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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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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수길의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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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늘은 수정이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나오기는 했지만 워낙에 주말이다보니 역시나 길이 막혀 이미 약속시간에서 3분
지각이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오빠 나 조금 늦을 거 같아요ㅜㅜ" 하고 문자를 남겨주었으니 나는 그저
"괜찮아 천천히 와" 하고 답장을 해주면 그만이다. 택시요금 1만 2천원을 찍고 내렸다.

평소같으면 한 9천원~만원 정도면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에 아까운 생각도 들고 차라리 차를 끌고 올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슈퍼카가 총출동하는 주말 밤의 가로수길에 준중형을 용감하게 끌고 나올
정도의 애차심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리고 그 지랄맞은 주차 때문에 그냥 차라리 이게 속편하지 하고
스스로를 달래고는 기다리기 위해 커피스미스로 먼저 향했다.

주말에는 자리 찾기 어려울 지경의 이곳이지만 마침 내가 2층으로 올라가자 딱 자리가 생겨 기분좋게
자리를 차지했다. 부드러운 맛으로 유명한 이 곳의 아메리카노에 가볍게 몸을 녹이며 시계를 확인한다.

'7시 14분'

출출하다. 수정이가 오면 바로 밥부터 먹으러 가야겠다. 하며 한 모금 뜨거운 커피에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그 기분을 만끽하노라니 전화가 왔다.

"어, 여기 커피스미스야. 2층. 음, 쭉 따라 들어오다보면 보일텐데, 어, 어 알았어"

그녀도 도착해서 걸어오고 있단다. 잠시 기다리고 있노라니 그녀가 올라왔다. 나를 찾으려 잠시 두리번
거리던 중 내가 살짝 손을 들자 나를 알아보고는 이쪽으로 왔다.

"오빠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아냐 나도 방금 왔어. 어휴 오늘 이쁘게 하고 왔네?" 
"하하 고마워요. 오빠도 오늘 멋있다. 그 코트 새로 산거에요?"
"아냐, 전에 있던거야"

사실은 산 거 맞다. 지난 주, 아울렛에서 1/3 값, 32만원 떨이값에 가져온 D.GNAK 네이비 컬러 코트다.
근데 또 왠지 새 옷 입고 나왔다고 하면 너무 데이트에 신경쓰고 나온 느낌이라 그냥 전에 있던 거라고
둘러댔다.


"너 이렇게 입으면 안 추워?"

연한 골드 컬러의 실크 블라우스에 검정 미니스커트, 그 위에 캐시미어 코트와 목도리 하나 걸치고 나온
그녀. 레깅스를 신었다고는 해도 왠지 옷이 얇아서 춥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아요. 오빠 나 엄청 배고픈데
우리 빨리 밥부터 먹어요" 하며 밥부터 보챈다. 나도 알겠노라며 모던밥상으로 향했다.

"점심에 면 먹었다며. 그럼 저녁은 밥 먹자"
"좋아요"

사실 예약을 하지 않아 자리가 없지 않을까 조금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히 운좋게 이번에도 우리가 들어서
자마자 두 쌍의 손님들이 자리를 떠서 자리가 생겼다. 제주도 은갈치 요리를 시켜놓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잠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회사는 어때? 재밌어?"
"네, 재미는 있는데, 어휴 힘들어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 입사한 그녀. 그녀의 오랜 꿈이 이뤄진 셈이고 업무 특성상 콘서트 티켓이나
이런저런 쏠쏠한 떡고물이 자주 떨어지기에 아주 행복하단다. 다만 업무 강도는 각오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한계를 느낄 정도로 힘들다는 것. 생각보다 연예인들을 직접 볼 기회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점은 실망이고, 같이 일하는 여자들 기가 정말 대단할 정도로 세다는게 고민이며, 얼마 전에는
아이돌급 마스크를 자랑하는 떠오르는 꽃미남 S가 회사 로비에서 개쌍욕을 하면서 전화하는 모습에
확 깨기도 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쉴새없이 들어주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는 모양이구나'

하기사 요새 그녀의 페이스북을 보면, 새내기 특유의 신나하는 그 모든 것이 느껴질 정도니까. 내 표정이
너무 멍했던 것일까?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웃더니 말했다.

