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돌아온 성일은 아무 말 없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청문감사관 이형진은 이번 청문회
최대의 이슈로 불거진 성일의 전 연애에 대해 다시 물었다.
"김성일씨는 지난 연애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형진의 물음에 성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타이밍"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어 대답했다.
"만약, 전 여친과 차라리 아예 일찍, 그러니까 뭐 예를 들어 우리 둘 모두가 대학생이라서 미래에 대한
부담없는 그런 연애를 했다거나, 아니면 아예 지금처럼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자리가 잡힌 이후에 만났
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의례 그렇듯이 사회 새내기들의 연애라는 것은 이제
피차 미래에 대한 고민도 커지고 또 미숙한 현재에 대한 불안도 큰 시기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연애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유지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성일의 답변에 형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물었다.
"그러한 시기나 관계에 대한 총론 말고, 각론 차원에서의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그러자 형진은 입맛을 다시며 고민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뭐,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는 다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에 대한 설레임이 식고, 변화가 적어진
연애 패턴에 대한 루즈함도 있고, 사실 성격적으로 둘이 좀 맞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었던 것이 사실
입니다. 그녀는 외형적이며 선 굵은 그런 면을 저에게 바랬고, 저는 또 남자치고는 조금 섬세한 편이고
약간 내성적인 면도 있었구요"
형진은 여전히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지난 2008년 11월 16일, 그러니까 전 여자친구분, 아, 신상보호를 위해
본 청문회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가영'이라고 가명으로 부르겠습니다. 가영씨가 몸살로 드러누웠던
시간, 무엇을 하시고 계셨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성일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물론 가영이가 아프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끙끙 앓고 있는 중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3년만에 모처럼 연락이 닿은 대학동기의 술자리 제안이 있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나갔던 것입니다"
형진은 자신의 데스크에서 한 보고서를 꺼내 들더니 보여주었다.
"당시의 문자 메세지 기록입니다. 오후 9시 35분, 가영씨는 성일씨에게 '오빠 나 많이 아프다' 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일씨는 가영씨에게 곧바로 '어쩌니;; 병원은 다녀왔어?' 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네"
성일의 대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물었다.
"왜 바로 전화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자리 모임이라는게, 아시다시피 한창 흥이 오른 타이밍에서는 전화가 사실 쉽지 않은거 아닙니까.
그리고 일단은 문자 답장을 보냈고, 그래서 그 재답장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방청석의 수근거림은 그다지 좋지 않은 분위기였고, 그에 낭패감을 느낀 듯 성일은 부언했다.
"아 물론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재답장이 이후 오지 않았던 만큼 늦어도 한 30분 후쯤엔
전화라도 했어야 하는게 맞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이미 술이 제법 들어간 상태였고, 워낙
술자리의 분위기가 뜨거웠던지라 잠시 잊었, 아니 잊었다기 보다는 끝나고 바로 그녀의 자취방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안 찾아가셨잖습니까"
"필름이 끊겨서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저 역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성일의 다급한 목소리에 비해 차분한 형진은 이어 바로 본 청문회 최대의 쟁점사항을 캐물었다.
"그리고 성일씨는 그날, 대학동기였던, 아 역시 가명으로 은진,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
은진씨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인근의 모텔방에서 말입니다"
방청석에서는 곧바로 "에라이 쓰레기 새끼"하는 욕설과 웅성거림이 터져나왔다. 성일은 항변했다.
"저는, 맹세컨데, 정말로 기억이 없습니다. 저 역시 아침에 눈을 뜨고 옆에 유, 아니 은진이가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 역시 벌컥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느냐고 말입니다"
형진은 성일의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증인신청합니다. 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인 한은진씨의
진술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의장에게 허가를 부탁했다. 의장은 참고인 진술을 승락했다.
"에, 신상보호를 위해 가명과 블라인드 시트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은진씨, 선서해주십시오"
"네, 본인은 본 청문회장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은 맹세합니다"
은진의 선서가 끝나자 형진은 곧바로 물었다.
"한은진씨, 당시 성일씨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만취 상태였습니까?"
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취…까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답변에 성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형진은 물었다.
"먼저 모텔에 가자는 말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골적인 질문이라 그랬는지 잠시 답변을 주저했던 그녀는 "진실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라는
형진의 말에 곧 대답했다.
"성일이었습니다"
"거짓말!"
