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서 내린 성현은 뜬금없이 뒤늦게 그녀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오늘 너 되게 이쁘다?"
"치"
성현의 칭찬에 정은은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밤, 고수부지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노라니
조금은 속이 뚫리는 듯 하면서도, 왠지 외로움이 가슴 속에 내려 앉았다. 그런 정은을 뒤에서 슥
성현이 가볍게 안았다. 솔직히…그 기분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이거 놔"
"놔주기 싫은데"
"아 빨리"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만 더 끌어안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실망스럽게도 성현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었고 정은은 짜증을
느꼈다.
"이러지 말라구"
갑작스러운 정색에 내심 움찔한 듯 성현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정은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아 보았다.
"이러지 말라구. 나 이러면 오빠 못 봐, 아니 안 봐"
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의 성현도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너 언제까지 그 남자 만날건데. 걔가 너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한대니? 그런 애가 너 이렇게 냅둬?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너도 그 남자한테 이미 실망하고 있잖아"
성현의 마지막 말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정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녀는 겨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건 오빠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야"
성현은 그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 그 사람이 뭐, 너한테 잘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근데 정말, 니가 생각해 봐. 너 정말로 그
사람이 좋아? 너한테 아무 것도 못해주는 그런 놈이 좋냐고. 하다못해 이렇게 너 답답하고 외로울 때
지금 그 사람 뭐하고 있는데? 주말 밤에, 여자친구가 아침부터 다른 남자랑 하루종일 이렇게 있는데
전화 한 통 없는 그런 남자가, 그게 남자친구야? 너 정말 그런 남자로 만족해?"
성현의 그 말에, 정은은 간신히 가려놓은 아픈 가슴을 누군가가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
호흡이 막힐 정도로 힘듦을 느꼈다. 정은은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오빠까지 이러지 마… 나 지금 정말 많이 힘들어…"
그리고 그런 정은을 성현이 끌어안았다. 그 따뜻한 가슴에 안겨 정은은 눈물을 흘렸다. 성현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게 정은의 울음보를 터뜨렸다. 정은은 뜨거운 눈물로 성현의 가슴팍을 적시며,
순간 처음으로…그저 '친근한 오빠'였던 성현을 남자로 느꼈다. 정은이 자신의 그 마음에 놀라 성현을
다시 뿌리치려 했지만 성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너 놓치기 싫어"
정은은 자신을 끌어안은 성현의 품에서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은은 계속 말이 없었다. 성현이 라디오라도 틀까 했지만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성현의 한숨. 정은은 그저 말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정신을 차리자 정은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정은은 내리려 하지 않았고, 성현은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극심한 혼란스러움 속에 입이 마르고 숨막히는 심장의 조임을 느끼는 그 순간,
성현이 말했다.
"이정은, 나 오늘 너랑 자고 싶다"
평소였다면 웃음으로 넘기거나, 아니면 정색을 해서라도 뿌리쳤을 그 말.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 말. 히터를 틀었음에도 정은은 오한을 느꼈다. 마치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빠"
그리고 정은의 그 말에 울음기와 최대한의 인내가 섞여있음은 둘 다 느낄 수 있었다. 성현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정은이 말을 이었다.
"…나 아직 그 남자 좋아해"
무엇인가 은근했던 분위기가 끊어지고, 둘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가슴은 천근
만근 뛰기 시작했고, 몸에서는 열이 나는 듯 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성현의 차가운 말…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에서 정은은 그 이유를 찾았다.
"그 사람은 오빠와 달라"
성현의 긴 한숨. 정은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래, 맞어. 나 오빠도 좋아해. 근데… 오빠는 내가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꼭
언제라도 떠나버릴 것만 같고… 가끔은 너무 차갑고…"
"니 지금 남자친구는, 영원히 니 곁에 있어줄 것 같니?"
정은의 말을 끊은 성현의 말.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면 정은은 분명 그럴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그 믿음에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성현은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난 니가… 니가 그 남자만 바라보고, 또 그 남자가 너만 바라보면… 후우. 모르겠다.