"죄송해요 오빠, 제가 너무 정신없이 제 이야기만 했죠. 오빠는 요새 뭐하고 지냈어요?"
"나? 요새 뭐 별로. 맨날 일 때문에 찌들어있어"
"어휴 그렇잖아도 요새 오빠 얼굴 많이 상한 거 같아요"
"얼굴이야 처음부터 이미 상한 상태였지"

내 가벼운 농에 웃어주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기분좋게 웃었다.



밥을 먹고 나와 다시 찬 바람에 목을 움츠리게 된다. 내 목도리를 제대로 싸매주는 그녀의 손길에 새삼
훈훈함을 느끼며 어디갈까 하고 잠시 망설이다 "쇼핑이나 할까?" 하고 제안했다.

"오빠 뭐 살 거 있어요?"
"딱히. 아이쇼핑이지 뭐"

ALAND로 향했다. 사실 FLOW가 남아 있었으면 좋겠건만 청담동으로 이사가버린 이후로 별로 마음에
드는 가게가 없다. 걸으면서 그녀와 팔짱을 끼었다. 슬몃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는 "춥죠 오빠?" 하고
먼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게. 많이 춥네"

ALAND를 죽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뭔가는 없었다. 다만 노트북 파우치가 무난해
보이는게 하나 있길래 집었다가 가격을 보고 바로 내려놓았다.

'미친 가격이네'

그녀는 그녀대로 이것저것 몇 개 물건에 관심을 보이다가 역시 끌리는 무엇을 발견하진 못하고 그냥
다시 나왔다.


"오빠 나 여기 가게 좀 봐도 돼요?"
"어"

이후로 그녀와 나는 가게 몇 군데를 들리고, ILMO까지 둘러보고 나왔다. 10꼬르소꼬모의 옷들을 훑어보며
그 자리수 하나가 더 붙어있는 것만 같은 원가 태그들에 실소를 잠깐 흘리며 70%세일을 해도 수백만원대에
이르는 옷들에 '이거를 정가 다 주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새삼 한번 생각을 해본다. 가게를
나와 잠시 말없이 걷다가 그녀가 물었다.

"어우 다리 아프다. 오빠 지금 몇 시에요?"
"8시 반. 그럼 우리 뭐 어디 앉아서 술 한잔이라도 할까?"
"좋아요. 근데 우리 다른 데로 자리 옮기면 안 되요? 나 지금 이 동네 너무 피곤한데"
"그러지 뭐. 포차로 가자"

나는 바로 택시를 잡았다.



"오빠 근데 전에 봤을 때랑 많이 달라진 거 알아요?"
"내가? 어떻게?"
"음, 뭐랄까, 좀 더 어른이 됐다고 해야하나?"
"그럼 전에는 내가 애였다는거네"

내 말에 또 웃다가 아니요 하고 손사레를 치고는 "아 뭐라고 해야되지? 중후한? 아니, 뭔가 좋은 의미로
나이 먹은 티가 난다고 해야되나?" 하며 어떻게든 좋은 표현을 찾으려 애를 쓴다.

"아 어쨌든 나이들어 보인다는거네!"

하고 내가 픽 웃자 그녀는 또 깔깔 웃으며 그런 의미가 아니라 뭔가 친구 같던 오빠가 남자처럼 느껴진
단다. 여러가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말. 그녀는 말해놓고 그 직후 무어라 말을 정정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말을 말았다. 나는 애써 모르는 척 안주를 하나 집어먹고는 시계를 흘낏 보았다.
밤 9시 20분. 그리고 그녀는 재차 물었다.

