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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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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간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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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만이네"

바에 들어온 그녀는 악수부터 내밀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테이블 맞은 편도 아니고, 옆 자리에 바로 앉는
그녀의 모습에 난 순간적인 당황과 기쁨에 그만 픽 웃고 말았다.

"흐, 왜 웃어요?"

지도 이유를 알면서 묻는 그 모습에 난 그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어, 뭐 마실래"
"음, 글쎄? 그냥 롱 티요"

주문을 하고, 주문을 하는 김에 내 진 토닉도 한 잔 더 달라고 했다.

"오빠 우리가 보는게 얼마만이지?"

그 말과 함께 찰싹 붙어앉는 그녀에게 난 또 한번 감출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의 허벅지로 그녀의
맞닿은 허벅지를 느끼면서 난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적극적이야?"

그러자 그녀는 또 반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내 귀를 빌리더니 속삭였다.

"우리 한 잔만 마시구 바로 나가요"



최윤정.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그리고 내가 그리 하수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항상 내
머리 위에 있었다. 남자를 알고, 남자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줄도 알며,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는 그녀.

누구나 아는 '뻔한 속셈'에 대해, 아예 싫으면 처음부터 확실하게 싫다, 하고 선을 긋거나, 아니면 아예
돌아가는 것 자체를 하지 않는 그녀.

꼭 그녀 뿐만이 아니라 '내 또래'의 여자들보다 '그녀 또래'의 여자들에게서 확실히 그런 성적 자기선택
권과 자신에 대한 당당함을 좀 더 많이 느끼기는 했다. 아무래도 우리 세대 여자애들보다 '내숭'에 대한
미덕이 더 사라진 세대이고, 아직은 '내숭'이라는 이름의 방패보다는 '당당함'이라는 칼이 더 효과적인
나이라서 그런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녀 또래 여자애들보다도 훨씬 더 적극적이며 빨랐고 그러
면서도 쉽다기보다는 그저 멋있었다. 그래, 멋있었다.

가끔은 여자가 멋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위기의 순간에서 남자들보다도 더 남자다운 여자애들이 특히
더 그렇다. 윤정이도 그런 아이다. 이리저리 재고, 미적대고, 거절을 두려워하는 그런 '요즘 남자'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결단력'이 있으니까. 가끔 아주 드물게 사회에서 발견되곤 하는, 많은 여자애
들이 손에 스타벅스를 들고 꿈꾸는 '삶의 주도권을 쥔 당당한 신 여성'의 아직 어린 버전이 바로 이 윤
정이 요 기집애인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요새 회사는 잘 다니나.

"회사 끝나고 온거야?"
"아! 아니에요. 저 회사 관둔지 좀 됐어요. 두달 쯤? 그 쯤에 관뒀어요"
"왜? 그 회사 괜찮잖아? 복지도 꽤 좋고.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왜 관둬"

그녀는 오리처럼 입을 내밀더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그 귀찮게 한다는 선임 있었잖아요. 아후, 그 새끼, 내가 퇴짜 놨더니 그때부터
찌질하게 자꾸 시시건건 태클을 걸어대서…그러더니 막판에는 뭐라는 줄 알아요? '일그러진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앞으로 더 힘들어질거야' 라지 뭐에요"

그 너무나도 유치한 말에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생각치도 못했던 미친 말이라 한참을 웃다가,
윤정이가 눈물나게 웃으면서 내 팔을 계속 때리길래 "아우 아퍼" 하면서 어깨를 문지르고는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그래서 그 자리에서 뺨을 올려붙였어요. 그리고 사무실 사람들 다 들으라고 말했어요. '나 좋다고
고백했다가 까였으면, 곱게 맘 접어요. 이게 뭐에요 유치하게. 일.그.러.진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지. 알아? 무슨 혼자 연극해요? 진짜 생긴 것부터 하는 짓까지 어쩜 그렇게 다 찌질해요?' 하고 확
소리쳤죠. 회사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랬겠지. 아 과연 윤정이 답다, 라는 생각과 함께 참 어지간히도 미친 찌질이였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 뒤가 더 궁금했다. 서빙보는 가슴 큰 아가씨가 "칵테일 나왔습니다" 하며 롱 아일랜드 티와 진토닉
두 잔을 내려놓고 간 이후 윤정이는 쪼옥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왜 그런 애들 있잖아요. 지 부모 빽 믿고 세상 무서운 지 모르는 애들. 지가 원하는건 다 누려서 막
정말로 지가 잘난 줄 아는 뭐 그런 애들. 그래서 그런지 되게 좀 미성숙한 그런 스타일. 진짜 찌질이
같은 애들. 선임이 딱 그랬어요. 지 아부지가 해운회사 이사라던가? 그래서 차도 벤츠 끌고 다녀요.
거기에다 지도 연우대 출신에 우리 회사 타이틀도 있으니까 정말 지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죠.
그러다가 내가 딱 뺀찌 놓으니까 확 돌았었나봐요. 하여간에 그래서, 그렇게 나랑 대판한 이후로
회사가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 새끼는 막 당황하면서 뭔 소리 하냐고 어버버대고, 나는 딱딱거리고.
회사에 소문 다 나고 막 언니들, 동기들 여자애들한테서 저 완전 스타됐었잖아요"

흐, 그랬겠지.

