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박지성 상무의 강남 야구장(73)] 드라큘라

$
0
0
"아…음"

블라인드를 안 치고 잤더니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따스한 봄볕에 눈이 부셔서 그만 눈을 떴다. 더듬더듬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10시다. 더 잘까 했지만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아 속 쓰려"

누군가에게는 아침 느즈막한 시간에 햇볕 쏟아지는 침대에서 깨어나는 것이 꿈같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라에게 있어서는 그저 짜증나는 일일 뿐이다. 그냥 그녀는 블라인드에 암막 커튼까치 치고 푹 자다가 
한 오후 3시쯤 어두컴컴한 방에서 "잘잤다!" 외치면서 깨어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 

'꼭 드라큘라 같네'

문득 그 생각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밤일하는 사람이 다 그렇지. 그래, 드라큘라 맞지 뭘. 쨍쨍한
봄날 햇볕만큼 짜증나는 것이 없다. 차라리 한 여름 같으면 창문 살짝 열고 커튼 치고 에어컨 켜놓고
자면 시원하기라도 하지 이건…

"으"

꼬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고픔과 속쓰림, 또 한편으로는 똥까지 마려웠다. 

'뭐부터 할까'

10초간 고민했지만 아랫쪽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 아랫쪽부터. 


[ 나눈 지금 퇴근하다 잔냐 ] 

변기에 앉아 담배를 뻐끔 피우며 휴대폰을 확인하노라니 새벽에 호구 노총각 아저씨가 보낸 문자가
한 통 와 있다. 아직도 투지 폰을 쓰는 리얼 아저씨다. 나 좋다고 완전 반했댄다. 하, 웃음이 절로
나온다. 농사 짓다가 장가 가려고 서울로 상경해서 낮에는 공장 일하고 밤에는 대리운전 한다는데
그런 형편에 야구장을 들낙거린다. 

'뭐 어때. 남자가 그건 풀고 살아야지'

안쓰럽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해서 번호를 가르쳐줬더니 수시로 문자질이다. 귀찮긴 해도, 그냥
요새 그… 이름도 생각 안 나네. 그 바람둥이 웨이터 개새끼랑 깨진 이후로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남기는 놈은 그저 우리 박지성 상무 하나 뿐이라 토 나오게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친구하지 뭐, 손님 친구'

이런 호구들도 있어야 장사가 되는 법이지. 어… 왠지 정말 없는 사람 홀려서 돈 빨아먹는 드라큘라
같은 년이 되는 거 같아서 기분 나쁘지만 아 누가 오라고 했나? 지가 오는거지? 그리고 난 잘해줬는
데. 맞어. 얼마나 서비스 잘해줬는데.

묻지도 않은 지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는데 은근히 사정도 딱하고 해서 올 때마다 서비스 잘 해줬더니
맨날 지명해주고, 또 같은 밤일(?)하는 사람이라 마음을 아는지 저번에는 왠 또 홍삼 팩을 선물로 한
박스 가져왔다. 그런거 태반이 중국산이라고 먹지 말라는 정은 언니의 소근거림에 그걸 또 시골 사람의
밝은 귀로 듣더니 "아 정관장 몰라 정관장?" 하면서 펄펄 뛰는데 확실히 먹고 나니 그 다음 날은
속이 덜 쓰린 듯 하여 고맙게 잘도 마시고 있다.  

[ 아 문자가 그게 머야 맞춤법 다 틀려서 아저씨처럼 왜 그래 ] 

답장을 보내면서 왕건이가 뱃 속에서 쑥 빠져나간다. 아, 시원하다. 바로 냄새나기 전에 물 한번
내리고, 오늘 간만에 변비 탈출이다. 아 속이 다 후련하네. 피우던 담배를 끄고 이제 비데를 하며
오늘 할 일을 생각해본다. 

