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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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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생각보다 여친은 반갑게 나를 맞이하였다. 불과 며칠 전의 그 냉랭한 목소리도, 아니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고 밝고 생기있는 듯 하였다. 다행이다. 화가 풀린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행여나 오늘까지도 냉전 태세면 어쩌나 했는데. 내일 월요일부터는 3일간 지방출장이라 만약 오늘까지도
화해가 안되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밥 먹었어?"
"아니 안 먹었어. 너는?'
"나두. 라면 먹을래 그냥?"
"어"
"알았어"

냄비에 물을 올려 끓이기 시작하는 그녀. 그리고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서는 나. 며칠 안 봐서 그런지
왠지 새롭다. 흐음.

'에이'

하얀 이불보 위에 보이는 꼬불꼬불한 털 하나. 귀여우면서도 민망해서 피식하고 슥 집어서 휴지통에 쏙
넣었다. 

"계란도 먹을거야?"
"아니"

나 라면에 계란 안 넣는거 알면서 물어보냐, 속으로 픽 웃곤 책상 위에 따놓은 과자봉지 속 눅눅한 하나를
집어먹는다. 

"왠일로 니가 과자를 다 먹냐? 생전에 싫어하면서"
"어? 어…그냥. 먹고 싶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 위에 반쯤 몸을 뉘였다. 다행이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다시 돌아온 것 같다.
좋아. 어차피 이번 달에 보너스도 받고 하니까, 출장 다녀오는 길에 선물이나 하나 해주고, 다음 주에 휴가
내서 여행이나 다녀와야겠다. 

"아이 참, 나 라면 끓이면 누워있지만 말구 좀 김치랑 그릇이랑 이런 것 좀 챙겨"
"어? 어 알았어. 쏘리"

그래, 잘해주자 잘해줘. 며칠 전에 싸운 것도 이런 사소한 나의 게으름 때문 아니었나. 자극하지 말자. 얼른
일어나 식탁, 아니 식탁이랜다. 내가 사준 밥상을 펴고, 행주를 들어 그 위를 한번 훔치고, 일단 냉장고를
열어서 김치를 꺼내고…

"으, 냉장고 정리 한번 해야겠다. 냄새나는데? 안에 성에도 엄청 끼었고"

내 말에 그녀는 "아 지적하지마, 해줄 것도 아니면" 하고 작은 짜증을 부렸고, 나는 "아니 그냥"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 괜히 건드리지 말자. 

국그릇 두 개를 세팅하고, 수저 두 벌을 물에 행구고… 컵이…

"컵이 어디갔냐?"
"아, 잠깐만"

여친은 침대 맡에서 머그잔 두 개를 가져왔다. 

"먹고 안 닦아놨네. 닦아줘"

그리고는 냄비 뚜껑을 열고 긴 나무 젓가락으로 면발을 휘휘 저었다. 나는 컵을 씻으며 조금 표정이 굳었다.

'컵이 두 개네. 둘 다 커피 마신거고'

에이 그냥, 하루 마시고 다음 날로 마시고 뭐 그런 거겠지. 미친 새끼.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맛있다"
"배고팠나부네"
"어"
"먹고 밥도 먹어. 밥 있어"
"밥 있어? 왠일이래"

후룩후룩 면발을 정신없이 흡입한다. 

"천천히 좀 먹어. 그러다 저번에처럼 또 체할라구"
"웅"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이 무슨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며칠 전에 전화로 싸울 때, 다 관두자는 말을
그녀의 입에서 듣고 하늘이 무너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려 새벽 4시까지, 아주 지치고 기나긴 전화
끝에 겨우겨우 '전화 이별'이라는 최악의 상황만큼은 막았지만 내심 이별까지도 준비를 해야겠다, 
싶을 정도로 그녀는 마음을 접은 듯 보였으니까. 

그래서 지금 다시 이렇게 복구된(?) 관계가 새삼스럽다. 은근하게 방을 둘러보다가 책장 구석, 화병에
꽃힌 꽃을 보고 말했다. 

"왠 꽃? 이쁘네"

왠 꽃, 하고 말했다가 뉘앙스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얼른 뒤에 이쁘네, 하고 말을 덧
붙였다. 여친은 "그냥. 길가다가 샀어. 맨날 빈 화병만 덩그러니 있는 것도 그래서" 하고 대답했다.