성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지만 청문회 의장의 준엄한 눈길에 진정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
았다. 은진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그 술자리에는 저와 성일, 그리고 다른 대학 동기인 형표, 준수가 있었습니다"
연애청문회의 특성상 참고인들의 본명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은진은 그것을 잘 몰랐던 터라
실명을 언급했고 감사관 형진은 조금 난처해했지만 의장의 승인 하에 그대로 증언은 계속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간만에 만난 성일에게 저는 호감을 느꼈고, 술자리에서 제가 먼저 계속 스킨십을
시도했고, 성일이도, 처음에는 조금 미적댔지만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 증언에 방청석에서는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지만 의장이 곧 제지했고 다시 은진은 말했다.
"그러던 중에 성일이 많이 취했고, 형표와 준수도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술자리가 그렇게
급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일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형표가 문자로 저
에게 오늘 성일이는 니가 책임져라, 하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이번에 은진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은진은 그 비난에 항변했다.
"저는 성일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있는 줄 알았다면 저 역시… 형표도 몰랐고 준수도
몰랐습니다. 그냥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그리고 형표와 준수가 계산하고 형표가 준수를 먼저 데리고
간 다음에, 성일이를 부축해서 가게를 나왔을 때… 술에서 조금 깬 성일이가 저에게 쉬었다 가자고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방청석은 들끓었다. "조용 조용 조용!" 하는 의장의 호통이 있는 후에야 다시 잠잠해졌다. 형진은
성일에게 물었다.
"은진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라도?"
성일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들은 그대로입니다"
그러자 형진은 은진에게 "내려가셔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의장은 잠시 휴정을 선언했다.
"15분간 청문회를 휴정합니다"
의외로, 은진과의 원나잇이 은진의 유혹이라는 측면에 맞춰짐으로서 오히려 오해는 많이 해소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원나잇 바람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여성 방청객들은 여전히 성일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가졌지만 남성 방청객들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 라며 성일의 편을 들어주었다.
"청문회를 다시 속개합니다"
이번에는 성일에게 우호적인 청문감사관 성훈이 질의를 시작했다.
"반대로, 성일씨가 전 여자친구였던 가영씨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부분은 무엇이 있습니까"
성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자로 태어나서 꼭 전 여친을 흉보는 느낌이라서 민망합니다만… 여튼, 뭐, 다 비슷한 거 아니겠습니까.
싸우고나서 단 한번을 먼저 사과하는 일이 없고, 아니 그런 문제를 떠나서, 한 가지, 저도 솔직히 아까 뭐
은진…이외의 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좀 그랬던 일은 몇 번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성일은 자리 앞에 놓인 물을 한잔 마시며 말했다.
"정확한 일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녀가 이직을 하고 나서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 겁니다. 왜
기억을 하냐면 그녀가 이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여튼, 저에게는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해놓고서는, 그리고 그날 밤에 저한테 전화하기로는 지 친구 이야기를 술술술술 해놓고서는, 아 정말로
너무 깜쪽같이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하길래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며칠 후에 진실을 알았습니
다"
"진실이 뭐였습니까"
"그 며칠 후에, 가영이 휴대폰에 스팸이 자꾸 와서, 그 스팸 메세지를 막는 법을 잘 몰랐던 가영이가
저한테 스팸 등록 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주다가…전에는 안 그랬는데 휴대폰
에 비밀번호가 걸린 겁니다. 수상하잖습니까. 여튼 스팸 메세지 차단법을 가르쳐주다가 그녀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문자 메세지함을 슥 보니까, 아 그 날, 지 친구랑 놀았다고 한 날 다른 남자랑 고기
먹고 놀고, 헤어지면서 다음에 또 보자는 메세지까지 나눈 것을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났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분위기로 성일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항의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모르는 척 했죠. 문자의 내용이나 시간대로 보건데, 그리고 고기 먹고 뭐 그런 것을
보건데, 갈 데까지 간 사이는 아닌 거 같고, 그리고 그 다음 날에 가영이가 신입사원들 입사 기념으로
회사에서 뭐 높은 사람이랑 같이 행사하는 날이라고 하길래 또 거기 죽상으로 보내는거 아니다 싶어서
걍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슷한 경험이 두어번 더 있습니다. 제가 잡아낸 것만"
그리고 성일은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곧 말했다.
"제가 뭐, 가영이가 다른 남자랑 밥 한끼 먹는다고 지랄하고 그러는 치졸한 새끼는 아닙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게 기분이 나쁜 겁니다. 저는 그녀가 그냥 친구 남자애랑 밥 먹는다고 그러면 순순히 그러
라고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건 뭡니까. 그 남자는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까, 찔리
는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청문감사관 성훈은 물었다.