'빨래 맡긴 거 좀 찾아오고…방 청소도 좀 해야되는데. 그리고, 이따가 출근하면서 네일 받고, 머리
하고… 아 삶이 너무 재미없네'

바로 옷 훌훌 벗어던지고 샤워하면서 생각한다. 하긴 저번에 정은 언니가 그랬다. 자기는 매일매일이
똑같은 것 같다고. 무슨 일을 해도 그게 어제 한 일인지 지난 주에 한 일인지도 헷깔린다는거다. 저번
에는 심지어 네일 받으러 가서 왠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거기 언니한테 "나 오늘 여기 며칠 만에 오는
거에요?" 물어봤더니 당황스러워하면서 "어제 오셨었는데요" 하더랜다. 

그 정도면 좀 심각한 건망증이지만 사실 나도 곧 그리 될 거 같다. 그래서 치매 방지책으로 휴대폰에
고스톱 받아서 몇 판 했는데 머니 좀 모을만 하만 다 쓸리고 쓸려서 혈알 올라서 관뒀다. 아, 어쩌면
돈 못 모으는건 게임이나 현실이나 그렇게 똑같냐. 난 진짜 만약에 시집가면 돈 관리는 그냥 남편에게
맡겨둬야 돼…. 물론 정말로 그럴 생각은 절대 없지만. 난 쓸 거 쓰고 살아야 돼.


씻고 나와 방부터 정리한다. 요 며칠 째 옷을 그냥 막 벗어제껴서 방이 엉망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적당히 '정리 안 하고 사는 기집애 방' 정도지만, 가끔 일하는 언니들 이야기 들어보면 미친 년들도
종종 있단다. 방에서 쥐가 나와도 안 이상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과장이 아니라 완전 말 그대로
쓰레기장을 만들어 놓고 사는 년들. 소라 언니도 그 이야기 들으면서 그랬다.

"이 중에 그러고 사는 년이 몇 년인지 몰라. 게으르고 지저분한 년들 많어 진짜"

소름 돋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친하게 지내는 언니들 중에는 그런 언니 없…으리라 믿고 일단은
방부터 치운다. 그 이야기 들은 이후로는 왠지 정말 방 청소를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런 년 되면
진짜 어떡해? 그냥 확 죽어버리는게 낫지. 

배고프고 속쓰린데 일단 청소부터 하노라니 또 문자가 온다. 확인하기 귀찮아 일단 청소기부터
돌리다가 슥 문자를 확인하니 

[ 아 못 배운걸 어떠케 말만 통하면 돼지 안 그러ㅎ냐 너만 잘 알아멱음 되 ] 

픽 웃음이 나온다. 아 웃으면 안돼. 자꾸 정주면 안 돼. 이렇게 후진 아저씨랑 엮이면 좆 돼.  
딱 그냥 비지니스야 비지니스. 그렇게 맘 먹기로 하고 일단 츄리닝 갈아입고 머리 말린다. 

'운동 가야지'

요새 운동을 안 갔더니 안 그래도 아랫배에 살이 붙는 거 같아 신경이 쓰인다. 소라 언니가 항상
주의주는게 그거다. 몸매 관리, 방심하다 훅 간다고. 그런 말하는 사람 허리가 24니까 허무하고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어쨌거나 그 언니 말대로 암만 힘들어도 하루에 런닝머신 30분씩은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하'

이러고보니 나 의외로 되게 착실하게 살고 있는데? 맞어 그리고 저번 달에 드디어 통장에 돈 
천만원을 모았다. 앞으로 딱 천만원만 더 모아서 이 일 관두고 새출발할 생각이다. 뭘 할지도
아직 안 정했지만. 가영이는 맨날 입버릇처럼 네일샵이나 내자고 하는데 난 손재주가 없어서
아마 안 될거야… 

그냥 솔직히 시집이나 가고 싶지만 갈 사람이 없다. 그 순간 한명이 떠오르면서 또 휴대폰으로
시선이 가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혼자 실없이 한참을 웃고만다. 


  (다른 편 보러가기) - [박지성 상무의 강남 야구장] 블로그- 


* 본 컨텐츠는 19세 미만의 이용자에게는 권장되지 않습니다.


tag :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703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