그 남자가 정말로 너에게 어떤 마음으로 대했고 또 어떻게 해주었길래 니가 이렇게 그 남자만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나는…"
"내 말 끝까지 들어"
성현은 창문을 조금 내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냉정하게 말할게. 남자는 남자를 알아. 내가 봤을 때, 니 남자친구, 그래, 뭐 지금 너한테는
헌신적일지도 몰라. 그런데 너, 정말 그 남자로 행복하니? 정말로 지금 가슴 벅찬 연애를 하고
있어? 너한테 뭘 해주는데. 니가 바라는거 단 하나라도 이뤄줄 수 있니? 하아… 내가 봤을 때
너 남자친구, 배경조건을 다 떠나서라도…"
성현은 차마 거기까지 대답하다가 그 이상은, 아니 이미 너무 말해서는 안되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핸들에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후우, 이정은, 이제 내가 너 포기하련다. 들어가. 니가 어찌되던, 이제 더이상 신경 안 쓸래"
정은은 눈물을 닦고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00시 25분. 결국 끝내 어제 하루동안 남친 현우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석의 성현은 울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쉰 정은.
그녀는 말했다.
"오빠도 싫고, 우리 오빠도 싫어. 이제 남자는 다 싫어"
그 말과 함께 안전벨트를 푸는 그 순간, 몸을 일으킨 성현이 그녀를 어깨를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성현의 눈을 보는 순간 정은은 차갑게 내려앉았던 가슴이 다시 불을 지피듯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성현의 입술이 다가옴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은 까칠한 듯 하면서도 촉촉한 입술… 그리고 내 볼에 전해져 온 성현의 따뜻한 눈물을
느끼며 정은은 살짝 눈을 떴다. 가늘게 떨리는 성현의 여자처럼 긴 속눈썹… 눈물에 젖은
성현의 눈을 보면서 정은은 성현을 끌어안았다. 둘의 입맞춤은 어느새 진한 키스로 이어졌다.
"잠깐만…"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 순간… 정은은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떨림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진한 키스에 이어 성현의 능숙한 손길이 그녀의 몸 곳곳을 더이상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달아오르게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손에 꼭 쥔 휴대폰은 여전히 울릴 줄을 모르고 정은은
어깨를 떨었다.
하다못해 성현이 조금만 거칠게, 하다못해 말이라도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면
정은은 그것을 빌미로 성현을 뿌리쳤겠지만 성현은 그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야속
할 정도로 미웠지만, 이미 그녀에게 그를 거부할 명분은 사라져 있었다.
"…들어가요"
정은은 먼저 그 말을 하면서 차 문을 열었다. 이미 차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텔의 발렛파킹
맨은 성현에게 키를 받아 주차를 마무리 지었고, 성현은 정은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속에 성현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정은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타고 3층으로 가세요"
여자 관리인의 지시에 따라 쩔렁거리는 키와 소모품 팩을 받아들고 성현과 정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은은 가볍게 손으로 코를 가렸고 그런 정은의
허리를 안은 성현은 어두운 복도를 익숙한 발걸음으로 안내했다. 309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역시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성현은 가죽 재킷을
벗으며 창문을 열었다. 깊은 밤, 간간히 들리는 먼 차소리가 다시 한번 정은의 마음을 떨게했다.
구두를 벗고, 혹사당한 발이 그제서야 살짜기 통증을 호소할 무렵 성현은 그녀를 안고 다시 한번
입맞춤을 해댔다. 가볍게 정은이 그를 밀어내자 성현은 순순히 그녀의 코트를 받아들고는 옷걸이에
걸었다.
"먼저 씻을래?"
성현의 말에 정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샤워실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정은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이 일탈에 엄청난
후회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이제 현우와 성현 이 두 남자를
모두 보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빗줄기에
눈물을 흘려보내면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물을 껐다. 김이 낀 세면대 거울을 슥슥 닦아내고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의 화장실보다도
훨씬 어두운 이 모텔의 붉은 전구등 아래서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문득 휴대폰을 테이블 위
에 올려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성현이 보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아니 믿지 않아
도 이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녀는 바디샤워의 거품을 내었다.
