 음식들을 먹을 수가 없다. 이것은 나에 대한 벌이자, 와신상담이다.
그러자 기억 너머 묻어두었던 연애 초창기의 굴욕적인 기억들이 새삼 떠올랐다. 사내 연애였기에 티를
낼 수 없었고 몇 번인가 회식자리에서 아내에게 건내어지던 음담패설, 문제제기를 할 수위까지는 아니
었지만 분명히 내 입장에서는 짜증날 수 밖에 없던 회사 다른 남자들의 이런저런 대시… 내 입장에서
참 못 마땅하던 아내의 대처, 그러나 그 모두 입을 꾹 닫았던 나…모두 오늘의 복선이었을까?
항상 아내와 나는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자기합리화를 시켰다. 그리고 금방 나는 꿀꺽 화를 뱃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다시 하하 웃어보였다. 어쩌면 지금 나의 행동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일
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분명 나는 적당히 또 용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이번 일을 용서하면, 내 남은 인생이 너무나도 가여웠다. 결혼식 날 나는 나 자신과 다짐했다. 내 평생
가장 큰 선물을 오늘 나 자신에게 주었으니, 남은 인생은 이제 아내를 위해 봉사하자고.
…그런 다짐을 했던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세 끼를 굶어도 참을만했다. 분노의 힘이라는게 그런 것일까. 아내는 걱정이 되었
는지 몇 번이나 어디 몸 안 좋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저 어제부터 체끼가 있는 것 같다고 둘러대었다.
씨발년, 아주 가증스럽다. 당장이라도 공구상자에서 다시 장도리를 들고와서 잘 때 그녀의 머리통을,
광대뼈를, 눈을, 목을, 가슴을, 심장을 다 깨부수고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었지만 꾸욱 참았다.
아랫도리 함부러 놀리는 미친 바람난 마누라년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을 조질 생각은 없다. 그저 차분하게,
아니 내 안의 미친 악마를 겨우 억누르면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보복이 될지 머릿 속으로 끝없이 생각
할 따름이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물어보았다.
지금 이렇게, 바람 피운 마누라 옆에서 표정을 감추고 눈을 감는 것은 자기합리화가 아니냐고. 솔직히
답변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내일 반차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변호사 사무실에
들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