"오빠 혹시 여자친구 생겼어요?"
"아니. 왜?"
"그냥요"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
"네, 잘 지내요"

사실 아까 내 팔짱을 낄 때부터 '어? 얘 남친이랑 깨졌나?' 하고 생각했지만 잘 지낸단다. 그 말에 또
묘한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그리고는 어느새 비어있는 그녀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고
물었다.

"데이트는 자주 해? 오늘은?"

그러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또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역시나 오랜만에 갑작스레 보자는
이유가 있었구만.

그녀의 남친은 그녀보다 8살 연상. 허허, 도둑놈 새끼, 하고 새삼 생각하다가 기업 CEO라는 배경이
생각나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야기에 집중해서, 재학 중에야 자주까지는 몰라도 나름
곧잘 만났으니 상관없었지만 최근에 취업을 하고 난 이후에는 서로 시간내기가 힘들어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느낌. 게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는 아직 심증 단계지만 남자가 아무래도 바람을 피우는
것같다는 말까지.

'그렇구만'

무어라 조언 같은 것 하기에도 조심스러운 상황. 게다가 왠지 수정이의 분위기도 조금 심상찮은게…

"오빠, 남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어떤 거 같아요?"


이후로 연거푸 술을 들이킨 그녀는 어느새 취해버렸다. 제대로 취하기 전에 '조금 알딸딸' 단계를
아주 살짝 넘은 그 시점에 나는 그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가게에서 나왔더니
날씨가 엄청나게 추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목도리를 똑바로 메어 주었다.

"오빠…"

팔짱을 넘어 숫제 나에게 몸을 기댄 그녀. 당장 그녀의 가쁜 숨이 바로 코 앞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 시점에서 번뇌와 함께 조금 씁쓸한 그녀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연락이 뜸했진, 한때 잘 될 뻔 했던 남자. 그리고 지금 남친과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될 일이
없는 남자, 현재 솔로에다 이런저런 고민상담해 줄 남자… 를 휴대폰 목록에서 죽 고르다가 내가
선택된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녀가 지금 바라는, 아니 내가 오늘 아침 입을 팬티를 고를 때 괜히 고민을 하게 만든 그
어떤 기대심리가 충분히 충족될 수도 있는 이 시점에서 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면서 그저
달래듯 그녀를 안아주었다.

"오빠아"

하지만 그녀가 더 와락 나를 끌어안았고, 졸지에 길거리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닭살커플이 된 꼴에
당혹감을 느꼈지만 그때 그녀의 전화 진동이 느껴졌다. 차라리 "전화 왔어" 라고 내가 굳이 말을
했다면 오히려 받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지만 그만 나는 가만히 있었고 그녀는 그렇게
전화벨이 5번이나 더 울린 이후에야 나를 풀어주고는 전화를 받았다. 역시나 남친이었다.

"어 오빠. 응, 어, 친구 만나고 있어. 어? 음, 글쎄? 이제 들어가야지. 어. 오빠는? 아, 그래?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그래? 어 알았어"

전화를 하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녀의 눈치. 어색함, 거짓말, 살짝 감정의 변화, 그리고 화사
하게 피어오르는 기쁨 등.

"남친이 데리러 온대?"
"네. 조금 이따가 전화한대요"
"잘됐네, 너 취해서 택시 태워 보내기도 불안했는데"
"그럼 오빠가 나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내가 왜 데려다주기까지 하냐? 남자친구도 아닌데"

나의 그 말에 씩 웃은 그녀는 "오늘 하루만 남친 해줬으면 됐는데. 진짜 그럴 뻔 했는데" 하고 의미
모를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 나 역시 픽 웃으며 "그 말 이따가 남친 오면 전해준다?" 하고 놀리자
그녀는 "진짜 그러기만 해봐요. 그럼 오빠가 나 책임져야 돼" 하며, 그녀답지 않게 반말 투로 확
말을 하며 크게 웃었다.

조금은 씁쓸하면서도 그래도 차라리 잘 된 거 같은,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유쾌한 그런 마음에 나
역시 조금 더 크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손을 잡은 채로 한참을 더 웃었다. 정말로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묘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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