샤워가운을 입고 나온 정은. 씻고 나오자 뭔가 조금은 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있는 남자가 현우가 아닌 성현이라는 사실에서 다시 곧 현실의 엄청난 무게감을 느꼈다.
"나 씻고 올게"
성현은 다른 말 대신 짧은 그 말과 함께 샤워실로 들어섰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정은은
침대 위에 올랐다. 뽀송뽀송한 흰 솜이불에 그녀는 조금 떨림이 멎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에 아주 깊은 후회를 느꼈다.
만약…
아까 성현의 차에서 그냥 바로 내렸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성현의 카톡에 대답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하다못해 아까 주차장에서 잠깐, 하고 머뭇거렸을 때 그냥 내렸다면, 그래서 집으로 향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미 그녀는 성현과 함께 모텔에 와있고, 이미 샤워까지 마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
했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은 이 떨림… 죄책감? 설레임? 아니면… 아니.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것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성현이 멋진 남자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비교해도 현우와
비교했을 때 외모, 말재주, 남자로서의 매력, 융통성, 능력, 가능성, 사회적 입지… 그 모든 것이 나았
다. 하지만, 하지만 정은에게 있어서 현우는…
문득 언젠가…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현우의 외할머니 댁에 같이 놀러갔을 때, 그 여름날 밤 현우와
함께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 그가 그랬었다.
"정은아, 나는… 솔직히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나같이 뭐 하나 잘난 거 없는 놈한테 너같이 예쁘고
착한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는게, 너무나 고맙고, 음, 고마워.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로 아직까지도 네가… 곁에 있어주는 그 자체가 가슴이 떨리고 좋다? 하하, 나 되게 유치하다.
여튼 그래. 만약에 내가 나중에 혹시라도 너를 서운하게 하면, 그건 내 마음이 식거나 변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잠깐 다른 뭐에 좀 몰두를 하다가 잠깐 그렇게 된게 뻔하니까…
그때는 확 혼내줘. 그럼 다시 오늘의 나로 돌아올께. 미리 미안하다고 해둘께. 알았지? 만약에 내가
좀 서운하게 했다고 나 버리고 그럼 안된다? 어?"
그 기억이 떠오른 정은은 그만 미안함에 눈물을 왈칵 흘렸다. 너무 미안했다. 지금 내가 뭘 하는거지
도대체 난 뭐하고 있는거야… 물줄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정은은 혹시
라도 자신의 우는 소리가 샤워실에 들릴까 싶어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정은은 그 미안함의 눈물을 한껏 흘려보낸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샤워가운을 벗고 다시
TV 테이블 옆에 정갈히 쌓아둔 옷들을 챙겨입었다. 그러나 속옷에 이어 치마까지 입었을 무렵, 다
씻은 성현이 허리에 긴 수건 하나만 두른채 나왔다.
"…정은아"
난감한 듯 입술을 살짝 핥은 성현은 정은의 이름을 불렀다. 정은은 어찌하면 좋을까 그저 망연자실한
채 한 손으로는 브래지어만 한 가슴을 가리고, 한손으로는 자크를 채우지 못한 치마를 엉거주춤 붙잡은
자세로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마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성현은 픽 웃었다. 그래, 만약, 만약 여기서 성현이 조금이라도 화를 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저 힘없이 두 팔을 내리뜨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성현이
가만히 안아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TV까지 끈 채로, 성현은 알몸인 채로, 정은은 속옷만 입은 채로 침대에
그렇게 가만히 누웠다. 불과 10cm 정도의 거리를 둔 채였지만 그 거리는 마치 10m라도 되는 양 그
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입 속까지 바짝 마른 성현의 입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느껴
지는 그 절대적인 침묵. 그리고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은의 휴대폰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새벽의, 원목 재질 TV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은 어쩌면 저리도 클까. 그 진동은 마치
고성과도 같이 느껴졌다. 다섯 번이 울릴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곱번, 여덟번, 아홉
번, 열 번…
그리고 서서히 정은은 몸을 일으켰다. 성현이 그녀의 팔을 제지했지만 정은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향해 다가갔다.
