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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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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 대리 "오늘 야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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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다들 퇴근하고 텅빈 사무실. 의욕 없는 가운데 주말에 일하기 싫어 마무리 짓고 가려고
보고서 문장이나 가다듬고 있노라니 뒤에서 누가 톡톡 건드린다. 기획팀 윤정 대리다. 왠일이래.

"아… 자체 야근이에요 자체 야근"

'자체 야근'이라는 말에 픽 웃은 그녀는 "금요일 밤에 무슨 야근이야" 하는데 그 생긋 웃는 얼굴이 너무나
섹시하다. 그리고 그녀가 섹시하다고 생각한 순간 이 불만 환하게 다 켜진 사무실에 사람이라고는 그녀와
나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리님은 왜 퇴근 안 했어요?"

같은 대리이지만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많고 유부녀라서 존대를 한다. 새삼 그러고보니 정말
저 나이에 저 외모라니, 역시 요즘 미시는 장난이 아니다. 저 가는 팔다리와 허리 라인을 보노라면 어느
누가 그녀를 유부녀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 무엇보다 옷 스타일부터 행동거지까지, 뭐랄까, 정말로
요즘 이쁜 유부녀들은 진짜 미스보다 낫다.

"어후, 집에 혼자 일찍 들어가봐야 뭐해. 남편도 없고 집에서 혼자 밥 먹는데"

하기사, 지금도 이렇게 훌륭한데 처녀적에야 얼마나 잘나갔을까. 그런 그녀에게 결혼했다고 하루 아침에
달라진 생활패턴을 요구하는건 너무한 일이겠지.

"남편님은 늦게 들어오세요?"

그러고보니 그녀의 남편이 궁금하다. 이렇게 멋진 유부녀를 데리고 사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어. 늦는대"

그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잠시 만지작 거리더니 카톡을 보여준다.


'음'

순간적으로 본 내용이지만, 조금 마음이 그랬다. 그녀는 이모티콘과 긴 문장으로 열심히 말을 걸었지만
그 남편이라는 분은 그저 응, 어, 알았어 같은 짧은 답변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표정을 보고 느꼈는지
아니면 스스로 눈치챘는지

"원래 우리 남편이 말이 짧아. 대답 같은 것도 네 아니요 응 아니 이런 식이야"
"법조계에 계신 분이세요?"

'거 왜 법정 드라마 같은거 보면 나오잖아요 단답형으로만 말하라고 다그치는 뭐 그런' 하는 내용이
함축된 얕은 조크였지만 그녀는 과연 눈치 빠르게 알아들었는지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내가 더 놀랬다.

"어 정말이에요?"
"응, 아 그렇다고 변호사 판검사는 아니구, 그럼 내가 회사 안 다니겠지. 걍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해"
"와 그래도 멋있는데요"

'멋있다'라는 내 말에 "내가 첨에 그거에 속았지. 진짜 뭣도 아냐" 라면서 고개를 젓던 그녀는 다시
"내가 시간 자꾸 뺐나? 커피 한잔 마실래?" 하고 묻는다. 나가서 마시자는 이야긴가? 하고 생각하던
차에 그녀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자기 자리로 가더니 뭔가 세련된 포장지의 티백 커피 두 개를 들고
왔다. 아 여기서 마시자는건가. 뭐 좋지.



"진짜, 나중에 장가가면 부인한테 잘해. 하긴 박스씨는 나중에 장가가면 부인한테 잘할거 같긴 해"
"아니에요 저도 은근히 또 안 그래요. 게으르고…"
"그래? 안 그럴거 같은데"

의자도 아니고 맞은 편 책상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자세는, 아니 사실은 딱히 자세를 운운
할 정도로 이상할 것도 없지만 평소에는 딱히 그리 친하지도 않은 그녀가 오늘따라 왠일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니, 업무를 못 보고 있는 것은 둘째치고 아주 조금은 불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보다는 매력적인 그녀와 이렇게 단 둘이 꽤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몇 배로 더
왠지 기뻤다.

"이 커피 맛있지? 내 친구가 베트남 여행 갔다가, 거기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로 아예 거기
원두를 수입해다가 따로 소포장으로 이렇게 티백으로 만들어서 파는거야. 맛있지 않아?"