"근데, 아시잖아요. 그런거 터지면 여자들 회사 생활 되게 힘들어지는거. 부장님도 부르고 실장님도
부르고, 본부장도 부르고…회사에서 나름 케어해준다고 케어하는데, 아 그게 더 부담스럽고 귀찮고
나는 뭐 요청한 적도 없는데 사내 성희롱 피해 위원회다 뭐다 구성되서 되게 시끄러워지는 분위기
라서 그냥 관둔다고 그랬어요"
"너네 회사 그런 것도 있냐? 야 시스템 잘 되어있네. 역시 그 바닥의 글로벌 회사라 이런가"

물론 그런 식으로 일이 돌아가면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지 빤한 거지만, 난 그냥 의미없이 그렇게 말을
던졌고 그녀는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아 오빠, 오빠의 유일한 단점이 뭔지 알아요?"
"뭔데"
"꼭 답을 알면서 괜히 빙빙 돌아가는거"

나는 그 말에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까워서 그러지. 너 그 회사 들어가려고 되게 고생했잖아. 그리고… 요즘 어디 취업이 쉽냐? 너가
대단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되게 어린 것도 같아서 으이구. 이 멍충아"

하지만 그녀는 내 팔에 머리를 힝 기대며 말했다.

"뭐, 굶어죽을 때 되면 오빠한테 나 먹여 살리라고 부탁하지 뭐"

난 픽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왠지 흐뭇했다. 그녀는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더니 말했다.

"오빠 나 고백받은거 알아요?"

순간의 흐뭇한 기분이 곧바로 180도 바뀌면서 싸늘한 마음이 된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미 그녀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 연인 직전, 이라고 느꼈던 그녀와의 거리감이 순식
간에 그냥 '아는 동생' 수준으로 멀어진다. 내는 애써 티 내려하지 않고 물었다. 사실 궁금했다.

"누군데"

그녀는 대답 대신 그 남자의 휴대폰 카톡 사진을 보여주었다.

'흠'

여자를 놓치면서 제일 분한게 뭔지 아는가. 차라리 완전 잘난 남자라면 순간적으론 서러움과 열등감에
욱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 앞에 '내가 그 여자라도' 하는 생각으로 포기와 합리화
가 쉬워진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솔직히 조금은 분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흠"

무어라 답을 찾기에 앞서 무슨 말로 대답을 해야할까 싶었다. 적당한 립서비스? 아니면 솔직한 대답?
그도 그럴 것이 그냥 평범한, 아니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10점 만점에 5점도 좀 아슬아슬한…소개팅
나가면 10번 중 8번은 까이고 나머지 두 번도 애프터 두어번 하고 시시하게 끝나게 될 거 같은 뭐 그런
수준의 흔한 자취남처럼 생겼는데. 차라리 언젠가 지나가듯 말하면서 사진 보여줬던 그 피트니스 트레
이너가 천 배는 더 나은 거 같은데. 적어도 외모적으로는.

"착하게 생겼네"

궁색하게 답을 한 내 말에 그녀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외모는 좀 진짜 아니죠? 근데 되게 의외의 매력이 있어요"

그랬겠지. 네 마음을 뺏은 남자라니. 아직은 고백 단계의 수준이지만 이미 여자가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반 이상은 성공한 셈이다.

"취미로 음악도 작곡하고, 아 저번에 노래도 만들어서 보내줬는데 좀 장난 아니에요. 그리고 자기
블로그에 시를 쓴대요. 저번에 한번 URL을 보내줘서 봤는데 정말…오빠 내가 시 같은거 읽는 타입
아닌거 알잖아요. 요즘 세상에 왠 시. 근데 되게 좋더라구요. 그리고 요트도 탄대요"

음악 작곡, 시 창작까지는 그냥 솔직히 애써 무시하자면 시시하고 하품부터 나오는 매력이라지만,
요트를 탄다니 좀 정말 그 외모가 떠오르면서 되게 의외다 싶고, 또 한편으로는 돈 좀 있는 집안인가
보네, 싶어서 '역시나'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 취미 생활로의 요트, 라면 대여나 강습 정도론
꼭 그렇게 엄청나게 비싸진 않다 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나는 내 스스로의 속물 근성에 실망을
느끼면서 기왕 속물인거 속물의 잣대를 들이대보고 싶어졌다.

