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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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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니가 먼저 연락도 좀 하고 그래야지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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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마음이 무겁다.



일주일 전 쯤 소개팅을 했다. 선배가 혹시 소개팅 해볼 생각 있냐고 묻길래, 그런거 저 잘 못한다 라고 말했
는데도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나갔다. 솔직한 마음으로야 당연히 싫진 않지만 잘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

여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회사에 다니는 여자 분이었다. 예뻤다. 어… 그렇다고 무슨 막 엄청 예쁜 그런
대단한 연예인급 여자, 이런건 아니지만, 그냥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여자 분, 이긴 했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그런 여자 분도 다 이뻐 보이기 때문에, 아니 어, 이건 좀 실례되는 발언 같은데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은 아니고, 음 진짜 우리나라 여자들 되게 다들 이쁘지 않나? 여튼 그 분도 예뻤다.

하아. 내가 이렇다. 말 주변머리가 이렇게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들 말씀 조리있게 잘하시고 멋진데 왜
나는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아 맞다. 하여튼, 소개팅은 그래도 나름 잘 된 거 같다. 나야 그저 그 분이랑 같이 대화도 하면서 맛있는 것도
또 먹고 해서 당연히 디게 좋았지만 그 분은 내가 말 주변머리도 없고 별 재미도 없었을텐데 그래도 잘 들어
주었다. 이야기 하면서 중간에 내가 생각해도 횡설수설한 이야기조차 잘 정리해서 들어주고 그런게 참 좋았다.

이해심도 많은 거 같다. 세 자매 중에 맏언니라서 그런 거 같다. 그러고보면 사실 애프터 신청도 그녀가 먼저
했다. 사실 주선자인 선배한테 "설령 마음에 안 들더라도 끝나고 다음에 또 한번 더 보자고 하는게 예의야"
라고 소개팅의 룰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깜박하고는 그냥 맛있는거나 먹고 헤어질 뻔 했는데

"저 마음에 안 드세요? 애프터 신청 안 해주세요?"

하고 먼저 그렇게 웃으면서 물어봐주었다. 화들짝 놀라서 손발을 다 내저으며-아 부끄럽다- 깜박했다고,
사실 주선자 선배한테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제가 사실은 소개팅이 정말로 태어나서 두 번째라고 고백하면서
그래서 잘 몰라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렇게 '애프터 신청'을 했다. 그 다음 주는 프로젝트 관련해서
준비할게 많아 엄청 바쁠 거 같아 2주 후에 보기로 했다.

보통 여자였다면 거기서 난 퇴짜 아니었을까. 자존심 문제라면서. 그거 생각하면 그 분은 정말 적극적이고
멋진 여자 분 같다. 나같은 놈은 그런 분이 어울리는 거 같기도 했다. 아니아니, 내가 잘나서 어울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내가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이끌어 줄 수도 있는… 아닌가? 아니다. 어느 여자가 그런 걸 좋아
할까. 음. 남자가 막 적극적이고 듬직하고 그래야 역시 여자들은 좋아하겠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다음 주는 역시나 엄청 바쁜 주간이라 연락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3일을 그냥 흘려보냈다. 그게
막 연락을 하고, 또 목소리도 듣고 싶고 뭐 그렇기는 한데 일단 낮에는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흘려보냈고
저녁에는 왠지 그 분이 바쁠 거 같기도 하고 실례는 아닐까 걱정도 되고…

으음

아니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화해서 할 말이 없을까 봐. 되게 어색하고 그 힘든, 그 알잖는가. 예전에 소개팅
한 여자 분도 사실 그게 어려웠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뭔 말을 해야할지 잘 몰라서…

음, 여튼 그래서 여자 분이 주선자인 선배한테 물어봤나보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하는 눈치냐고. 아닌데.
나는 선배한테 엄청 마음에 든다고 말했는데. 그랬더니 선배가 방금 전에 그렇게 전화를 준거다.

니가 먼저 연락도 좀 하고, 남자가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야하는거 아니냐고.

후우. 그렇지. 그렇겠지. 음. 미리 메모지에다가 할 말을 그래서 지금 적는 중이다. 날씨 이야기, 요즘 야구 이야
기. 그 여자 분이 야구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사실 난 야구 잘 안 보지만. 아까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야구뉴스 좀
들여다봤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들이 가득해서 조금 놀랬다. 내가 이 정도로 야구에 대해 문외한이었나? 아아!
다시 집중집중.

일단 그리고, 음, 어, 야구 이야기 좀 하면서 다음 주에 야구장에서 보는거 어떠냐, 이렇게도 제안해보고, 음,
그리고 또… 아니면 영화. 그렇지. 영화도… 그리고 또 뭔 이야기를 할게 있나 한참을 고민하다 집에 오는 길에
있는 꽂집 생각내서 꽃 좋아하시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아 또 너무 뻔한 질문 같기도 해서 꽃, 이라고 쓴 글자
위에다가 X표를 친다.

음.

또 무슨 이야기를 하지. 우리 연구실 이야기는 뭐 말할 꺼리도 없는데. 그 여자분 회사 이야기 같은거는, 음
회사 이야기 같은거는 싫어하지 않을까. 쉬는 시간에 그런 이야기는. 아아. 도대체 연애 잘하는 사람들은 무슨
이야길 하는 걸까.

시계를 보니까 고민하는 사이 벌써 15분이 흘렀다. 연구실에서는 그래도 나름 아이디어의 귀재 소리 듣는데
이런 이야기는 왜 생각이 하나도 안 떠오를까. 시계는 벌써 7시 45분이다. 너무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에티켓
없다고 할 거 같은데.

잘 보이고 싶은데 음.

에휴. 펜을 다시 던진다. 이러니 어느 여자가 나를 좋아할까. 그 분이야 나를 그래도 좋게 봐주신 거 같지만
이러다 금방 지치겠지. 후. 연애를 잘하고 싶은데.

학교 다닐 때도 나는 잘하는 과목만 열심히 했다. 수학 과학은 나름 자신있었지만 언어는 영 빵점이었다.
못하는 과목을 좀 보강하면서도 공부를 해야하는데 그냥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했다.

나는 연애도 그런 거 같다. 자신이 없으니까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또 반문하게 된다. 내가 정말 그
여자 분을 좋아하나? 같은거.

물론 좋다. 나랑 이야기 하면서 하나하나 장단 잘 맞춰주고 웃어주고, 이쁘고, 또 적극적이고, 어… 뭐 여튼
다 좋은데. 음.

그리고 또 새삼 그렇게 좋은 분이 왜 나를 좋아하겠어, 하는 생각에 그저 또 머리를 긁적이게 되고, 연애는
참 어려운거다 생각이 또 든다. 아까부터 옆에 휴대폰을 놓고서는 계속 만지작 만지작 건드리고만 있다.

움. 일단 부딪혀보는 셈으로 전화를 해봐? 아 떨려. 아 조금만. 일단 할 말이라도 더 생각해보고 전화하자.
음.

가끔 생각한다. 연애도 뭐 좀 누가 가르쳐주고 그러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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