"그 이외에, 본인이 이별의 결정적인 사유 중 하나라고 꼽는 신발 사태는 뭡니까"
성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아니 다 그렇겠지만, 연애라는건,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되야한라고 생각합니다.
그 존중이라는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지 마음에 안든다고 짜증 피우고 승질 부리는 뭐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며칠씩 전화도 안 받고 그러는건, 정말로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싸울 수도 있죠, 그리고 미운 마음에 연락하고 싶지도 않을 수도 있죠. 근데 사람이 뭐
5일씩 6일씩 전화도 안 받는건…"
"질문에 답변해주시죠"
의장의 독촉에 성일은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과 함께 본론을 말했다.
"진짜 별 거 아닙니다. 뭐, 그 은진이와의 일이 있은 며칠 이후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이제 아침에
출근 하려고 샤워를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화장실 신발은 다 젖구요"
"네에"
"그리고 이제 씻고 나와서 옷 입고, 양말 신고, 준비 다 하고 출근을 하려는데, 아 갑자기 똥이, 아니
대변이, 아니, 큰 일이 보고 싶은 겁니다"
청문회장에서 '똥'이라는 언급이 민망했던지 두 번이나 표현을 고친 성일의 말에 방청객들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여튼, 볼일을 보려고 하는데 이 화장실 신발이 젖어있으니까 가끔 밖에 뭐 담배 하러 나갈 때 신는
삼선 쓰레빠를 신고 들어와서 볼일을 봤죠. 그리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을 하고 있는데
가영이가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다길래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퇴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딱
왔는데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죠. 어디냐"
목이 말랐는지 또 물 한 모금을 마신 성일은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아니 잔뜩 삐친 목소리로 이제 오빠 못 믿겠다, 이러는 겁니다. 그리더니 엉엉 우는 거에요.
아 제가 얼마나 황당합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왜 그려나, 그랬더니 어휴, 화장실에, 왜
신발이 두 개냐는 겁니다. 하, 기가 차죠. 지 딴에는 아마 무슨 내가 집에 여자를 데려와서 둘이서
씻었나보다, 뭐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아 그래서 아니다, 내가 이러이러했다, 설명을 하니까
못 믿겠댑니다. 아니 그래서 왜 못 믿냐, 그랬더니 또 온갖 옛날 이야기 다 끄집어 내더군요. 그때
생각했죠. 아 이 관계는 아무래도 시마이구나, 끝났네. 그리고 결정타로 그녀가 그랬습니다. 제가
이제 더이상은 자기한테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답니다. 이제는 더이상 머리 복잡해지고 싶지
않다더군요"
성일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요, 저는 분명 그리 착한 놈도 아니고, 제가 뭐 전 여친한테 썩 좋은 남자였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고, 몇 번의 치명적인 실수에 대해서 정말로
많은 반성과 고민도 했습니다. 또, 지난 연인들에 대해 많이 미안하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그 많은 사랑에 대한 약속들을 다 못 지킨 셈이니까요. 다만, 다시 한번만 저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
준다면, 혜정이와의 이 새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면, 저는 정말로 마지막 불꽃을 태워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성일은 그 말을 하면서 혼자 예전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얼굴을 감싸쥐고 눈물을 흘렸다.
청문감사관 성훈은 "이상입니다"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의장은 "그럼, 최종 결심은 3일 뒤, 같은 시각 이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
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의 이슈로 불거진 성일의 전 연애에 대해 다시 물었다.
"김성일씨는 지난 연애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형진의 물음에 성일은 잠시 고민하다가 "타이밍"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어 대답했다.
"만약, 전 여친과 차라리 아예 일찍, 그러니까 뭐 예를 들어 우리 둘 모두가 대학생이라서 미래에 대한
부담없는 그런 연애를 했다거나, 아니면 아예 지금처럼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자리가 잡힌 이후에 만났
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의례 그렇듯이 사회 새내기들의 연애라는 것은 이제
피차 미래에 대한 고민도 커지고 또 미숙한 현재에 대한 불안도 큰 시기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연애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불안 속에서 유지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성일의 답변에 형진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물었다.