"정은아"
뒤에서 성현이 그녀를 불렀음에도 그녀는 그 휴대폰을 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들고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잔뜩 굳었던 성현의 얼굴이 이완되는 것이 확연하게 느
껴지는 그 순간, 더이상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후우"
정은이 가벼운, 그러나 무거운 한숨을 내쉴 무렵 그녀의 손에서 다시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남자'
만약 1시간만, 먼저 전화를 걸었더라면 이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텐데. 현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매번 10번이 넘는 통화음과 함께 그렇게 정확히 4번이 걸려왔다.
"어떻게 할거야"
그 답답함과 불안에 성현이 먼저 지쳤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정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정은은 현우에게서 걸려온 다섯 번째 전화를, 이번에는
받았다.
"여보세요"
성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정은의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정은은 그 이후로
한참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알았어, 나 이제 잘거야. 피곤해"
방 안에 작게 울리는 그 한 마디. 그리고 전화를 끊기까지 남자의 무언가 '한 마디'가 있었음직한
텀을 두고 정은은 전화를 끊었다. 그 휴대폰을 이번에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현우가 뭐래"
성현의 질문에 정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눕더니 손을 뻗어 성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왔다. 정은의 가늘게 떨리는 가슴에 성현이 스윽
몸을 반쯤 일으키자 정은은 또 그를 제지했다.
"그냥, 이대로, 안아주기만 하면… 안 돼?"
아주 힘없이 묻는 그녀의 말에, 성현은 그저 픽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무엇이 우스운지
혼자 바람 빠진 풍선같은 웃음을 한참 웃은 뒤, 침대 옆의 스탠드 등을 껐다.
"오늘 너 되게 이쁘다?"
"치"
성현의 칭찬에 정은은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밤, 고수부지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노라니
조금은 속이 뚫리는 듯 하면서도, 왠지 외로움이 가슴 속에 내려 앉았다. 그런 정은을 뒤에서 슥
성현이 가볍게 안았다. 솔직히…그 기분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이거 놔"
"놔주기 싫은데"
"아 빨리"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만 더 끌어안아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나 실망스럽게도 성현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었고 정은은 짜증을
느꼈다.
"이러지 말라구"
갑작스러운 정색에 내심 움찔한 듯 성현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졌고, 정은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뒤돌아 보았다.
"이러지 말라구. 나 이러면 오빠 못 봐, 아니 안 봐"
하지만 장난스러운 표정의 성현도 어느새 진지해져 있었다.
"너 언제까지 그 남자 만날건데. 걔가 너 진지하게 생각하기는 한대니? 그런 애가 너 이렇게 냅둬?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너도 그 남자한테 이미 실망하고 있잖아"
성현의 마지막 말에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정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지만,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녀는 겨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건 오빠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야"
성현은 그 말에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그래, 그 사람이 뭐, 너한테 잘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어. 근데 정말, 니가 생각해 봐. 너 정말로 그
사람이 좋아? 너한테 아무 것도 못해주는 그런 놈이 좋냐고. 하다못해 이렇게 너 답답하고 외로울 때
지금 그 사람 뭐하고 있는데? 주말 밤에, 여자친구가 아침부터 다른 남자랑 하루종일 이렇게 있는데
전화 한 통 없는 그런 남자가, 그게 남자친구야? 너 정말 그런 남자로 만족해?"
성현의 그 말에, 정은은 간신히 가려놓은 아픈 가슴을 누군가가 후벼파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순간
호흡이 막힐 정도로 힘듦을 느꼈다. 정은은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꼭 쥐었다.
"오빠까지 이러지 마… 나 지금 정말 많이 힘들어…"
그리고 그런 정은을 성현이 끌어안았다. 그 따뜻한 가슴에 안겨 정은은 눈물을 흘렸다. 성현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게 정은의 울음보를 터뜨렸다. 정은은 뜨거운 눈물로 성현의 가슴팍을 적시며,
순간 처음으로…그저 '친근한 오빠'였던 성현을 남자로 느꼈다. 정은이 자신의 그 마음에 놀라 성현을
다시 뿌리치려 했지만 성현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너 놓치기 싫어"
정은은 자신을 끌어안은 성현의 품에서 그렇게 한참을 안겨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은은 계속 말이 없었다. 성현이 라디오라도 틀까 했지만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가벼운 성현의 한숨. 정은은 그저 말없이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정신을 차리자 정은의 집 앞이었다. 하지만 정은은 내리려 하지 않았고, 성현은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극심한 혼란스러움 속에 입이 마르고 숨막히는 심장의 조임을 느끼는 그 순간,
성현이 말했다.
