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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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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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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압구정의 피프티에서 경희를 기다리며 대낮의 시원한 하이네켄 한 병을 마시고 있던 나. 손을
흔들며 나타난 그녀를 나는 반갑게 맞이한다.

"어 왔어?"

항상 저런 옷은 어디서 사는 걸까 싶은 특이한 패턴의 그래픽티에 흰 재킷, 그리고 칠부 바지와 쪼리를 신은
평범한 스타일이지만 형광 주황의 포인트 가방이 키 크고 늘씬한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오빠 낮부터 혼자 술 마신거에요?"

웃으며 묻는 그녀에게 "병맥 하나가 무슨 술인가. 음료수지. 근데 오늘은 비 와서 그런지 별로 안 덥다" 하고
대답하며 점원에게 메뉴판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메뉴판을 받는 대신 재킷을 벗으면서 바로 주문했다.

"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재킷을 벗자 그녀의 유독 글래머러스한 가슴이 새삼 부각되어 보였다.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은 한 커플을 보았다.

"아…"
"남자 돈 진짜 많은가보다"
"돈이면 안되는게 없다니까요"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넌 저런 남자가 사귀자고 하면 어때? 대신에 돈으로 진짜 완전 선물공세, 완전 쏟아붓는다"
"그래요? 그럼 콜!"

솔직한 경희의 대답에 그녀와 나 모두 빵 터져서 웃는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여자가 화장실을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냅킨으로 목의 땀을 닦는 남자의 모습을 보더니 "어후, 안 되겠어. 난 포기" 하면서 
방금 전 대답을 취소한다. 

"왜, 도저히 안 되겠냐?"
"남자 외모는 솔직히 별로 난 그렇게 안 보는데, 그래도 저렇게 막 좀 기름진 덩어리들 있잖아요, 그건
좀 싫어요. 데이트야 그렇다고 쳐도 같이 잘 때 생각해 봐, 아 싫어"
"그러게, 생각해보면 그 여자도 참 대단하다. 비유 좋아야 할 거 같아"

밑도 끝도 없이 남의 흉을 보다가 왠지 좀 미안한 마음에 대화를 돌린다. 

"아 영화표 3시표인데 1시간 동안 뭐하지?"
"그러게요. 쇼핑이나 할까요?"
"그러지 뭐. 살 거 있어?"
"아뇨, 그냥 재미로요"



요 몇 달간 압구정의 샵들이 꽤 많이 바뀌고 있다. 안 팔리는 디자이너 샵들이 하나둘씩 빠지고, 그 자리를
느낌 있는 음식점들이 채워나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음식점도 아니고 나름 특색있는 가게들
이라 좋다.

"아 요새 몇 달 안 왔더니 꽤 바뀌었네요"
"어. 다시 사람도 좀 늘어나는 거 같아"
"난 사람 없이 완전 썰렁한 그때가 더 좋았는데"
"아직도 많은건 아니지 뭐. 옛날 상권 다 복구되려면 까마득히 멀었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경희는 문득 옛날 생각이 나는지 물었다.

"오빠 옛날에 우리 처음 데이트 하던 날 생각나요?"

그 질문에 나는 그저 멋적은 웃음부터 지었다.

"그게 언제지? 나 대학 복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던 거 같은데"
"몰라요, 진짜 와, 생각해보니까 오빠랑 나랑 안 지 꽤 됐구나. 그때만 해도 나 정말 예뻤는데. 안 그래요?'

당돌한 질문을 하는 경희에게 난 "지금도 예쁜데 뭐" 하는 대답을 해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해주는거 오빠 뿐이에요. 아 나도 늙었어! 아 나 어떡해 진짜 이제!"

큰 소리로 외치는 그녀를 보며 나도 크게 웃고 그녀도 지 행동이 웃겼는지 빵 터져웃었다.

"아 대뜸 말도 안되는 지랄 좀 하지마, 쪽팔려!"
"나 쪽팔려요? 오빠도 외쳐요, 나도 늙었어! 하고"

밑도 끝도 없는 사차원 파이팅을 하는 그녀의 씩씩한 모습을 보며 참 변함없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그러고보면 참 그때는 나도 너도 참 빛나던 시절이구나. 

대학 축제에 놀러온 경희와 그녀의 친구. 나와 동기 역시 복학생 주제에 축제 놀러온 그녀들을 꼬셔서 
번호를 따고 같이 놀다가 그렇게 눈이 맞은 우리 둘. 꾸밈없이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와 그때만 해도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던 나는, 참 잘 어울…리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여튼 우린 참 좋았다. 

"갤러리아에서 오빠가 사준 그 쟈켓, 나 아직도 갖고 있어요"
"아 맞어. 그때 내가 너 뭐였지? 엄청 비싼 쟈켓 사준 거 같은데"
"그랬죠? 아 진짜 나 그땐 정말 된장이었나 봐. 학생이 돈이 뭐가 있다고. 미안해요"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거 사실 나 방학 때 한달 밤낮으로 알바한 돈 그대로 바친거야. 근데 그래도 하나도 안 아까웠어. 내가
지금까지 누구 옷 사줘서 그렇게 어울린건 니가 최고였어. 사주면서도 뿌듯하더라. 너무 이뻐서… 맞어,
그때 너 진짜 이뻤어"

그저 잊고 살았던, 아스라히 고이 접어둔 둘의 작은 추억이 그렇게 피어났다. 나의 말에 그녀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여전히 그 예쁜 얼굴에 확연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거 어때요?"
"글쎄. 음, 괜찮네"
"이거랑 비교하면 어떤게 더 괜찮은거 같아요?"
"난 이거"
"아 역시. 이게 더 낫죠?"
"어. 그리고 저건 좀 튀어도 너무 튀잖아"
"가끔 우울한 날 입는 옷?"

