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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집 딸내미 윤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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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차분한 음색의, 이런 동네표 분식집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공부 잘하게 생긴 이쁜 분식집 딸내미 윤경이의 인사.

"야, 니네 엄마 안 계시냐?"
"네"
"오우 예"

나와 태진, 성환은 자리를 잡고 "야 그럼 떡볶이 2인분 존나 5인분처럼 푸짐하게 내와봐라. 순대도 1인분
이랑" 하며 윤경에게 주문을 한다. 가방을 풀자 땀에 젖은 등허리가 푸쉬쉬 시원하다.

"너네 가게는 에어콘 안 들여놓냐?"
"몰르겠어요"
"아 더워. 너네 가게는 이게 단점이야"
"죄송해요"
"아니 미안할 것까진 없고"

고개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심스레 접시에 정말로 2인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듬뿍듬뿍 담는 윤경.
고개를 돌린 그녀의 가는 목선은, 아무 것도 모를 좆고딩들이 보아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큼, 야, 오뎅도 먹을래?"
"돈 있어?"
"없냐?"
"아 씨발 너네 새낀 아가리에 뭐 털어넣기 전에 돈이 있나없나부터 확인을 해 새끼들아"

화려한 욕과 함께 언제나처럼 성환이 닥스 지갑에서 5천원짜리를 꺼낸다. 나는 뒷주머니에서 꼬깃하게
나온 천원을 내놓고 태진은 짤짤이로 400원을 내놓는다.

"됐어 이 그지 새끼들아 그냥 떡볶이랑 순대나 쳐먹자"

하지만 우리 말을 들은 윤경은 떡볶이 위에 삶은 계란 3개를 내온다.

"오올! 야 넌 진짜 최고야"
"아 우리 윤경이 최고!"
"사랑한다"

얼굴을 매만지며 배시시 웃는 그녀. 교복으로 보이는 블라우스 소매에 떡볶이 국물이 튄 게 보였지만
그보다도 새하얀 배꽃 같은, 그래 배꽃이 뭔지 본 적도 없지만 책에서 본 그 표현에 따르면 배꽃이 아마
지금의 저 윤경이 얼굴과도 같지 않을까.

걸신이라도 들렸는지 태진이 먼저 우적우적 계란부터 씹어먹고 못마땅한 얼굴로 성환이 조심스레 떡볶
이를 하나 집어든다. 나는 순대를 하나 집어먹고, 그 와중에 윤경은 또 오뎅국물을 작은 컵에 3개 내오
는데 그 안에는 또 작게 오뎅 하나를 잘게 나눠넣은 건더기들이 보인다.

"캬, 넌 진짜 천사다 천사"
"니네 엄마보다 니가 장사 더 잘하는거 같다"
"오빠랑 사귈래?"

마지막 태진의 개드립에 "아 미친 새끼야 쳐먹기나 해" 하고 성환이 쫑크를 주고, 윤경은 다시 수줍은 듯
웃으면서 떡볶이를 뒤적인다.


반 넘게 먹었을 무렵, 장을 봐온 모양인지 대파가 삐죽이 솟은 장바구니를 든 아줌마가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단골인 우리들의 인사에 "어어, 왔어?" 하고 인사를 받은 주인 아주머니. 그러나 그녀는 또 참 인정머리
없이 힐끔 우리 접시를 쳐다본다. 언제나처럼 윤경이 또 많이 퍼주었을까봐 그런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반 이상 먹은 접시를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을 리 없고, 떨떠름한 얼굴로 아주머니는 윤경에게 묻는다.

"뭔 일 없었어?"
"은주 할머니가 가게세 내라던데"
"어휴, 날짜가 벌써 그래됐나?"

저번에 왔을 때도 가게세 이야기를 들은 거 같은데 민망한지 짐짓 모르는 척 하는 아주머니. 문득
자기 집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태진의 낯빚이 어두워지고, 성환은 말 없이 떡볶이만 씹는다.

"엄마 나 그리고 내일 급식비 내야되는데"
"급식비? 에휴, 알았어 이따 줄께"
"진짜 줘야 돼"

윤경은 윤경 나름대로, 아마 손님 눈치를 디게 살피는 엄마에게서 확답을 듣기 위해-아마도- 일부러
조금은 민망함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앞에서 굳이 급식비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알았어 가서 공부나 해"
"알았어"

은경은 가게 안에 연결된 세간 방에 들어가면서 힐끔 이쪽을 바라본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녀에게 인사를 건내고 그녀는 대꾸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살짝 열린 문 틈으로 누워있는 그녀의
아버지가 언뜻 보였다.




"들어가라"
"어, 내일 보자"
"이따 버디버디에서 봐"

버스를 타고 성환은 집으로 향하고, 나와 태진은 왠지 말없이 걷는다.

"야"
"왜?"
"걔네 아부지 어디 아픈 거 같지?"
"누구? 윤경이?"
"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맨날 방 안에 누워있두만. 그리고 남편이 집에서 쉬니까 여자가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하는 거겠지"

나의 말에 또 묵묵히 생각에 잠기는 태진.

"왜? 동병상련 느끼냐?"
"뭐? 새끼"

멋적은 듯 피식 웃는 태진. 하지만 곧이어 "난 그런 애들 보면 그래. 솔직히" 하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
거리고, 나는 알콜중독 아버지를 둔 태진의 가정 환경을 생각하며 입을 다문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다섯시 반의 낮을 우리 둘은 암담한 마음으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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