"이정은, 나 오늘 너랑 자고 싶다"
평소였다면 웃음으로 넘기거나, 아니면 정색을 해서라도 뿌리쳤을 그 말.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 말. 히터를 틀었음에도 정은은 오한을 느꼈다. 마치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빠"
그리고 정은의 그 말에 울음기와 최대한의 인내가 섞여있음은 둘 다 느낄 수 있었다. 성현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정은이 말을 이었다.
"…나 아직 그 남자 좋아해"
무엇인가 은근했던 분위기가 끊어지고, 둘 사이에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무거운 가슴은 천근
만근 뛰기 시작했고, 몸에서는 열이 나는 듯 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성현의 차가운 말… 그리고 그제서야 그 말에서 정은은 그 이유를 찾았다.
"그 사람은 오빠와 달라"
성현의 긴 한숨. 정은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래, 맞어. 나 오빠도 좋아해. 근데… 오빠는 내가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꼭
언제라도 떠나버릴 것만 같고… 가끔은 너무 차갑고…"
"니 지금 남자친구는, 영원히 니 곁에 있어줄 것 같니?"
정은의 말을 끊은 성현의 말.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면 정은은 분명 그럴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그 믿음에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성현은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정말로, 난 니가… 니가 그 남자만 바라보고, 또 그 남자가 너만 바라보면… 후우. 모르겠다.
그 남자가 정말로 너에게 어떤 마음으로 대했고 또 어떻게 해주었길래 니가 이렇게 그 남자만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빠 나는…"
"내 말 끝까지 들어"
성현은 창문을 조금 내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냉정하게 말할게. 남자는 남자를 알아. 내가 봤을 때, 니 남자친구, 그래, 뭐 지금 너한테는
헌신적일지도 몰라. 그런데 너, 정말 그 남자로 행복하니? 정말로 지금 가슴 벅찬 연애를 하고
있어? 너한테 뭘 해주는데. 니가 바라는거 단 하나라도 이뤄줄 수 있니? 하아… 내가 봤을 때
너 남자친구, 배경조건을 다 떠나서라도…"
성현은 차마 거기까지 대답하다가 그 이상은, 아니 이미 너무 말해서는 안되는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핸들에 머리를 숙인 채 말했다.
"후우, 이정은, 이제 내가 너 포기하련다. 들어가. 니가 어찌되던, 이제 더이상 신경 안 쓸래"
정은은 눈물을 닦고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00시 25분. 결국 끝내 어제 하루동안 남친 현우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운전석의 성현은 울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쉰 정은.
그녀는 말했다.
"오빠도 싫고, 우리 오빠도 싫어. 이제 남자는 다 싫어"
그 말과 함께 안전벨트를 푸는 그 순간, 몸을 일으킨 성현이 그녀를 어깨를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성현의 눈을 보는 순간 정은은 차갑게 내려앉았던 가슴이 다시 불을 지피듯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성현의 입술이 다가옴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조금은 까칠한 듯 하면서도 촉촉한 입술… 그리고 내 볼에 전해져 온 성현의 따뜻한 눈물을
느끼며 정은은 살짝 눈을 떴다. 가늘게 떨리는 성현의 여자처럼 긴 속눈썹… 눈물에 젖은
성현의 눈을 보면서 정은은 성현을 끌어안았다. 둘의 입맞춤은 어느새 진한 키스로 이어졌다.
"잠깐만…"
모텔 주차장에 차를 세운 그 순간… 정은은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지만…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는 가슴떨림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진한 키스에 이어 성현의 능숙한 손길이 그녀의 몸 곳곳을 더이상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달아오르게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손에 꼭 쥔 휴대폰은 여전히 울릴 줄을 모르고 정은은
어깨를 떨었다.