"그보다, 밥 더 안 먹어?"
"아니 먹어"
"그럼 내 밥도 좀 퍼줘"
"알았어"
"아주 조금만"

그녀의 그릇까지 들고 슥 일어섰다. 주걱이 또 안 보이네. 어딨지? 두리번 거리다가 그냥 새 숟가락
으로 퍼야겠다 하고 밥통을 열자 그 안에 주걱이 있었다. 

'흐음'




밥을 다 먹고 설거지는 내가 했다. 그녀는 TV를 켰고 나는 수세미로 그릇들을 닦기 시작했다. 왜 이러는
것일까.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왜 내 안에 자꾸 이런 의심이 무럭무럭 들까. 

언젠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밥통 안에 주걱 좀 넣어놓지 말라고 크게 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환경호르몬이 어쩌네 하면서 툴툴대던 그녀. 당시 나는 TV에 나오는 뭐 그런 침소봉대
하는 건강 다큐 같은 거 좀 고만 보라면서 적당히 웃으면서 대꾸했지만 바로 그게 그녀의 짜증을 발칵
건드려서 참 별 거 아닌 걸로 하루종일 기분 망친 적도 있었지. 

그런 그녀다. 물론, 그냥 별 거 아니고, 피곤하고, 요 며칠 나랑 냉전하느라 오만사 다 귀찮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자 끝이 없다. 

생각해보면 밥통에 밥이 있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사 초창기에야 처음하는 자취생활이랍시고 
밥도 해먹고 이것저것 해먹는 듯 했지만 요 근래 한동안은 그녀의 회사 일 관계로 밥에서 먹을 일도
별로 없었을테고 그리고 오늘 내가 미리 온다는 언질도 한 적이 없는데.

아니다 냉장고 속의 이런저런 요리용 식재료들은 그게 언제가 됐던 하여간 장은 봤다는 소리고 그렇
다면 요리를 요 얼마간 해먹긴 했다는 소리다. 오케이.

"이번 주에는 야근 안 했어?"
"어, 섬상 모비스쪽 일 끝나서 당분간 좀 한가해" 
"아하 그렇구만"


하지만 머릿 속에서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래, 차라리 까놓고 그녀가 맨날 야근만 했다면 그게 오히려
안전하기는 더 안전한 거 아닌가. 남친이랑 크게 싸우고 소원해진 상태에서, 모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회사 프로젝트도 끝나고 모처럼의 여가 시간도 생겼는데…

'그래, 만약 그랬다고 치자. 그럼 누구?'

힐끔 그녀를 바라보자 때마침 그녀는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게임 하나? 싶었지만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것이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는 모양이다. 아, 진짜 나 큰일이다. 다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
한다. 후우. 



"우리 뭐할까?"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와 그녀의 옆에 나란히 누운 나. 그녀는 TV를 보며 나의 물음에 시큰둥하게 대답
했다.

"글쎄"
"영화라도 볼까?"
"뭐 있는데"
"우먼인블랙3도 있고, 돈의 힘, 내 처제의 모든 것… 뭐 이 정도? 우먼인블랙3 볼까?"
"별로 재미없을 거 같애"

흐음. 나는 나란히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 한쪽 끝을 그녀의 발에 가져다 대었다. 그녀가 가만히 
있자 나는 그 발을 또 비볐다.

"아 왜 그래"
"진희야"
"왜"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고, 또 몸을 포개…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나를 밀쳐내었다.

"아 이러지마. 나 아직도 화 다 안 풀렸어"

화가 다 안 풀렸지만 밥은 같이 먹으면서 섹스는 같이 하지 않는 여자들의 심리가 남자로서는 그저
한없이 아쉬울 따름이지만 어쩌랴. 싫다는걸. 

"흠, 여튼, 그럼 뭐, 잠깐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나갈까?"
"싫어 피곤해"

아까 밥 먹을 때만 해도 나름 훈훈해졌던 분위기가 금새 식어버린 느낌이다. 음. 멋적어 방을 스윽 또
둘러보노라니 그러고보니 왠지 낯설다. 그냥 눈이라도 붙일까. 그러고보니 밥을 먹고 난 이후라 그런
지 잠이 솔솔 온다.

"나 잠깐 잘께. 너무 피곤하다"
"자러 왔어? 아 그럴거면 집에 가서 자"
"5분만"

나의 말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럼 배게 이거 써. 그거 안 빤거야" 하고 새로 빤 배게를 내어
준다. 

"빨려면 두 개 다 빨지 하나만 빠는건 뭐냐? 으이구"
"아 몰라"

여친은 다시 손에 휴대폰을 들고 조물딱 거린다. 나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든다. 그래, 잠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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