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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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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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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금요일 저녁이건만 야근을 위해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문득 차장님이 "잠깐 회의실로" 하면서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안 좋은 예감을 느끼며 회의실로 향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회사에서 조만간 정리해고가 있을
예정이고 박스씨가 그 명단에 오를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나 뿐 아니라 우리 팀에서만도 나 이외에 다른 둘,
그리고 전사적으로 상당한 규모의 정리해고가 있을 것이란다. 정규직을 줄이고 계약직, 혹은 파견직으로
돌릴 것 같단다. 아니 감원을 할 때 하더라도 관리직을 먼저 자르면 잘랐지 실무직들 위주로 자르는게 말이
되나,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일단은 참았다.

물론 그 명단이나 규모가 아직 확실히 확정된 것은 아니고, 차장님도 공식적인 루트로 들은 이야기는 아니
라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주 조심스럽지만, 일단 박스씨는 얼마 전 아버지의 병환 등 집안 사정도
있고해서 어느 정도 배려도 고려하는 중이고, 또 최악의 경우를 감안해서라도 미리 귀뜸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씨발. 한 고비 넘겼나 했더니 또 한 고비다.

끝날 때까지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랄까, 분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던 도중, 낮에 온 전화가 생각났다.

"아 네 XX은행 오XX 계장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박스 고객님. 네네, 아 다름이 아니고, 지난 4월에 저희
은행에서 1천만원 대출을 받으셨지요"
"네"
"아 그 때, 대출이자 할인조건으로 신용카드를 발급 받으셨잖아요?"
"네 그렇습니다"
"그때 미리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 카드 발급 이후에, 3개월 내에 3만원 이상의 거래내역이 있으셔야 그
대출이자 할인조건이 적용되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네, 뭐 3만원이니까, 지인 분들과 어디 술자리나 아니면 뭐 주유하실 때 한번만 딱 이용하시면 될 것 같습
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기한은 7월 안으로만 사용하면 되는거죠?"
"네"


그 전화가 생각나서 잠깐 귀가길에 마트에 들렀다. 와인을 살까 하다가 사놓고 뚜껑조차 안 딴 와인이 집에
3병이란 사실이 생각나서 그냥 딱 단즈카 보드카 크렌베리로 골랐다. 한 병 다 비우고 자야지 생각하다가
에이, 하면서 토닉 워터 2병도 샀다. 우유 500ml짜리도 하나 샀다. 아까 그 카드로 결제했다. 오케이, 이건
해결.

기분이 무한히 다운되었다. 누구 불러다가 같이 술이나 할까 하다가 아니다, 그 사람은 무슨 죄가 있어서
불타는 금요일에 우울한 남자 인생 투정이나 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관뒀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씻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보드카를 땄다. 혼자 마시려니 당최 뭐 넘어가질 않는다.
그래서 토닉 워터 섞어서 음료수처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후다닥 써야지 써야지
했던 똥글 한편을 써 올렸다. 글 쓰며 그렇게 한참을 몰두했더니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한참을 유투브로
노래나 들으면서 늦게 잤다.



늦잠을 잘 자다가 택배가 와서 깼다. 이북 리더였다. 당장 회사에서 짤릴 위기에 또 처하고 보니 이딴 것도
다 헛돈지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북이고 지랄이고 역시나 다 개헛돈지랄이었다.

당장 아버지 병원비 선결재 때문에 급히 대출을 냈던 것인데, 보험회사에서 뒤늦게 나온 보험료로 그 비용
처리하고 또 회사에서도 지난 달에 성과급도 나오고해서-그러고보니 씨발 감원까지 한다는 회사에서 성과
급이라니 이건 또 뭔 개지랄인가 하는 의혹이 든다- 여유가 생겨서 이래저래 질렀던 것들인데 정말로 감원
되고 나면 결국에는 다 쳐팔아야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단 샤워부터 했다. 씻고 나니 개운했다. 일단 주말인만큼 좆같은 일은 잊기로 했다.
하릴없이 시간이나 때우고 있노라니 L에게 전화가 왔다. K불러다가 저녁에 영화나 보자고 했다. 마침 기분
전환이나 하자, 싶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책 좀 보다, 컴퓨터 좀 하다, 낮잠 좀 자다 시간을 때우고 집을 나섰다.

셋이 맥도날드에서 저녁으로 햄버거를 먹었다. K는 오늘따라 화장부터 복장까지 아주 신경을 쓴 눈치였다.
뭔 일 있었냐고 묻자 사실 오늘 그냥 소개팅 비슷하게 친구랑 셋이서 밥을 먹었단다. 잘 됐냐고 묻자 뭐 썩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L도 K에게 잘되면 소개팅 좀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보니 이 두 여자, 연애 안 한지
꽤 오래됐지.

그리고 영화를 보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또 하릴없이 잡코리아 좀 뒤적여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창을 껐다.


그러고보니 며칠 전, 이글루스 측에서 야구장 관련글들을 모두 비공개처리 해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지속적
신고가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서 비공개 처리 이외의 어떤 다른 방안이 없겠느냐는 문의를 했더니 그러면
모든 관련 링크와 홍보성 태그등을 날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굳이 그 소설을 쓰는 의미가 없는데. 일단 이쪽에서도 대응 방안을 좀 강구해보겠다고 했고 이글루스
측에서도 나름 호의적으로, 얼마간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뭔가 되는 일이 없다. 회사도 짤리고, 블로그도 관두고, 음, 그러면 뭘 하면 좋을까. 다 싫어졌다. 그냥 다 손
놔버리고 싶어졌다. 집 생각을 했다. 아, 그러고보니 어버이날 선물로 집에다 발맛사지기를 보냈다. 어머닌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하셨다.

세상에 기댈 사람은 없고 나에게 시련은 또 닥쳐왔다. 흐음.

하루하루가 별 재미도 없고, 솔직히 미래도 없다. 뭘 어쩌면 좋을까. 답답하지만… 사실 그렇게 막 심하게
우울하지도 않다. 그냥 어이가 없고, 세상 돌아가는게, 내 팔자가 그냥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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