"뭐하는 사람인데? 직장인이야?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네, 직장인이에요. 그냥 조그만한 출판사에서 일한대요. 희수 언니 있잖아요, 그 언니랑 아는 사이
인데 페이스북 타고 나보더니 완전 꽂혔대나? 그래서 희수 언니 졸라서 셋이서 같이 밥 먹었는데…"

이쯤에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아까 그녀가 바의 문을 열고 들어와 옆자리에 털썩, 앉을 때 그녀
에게서 느끼던 그 엄청난 설렘과 매력은 지금 그냥, 심지어 그녀의 이야기조차 듣기 따분하고 지루
할 정도로 그저 그렇게 됐다. 설레여서 다른  남자 이야기나 따따부따 쏟아내는 여자에게 그 무슨
매력을 느끼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그런 주제에 아까 한 잔 마시고 바로 모텔이라도
가자는 말은 또 뭐야' 하는 뚱- 한 생각마저 들었다.

"오빠"
"어?"
"오빠 내 말 듣기 싫죠?"

'내 말 재미없어요?'나 '피곤해요?'처럼 얼마든지 돌려말할 수 있을텐데 언제나 정곡을 찔러오는
그녀. 그리고 아까는 그토록이나 그녀의 장점처럼 느껴졌던 그것조차 왜 이렇게… 아, 나도 참
되게 유치한 남자구나. 

"아니, 왜?"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른 남자 이야기해서 기분 안 좋았어요?"

나는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 별로. 아까는 엄청엄청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확 가라앉네"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으면서 대뜸 내 입술에 입을 가져왔다. 나는 정말 순간적으로 고민했고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했지만 굳이 주는 입술을 거부할 필요까지야…

뽀뽀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어른스러웠고, 키스라고 하기에는 짧았던 그 순간적인 입맞춤이 지나가고
그녀는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나는 괜히 찔러보았다.

"뽀뽀 한 번으로 퉁 치려는거야?"

말한 직후 그 찌질함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스스로를 저주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의 제일 큰 매력이 뭔지 알아요? 되게 사람이 알기 쉽다는거"

내 전 여친들은 오히려 나를 도통 모르겠다면서 헤어졌는데. 어쨌거나 그녀는 다시 칵테일을 쭈욱 마시
더니 말했다.

"나 아직 그 남자랑 사귀는거 아니에요. 매력은 분명 있지만, 아직은 오빠한테도 기회 있고,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아직까지는 오빠가 1등이에요"

마음이 조금 풀어지기는 했지만, 정말로 썩 싫진 않은 그런 말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좀 아직까지는
왠지 모를 서운함의 여운도 좀 남아있고 어쨌거나 '다른 유력한 경쟁자'의 부상이 짜증나기도 하고 
그 경쟁 상대가 그다지 전투의지를 불태우게 만들 정도로 유능하지도, 또 왠지 무엇보다 그녀에게
휘둘리게 되는 듯 해서 좀, 싫었다.

"그래서, 내가 확실하게 압도적인 리드를 더 벌려주길 바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윤정이한테 서운한 생각을 가져도 될 정도로 그녀에게 잘했는가. 그저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에 자주 만나면 서로 즐겁고, 재작년의 크리스마스 이후로 둘이 종종 잠자리도
몇 번인가 가졌고, 분명 다른 여자애들과는 달리 무언가 '특별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딱히 무엇인가를 기대해도 좋을만큼 그녀에게 잘했는가. 어쩌면 나는 그저
그녀와의 부담없는 그런 관계에 대해 무언가 큰 착각, 이기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막연하게 '얘는 이런 관계가 편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그녀가 바랬
던 것은 그저 평범한, 그런 남녀관계가 아니었을까. 정말 그랬다면 나는 그녀에게 지난 몇 년간 무슨
잔인한 짓을 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생각에 도장을 찍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순간 나는 가슴이 매우 아파옴을
느꼈다. 그저 '바람같은 여자'라고만 생각했던 그 착각이 그 얼마나 그녀를 힘들게 했을까. 아니 이건
그저 나 혼자만의 과도한 생각일까. 어쨌거나 그 짧은 반성과 함께 나는 그녀를 살짝 끌어앉았다.
의자이다보니 조금 자세가 불편했지만 그녀는 내 품에 안겨서 "오빠가 좋아" 라고 속삭였다.

"나도"

그렇게 잠깐 사람들도 있는 바에서 닭살 돋는-다행히 사람은 저기 구석의 직장인 아저씨 무리 넷 밖에
없지만- 행각을 한 뒤에 우리는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윤정이는 휴대폰을 들어 아까 그 남자
에게 문자를 보냈다.

[ 태준 오빠, 오빠는 정말 멋진 사람이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요. 그러니 그냥 친구로만
지내요 ]

보내기 직전 그녀는 그 내용을 나에게 보여주었고 나는 그저 콧바람만 내뿜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내자마자 득달같이 전화가 걸려왔지만 윤정이가 받지않자 한번 더 걸려왔고
그때도 받지않자 잠시 후 답장이 왔다.

[ 그래요, 윤정씨 우리 좋은 친구로 지내요 그건 괜찮죠? ]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데"

나의 말에 그녀도 웃더니 "이러고 보니까 이 남자 되게 매력없네? 뭐야 싫다니까 바로 포기하는건"
하고 내 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나가요. 남친아"

그 말에 나도 그만 새삼 가슴이 부풀어오름을 느끼면서 잔을 슥 치우면서 말했다.

"그래, 여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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