몇 군데의 디자이너 샵을 구경하다가 CGV 건물의 퍼스트룩에 들러 스타일 괜찮은 옷들 몇 벌을 구경했다.
그녀는 헬무트 랭의 재킷을 비롯해 몇 벌인가의 옷을 들었다 놨다 고민하다 결국 구입을 포기했고, 나 역시 
잭 스페이드 가방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 포기했다. 

"아 요즘에 살 옷이 없어 진짜"
"살 옷이 없는거냐 살 돈이 없는거냐"
"아냐 진짜로 살 옷이 없어요" 
"돈은 있고?"

우리 외에도 다른 두 커플이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꺼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 둘. 내 마지막
질문에 경희는 "아빠 카드. 막 이래" 하고 웃더니 "그래요 나 돈 없어요" 하면서 칭얼대었다. 하지만 그녀의
"나 요즘 한달에 150만원씩 적금 붓잖아요. 진짜 그래서 완전 평소에 거지에요" 라는 말에 조금 놀랬다. 그
천하의 이경희가 적금을 붓고 있다니. 

"와" 하고 작게 탄성을 내었더니 그녀가 멋적은 듯 물었다.

"왜요, 놀랬어요? 내가 적금 부어서?"
"완전"
"아 왜요, 나두 시집가야지"
"갈 사람은 있고?"
"없으니까 돈이라도 모아야죠"

엘리베이터에 비친 뒤의 두 커플이, 경희의 대답에 풉하고 웃는 것이 보였다. 


영화를 보고 나왔다. 그저 그랬다. 꽤 웃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막 배꼽 빠질 정도는 아니였다. 그녀 역시 
웃을 때는 신나게 웃어놓고선 나오면서 "그냥 그런데요?" 하면서 시니컬한 평을 내렸다. 

"출출하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저녁을 먹기 위해 오리엔탈 스푼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고 찬 바람이
불었다. 은근슬쩍 그녀는 나에게 팔짱을 끼면서 "바람 차요 오빠" 하고 애교를 피웠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살짝 푼수끼까지 있는 그녀지만, 그래서 가끔 애교를 피우면 그것이 참 귀여웠지. 팔에 살짝 스치는 그녀
의 볼륨감 넘치는 가슴에 묘하게 기분 설레였지만, 굳이 그것을 말하진 않았다.



밥을 먹고… 웃으면서, 우리 둘은 마치 옛날로 되돌아간 듯 애정 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몇 번이나 "오빠 많이 먹어요" 하면서 굳이 내 앞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원래는
시원한 맥주를 마실까 하다 둘 다 너무 배가 불러 그냥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이미 해는 넘어갔고, 야외 테라스에서 까페 아마폴라의 빙수 얹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우리는 왠지
할 말이 없어져 몇 번이나 멋적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색하거나 싫은게
아니라…

"오빠"
"어"
"오빠는 이제 여자친구 안 사귀어요? 지영이 언니랑 헤어진지 좀 됐잖아"
"뭐, 사귀어야지"

무난한 대답에 그녀는 또 캐묻는다.

"주변에 누구 없어요? 오빠 좋아한다는 여자? 아니면 오빠가 작업하는 여자라던가. 오빠 평생에 주변에
여자 없었던 적 없잖아"
"야 내가 언제"
"몰라 내가 아는 오빠는 항상 주변에 누군가 여자가 있었어. 진짜 완전 바람둥이야"
"내가 무슨 바람둥이냐? 그냥…"
"그냥 뭐?"
"너무 불쌍해서 여자들이 나를 보면서 불쌍해서 사귀어 주는거지"

나의 말에 그녀는 또 웃다가 "하긴, 오빠가 확실히 그런 매력은 있지. 묘하게 애정가는 그런거. 따지고 보면
별 매력 없는데도 묘하게…" 하고 뜬금없는 디스를 하며 다시 웃었다.

"야이…" 하고 그녀의 말을 받아준 나. 그리고 잠시 대화가 없어졌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빠"
"어"
"우리…"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며… 강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 설레임 반
두려움 반의 말이었다. 어쩌면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으면서도, 나의 이성이 가장 난감해하는 바로 그 말.

그리고 나는 속으로 그 말만은 아니길 빌었다. 안 돼. 우리 둘은… 그냥 이대로가 좋아. 차라리 그냥 다시,
다시 모르는 남남이 되기로 하더라도, 순간적인 연애 감정으로 답 없는 재시작을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게 나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좋다.

"흠!"

하고 헛기침을 한 나는 "경희야, 우리 슬슬 일어날까?" 하면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경희는 아쉬운 듯 뭐라
대답을 삼키는 듯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일어나요"



자리에서 일어나 갤러리아 백화점 앞 택시 정류장까지,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었다. 화장품 로드샵에 대해
몇 마디 별 의미없는 흰 소리를 주고 받고, 집에까지 언제 가냐, 다음 주에 서로의 일 스케쥴에 대해 묻기도
하고 그렇게 둘 다 속마음은 꽁꽁 감추며, 그렇게 걸었다.

이윽고 그녀를 택시 태워 보내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그녀의
카톡이 도착했다.

[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오빠, 오빠는 점점 멋있는 남자가 되는 거 같아요 ]

난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답장을 보냈다.

[ 하루가 다르게 아저씨가 되는데, 멋있기는 무슨 ]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시니컬한 답장이 돌아왔다.

[ 외모 말구요 ]

그 대답에 혼자 한참을 쿡쿡 대다가 답장 대신 그저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듯 소탈한 압구정의 주말 밤이,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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