하다못해 성현이 조금만 거칠게, 하다못해 말이라도 그녀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면
정은은 그것을 빌미로 성현을 뿌리쳤겠지만 성현은 그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야속
할 정도로 미웠지만, 이미 그녀에게 그를 거부할 명분은 사라져 있었다.
"…들어가요"
정은은 먼저 그 말을 하면서 차 문을 열었다. 이미 차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텔의 발렛파킹
맨은 성현에게 키를 받아 주차를 마무리 지었고, 성현은 정은의 어깨를 감싸안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속에 성현이 계산을 마칠 때까지 정은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타고 3층으로 가세요"
여자 관리인의 지시에 따라 쩔렁거리는 키와 소모품 팩을 받아들고 성현과 정은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정은은 가볍게 손으로 코를 가렸고 그런 정은의
허리를 안은 성현은 어두운 복도를 익숙한 발걸음으로 안내했다. 309호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역시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고,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마자 성현은 가죽 재킷을
벗으며 창문을 열었다. 깊은 밤, 간간히 들리는 먼 차소리가 다시 한번 정은의 마음을 떨게했다.
구두를 벗고, 혹사당한 발이 그제서야 살짜기 통증을 호소할 무렵 성현은 그녀를 안고 다시 한번
입맞춤을 해댔다. 가볍게 정은이 그를 밀어내자 성현은 순순히 그녀의 코트를 받아들고는 옷걸이에
걸었다.
"먼저 씻을래?"
성현의 말에 정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샤워실로 들어섰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정은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이 일탈에 엄청난
후회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이제 현우와 성현 이 두 남자를
모두 보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빗줄기에
눈물을 흘려보내면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물을 껐다. 김이 낀 세면대 거울을 슥슥 닦아내고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집의 화장실보다도
훨씬 어두운 이 모텔의 붉은 전구등 아래서 그녀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문득 휴대폰을 테이블 위
에 올려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성현이 보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를 믿기로 했다. 아니 믿지 않아
도 이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녀는 바디샤워의 거품을 내었다.
샤워가운을 입고 나온 정은. 씻고 나오자 뭔가 조금은 개운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있는 남자가 현우가 아닌 성현이라는 사실에서 다시 곧 현실의 엄청난 무게감을 느꼈다.
"나 씻고 올게"
성현은 다른 말 대신 짧은 그 말과 함께 샤워실로 들어섰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정은은
침대 위에 올랐다. 뽀송뽀송한 흰 솜이불에 그녀는 조금 떨림이 멎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에 아주 깊은 후회를 느꼈다.
만약…
아까 성현의 차에서 그냥 바로 내렸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애초에 성현의 카톡에 대답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하다못해 아까 주차장에서 잠깐, 하고 머뭇거렸을 때 그냥 내렸다면, 그래서 집으로 향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미 그녀는 성현과 함께 모텔에 와있고, 이미 샤워까지 마쳤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
했다.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은 이 떨림… 죄책감? 설레임? 아니면… 아니. 그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것까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성현이 멋진 남자라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비교해도 현우와
비교했을 때 외모, 말재주, 남자로서의 매력, 융통성, 능력, 가능성, 사회적 입지… 그 모든 것이 나았
다. 하지만, 하지만 정은에게 있어서 현우는…
문득 언젠가…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현우의 외할머니 댁에 같이 놀러갔을 때, 그 여름날 밤 현우와
함께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 그가 그랬었다.
"정은아, 나는… 솔직히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나같이 뭐 하나 잘난 거 없는 놈한테 너같이 예쁘고
착한 사람이 곁에 있어준다는게, 너무나 고맙고, 음, 고마워.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정말로 아직까지도 네가… 곁에 있어주는 그 자체가 가슴이 떨리고 좋다? 하하, 나 되게 유치하다.