아 그랬나. 아니 사실 딱히 뭐 크게 다른 줄은 모르겠다만 그 말을 듣고나니 맛있는 것도 같고.

"네 맛있네요. 와 진짜 그런 사업도 있구나"
"사업이라고 하긴 좀 뭐하고 그냥 용돈이나 버는 수준이지 뭐. 여자들 집에서 노는 것도 얼마나
답답한 줄 알아?"
"편할 거 같은데"

내 말에 그녀는 "아, 이래서 정말 남자들은 안 돼" 라면서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음 저 가는
목을 그녀의 남편은 매일 밤 빨겠지.

"아니 뭐 내가 생각해도 솔직히 할 일은 없어. 집안일이 많긴 많은데 꼭 못할 수준도 아니니깐. 근데
하루를 꼬박 집안일만 하다가 흘려보내면 그게 얼마나 하루가 허무한지 알아? 주부 우울증이 괜히
오는게 아니야"

'주부'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녀이건만, 그녀의 징징거림을 들어주고 있노라니 결국
그녀도 주부긴 주부이구나 싶어 기분이 묘하다.

"그래도 남편님이 잘해주시지 않아요?"

그러자 그녀는 "잘해주긴 잘해주지…" 라면서도 곧이어 혼자 웃으면서 "근데 남편은 좀 질려" 하고
또 웃는다. 전혀 웃긴 이야기도 웃긴 말도 아니건만 뭔가 떠오른게 있는지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측은하면서도 또 묘하게 예쁘다. 그러더니 그녀는 곧 마음 속의, 아마도 혼자 오랫동안 생각해
왔을 어떤 진심을 뜬금없이 쏟아놓는다.


"아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가슴 설레는 연애 한번만 더 해보고 싶다!"

유부녀들의 로망 같은 건가. 커피를 마시면서 묵묵히 듣고 있노라니 폭풍처럼 말을 쏟아놓는다.

"하아…맨날 집에 가면 배가 이만한 남편이랑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나 하고… 후우…지금은 그나마
애라도 없지 애까지 생기면 정말… 끝이야 끝. 난 요즘 내가 결혼 괜히 했다는 생각도 들어. 그래 알아,
이건 유부녀가 할 소리가 아니지"

음. 평소 멀리서 본 그녀 모습은 왠지 깍쟁이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의 그녀는… 털털함을 넘어서
뭐랄까, 미묘한 주부 우울증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그보다는 '근데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털어놓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슬그머니 '나랑
뭐, 연애라도 하자고?' 하는 생각과 '얼마나 갑갑하면 나한테 다 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든다. 그보다 나는 새삼 그녀의 몸이나 은근히 다시 한번 죽 흝는다. 아저씨처럼. 그리고 그녀가 눈치
채기 전 말을 했다.

"대리님"
"응?"
"하하"
"왜에?"
"아니에요"

내가 말을 하려다 말자 그녀는 뭔가 확 구미가 당기는지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띄우며 묻는다. 

"왜?"

그리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술 한잔 하실래요?"

물론 지금 이 상황에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아니 안돼 집에 들어가야 돼" 하고 거절한다. 뭐 툭 던져보는 견제구같은 거였으니까
별로 아쉬울 것은 없다. 다만 조금 어색해진 공기가 민망한 가운데 역시나 유부녀답게 그녀가 먼저
짖궂게 농을 던진다.

"금요일 저녁에 여자 직원한테 술 먹자는거 사내 성희롱에 해당된다는거 몰라?"

물론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에 나 역시 농을 던진다.

"대리님은 유부녀잖아요"

내 딴에는 농담조로 던진 말이지만 말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티를 내지 않고 슥
맞은 편 책상에서 일어났다. 혹시 화라도 난 건가 싶어 낭패감을 느끼던 그 순간, 윤정 대리가 물었다.

"혹시 차 갖고 왔어?"

나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 동네쪽으로 가서 가볍게 맥주 한잔만 마시자.
대리는 내가 불러줄께" 하고 말했다. 난 일부러라도 더 얼굴에 화색을 띄며 말했다.

"네!"

그녀가 쿡쿡 웃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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