여튼 그래. 만약에 내가 나중에 혹시라도 너를 서운하게 하면, 그건 내 마음이 식거나 변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잠깐 다른 뭐에 좀 몰두를 하다가 잠깐 그렇게 된게 뻔하니까…
그때는 확 혼내줘. 그럼 다시 오늘의 나로 돌아올께. 미리 미안하다고 해둘께. 알았지? 만약에 내가
좀 서운하게 했다고 나 버리고 그럼 안된다? 어?"
그 기억이 떠오른 정은은 그만 미안함에 눈물을 왈칵 흘렸다. 너무 미안했다. 지금 내가 뭘 하는거지
도대체 난 뭐하고 있는거야… 물줄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정은은 혹시
라도 자신의 우는 소리가 샤워실에 들릴까 싶어 이불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정은은 그 미안함의 눈물을 한껏 흘려보낸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샤워가운을 벗고 다시
TV 테이블 옆에 정갈히 쌓아둔 옷들을 챙겨입었다. 그러나 속옷에 이어 치마까지 입었을 무렵, 다
씻은 성현이 허리에 긴 수건 하나만 두른채 나왔다.
"…정은아"
난감한 듯 입술을 살짝 핥은 성현은 정은의 이름을 불렀다. 정은은 어찌하면 좋을까 그저 망연자실한
채 한 손으로는 브래지어만 한 가슴을 가리고, 한손으로는 자크를 채우지 못한 치마를 엉거주춤 붙잡은
자세로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마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성현은 픽 웃었다. 그래, 만약, 만약 여기서 성현이 조금이라도 화를 냈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저 힘없이 두 팔을 내리뜨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성현이
가만히 안아주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그렇게 TV까지 끈 채로, 성현은 알몸인 채로, 정은은 속옷만 입은 채로 침대에
그렇게 가만히 누웠다. 불과 10cm 정도의 거리를 둔 채였지만 그 거리는 마치 10m라도 되는 양 그
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입 속까지 바짝 마른 성현의 입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느껴
지는 그 절대적인 침묵. 그리고 바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정은의 휴대폰이었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우우우우우우우우웅-
새벽의, 원목 재질 TV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휴대폰 진동음은 어쩌면 저리도 클까. 그 진동은 마치
고성과도 같이 느껴졌다. 다섯 번이 울릴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곱번, 여덟번, 아홉
번, 열 번…
그리고 서서히 정은은 몸을 일으켰다. 성현이 그녀의 팔을 제지했지만 정은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휴대폰을 향해 다가갔다.
"정은아"
뒤에서 성현이 그녀를 불렀음에도 그녀는 그 휴대폰을 집었다. 하지만 그녀는 혼자 고개를 저으며
휴대폰을 들고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잔뜩 굳었던 성현의 얼굴이 이완되는 것이 확연하게 느
껴지는 그 순간, 더이상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후우"
정은이 가벼운, 그러나 무거운 한숨을 내쉴 무렵 그녀의 손에서 다시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바보 같은 남자'
만약 1시간만, 먼저 전화를 걸었더라면 이 마음이 이렇게 불편하지는 않았을텐데. 현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매번 10번이 넘는 통화음과 함께 그렇게 정확히 4번이 걸려왔다.
"어떻게 할거야"
그 답답함과 불안에 성현이 먼저 지쳤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정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정은은 현우에게서 걸려온 다섯 번째 전화를, 이번에는
받았다.
"여보세요"
성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고, 정은의 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정은은 그 이후로
한참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한 마디 했다.
"알았어, 나 이제 잘거야. 피곤해"
방 안에 작게 울리는 그 한 마디. 그리고 전화를 끊기까지 남자의 무언가 '한 마디'가 있었음직한
텀을 두고 정은은 전화를 끊었다. 그 휴대폰을 이번에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현우가 뭐래"
성현의 질문에 정은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 눕더니 손을 뻗어 성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왔다. 정은의 가늘게 떨리는 가슴에 성현이 스윽
몸을 반쯤 일으키자 정은은 또 그를 제지했다.
"그냥, 이대로, 안아주기만 하면… 안 돼?"
아주 힘없이 묻는 그녀의 말에, 성현은 그저 픽 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무엇이 우스운지
혼자 바람 빠진 풍선같은 웃음을 한참 웃은 뒤, 침대 옆의 스탠드 등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