"그러한 시기나 관계에 대한 총론 말고, 각론 차원에서의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그러자 형진은 입맛을 다시며 고민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뭐, 연인이 헤어지는 이유는 다 비슷한 것 아니겠습니까. 서로에 대한 설레임이 식고, 변화가 적어진
연애 패턴에 대한 루즈함도 있고, 사실 성격적으로 둘이 좀 맞지 않는 부분도 분명 있었던 것이 사실
입니다. 그녀는 외형적이며 선 굵은 그런 면을 저에게 바랬고, 저는 또 남자치고는 조금 섬세한 편이고
약간 내성적인 면도 있었구요"
형진은 여전히 고개를 젓더니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지난 2008년 11월 16일, 그러니까 전 여자친구분, 아, 신상보호를 위해
본 청문회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가영'이라고 가명으로 부르겠습니다. 가영씨가 몸살로 드러누웠던
시간, 무엇을 하시고 계셨습니까"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성일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물론 가영이가 아프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끙끙 앓고 있는 중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3년만에 모처럼 연락이 닿은 대학동기의 술자리 제안이 있었고, 그래서
그 자리에 나갔던 것입니다"
형진은 자신의 데스크에서 한 보고서를 꺼내 들더니 보여주었다.
"당시의 문자 메세지 기록입니다. 오후 9시 35분, 가영씨는 성일씨에게 '오빠 나 많이 아프다' 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일씨는 가영씨에게 곧바로 '어쩌니;; 병원은 다녀왔어?' 라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인정하십니까"
"네"
성일의 대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재차 물었다.
"왜 바로 전화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성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술자리 모임이라는게, 아시다시피 한창 흥이 오른 타이밍에서는 전화가 사실 쉽지 않은거 아닙니까.
그리고 일단은 문자 답장을 보냈고, 그래서 그 재답장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방청석의 수근거림은 그다지 좋지 않은 분위기였고, 그에 낭패감을 느낀 듯 성일은 부언했다.
"아 물론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재답장이 이후 오지 않았던 만큼 늦어도 한 30분 후쯤엔
전화라도 했어야 하는게 맞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이미 술이 제법 들어간 상태였고, 워낙
술자리의 분위기가 뜨거웠던지라 잠시 잊었, 아니 잊었다기 보다는 끝나고 바로 그녀의 자취방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습니다"
"안 찾아가셨잖습니까"
"필름이 끊겨서 그랬습니다. 정말입니다. 저 역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성일의 다급한 목소리에 비해 차분한 형진은 이어 바로 본 청문회 최대의 쟁점사항을 캐물었다.
"그리고 성일씨는 그날, 대학동기였던, 아 역시 가명으로 은진,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
은진씨와 함께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인근의 모텔방에서 말입니다"
방청석에서는 곧바로 "에라이 쓰레기 새끼"하는 욕설과 웅성거림이 터져나왔다. 성일은 항변했다.
"저는, 맹세컨데, 정말로 기억이 없습니다. 저 역시 아침에 눈을 뜨고 옆에 유, 아니 은진이가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 역시 벌컥 화를 내기까지 했습니다.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느냐고 말입니다"
형진은 성일의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증인신청합니다. 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인 한은진씨의
진술을 듣고 싶습니다" 하고 의장에게 허가를 부탁했다. 의장은 참고인 진술을 승락했다.
"에, 신상보호를 위해 가명과 블라인드 시트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은진씨, 선서해주십시오"
"네, 본인은 본 청문회장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은 맹세합니다"
은진의 선서가 끝나자 형진은 곧바로 물었다.
"한은진씨, 당시 성일씨의 상태는 어땠습니까. 만취 상태였습니까?"
은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취…까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녀의 답변에 성일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어 형진은 물었다.
"먼저 모텔에 가자는 말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노골적인 질문이라 그랬는지 잠시 답변을 주저했던 그녀는 "진실대로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라는
형진의 말에 곧 대답했다.
"성일이었습니다"
"거짓말!"
성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지만 청문회 의장의 준엄한 눈길에 진정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
았다. 은진은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그 술자리에는 저와 성일, 그리고 다른 대학 동기인 형표, 준수가 있었습니다"
연애청문회의 특성상 참고인들의 본명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나 은진은 그것을 잘 몰랐던 터라
실명을 언급했고 감사관 형진은 조금 난처해했지만 의장의 승인 하에 그대로 증언은 계속되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간만에 만난 성일에게 저는 호감을 느꼈고, 술자리에서 제가 먼저 계속 스킨십을
시도했고, 성일이도, 처음에는 조금 미적댔지만 그리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그 증언에 방청석에서는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지만 의장이 곧 제지했고 다시 은진은 말했다.
"그러던 중에 성일이 많이 취했고, 형표와 준수도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술자리가 그렇게
급히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성일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형표가 문자로 저
에게 오늘 성일이는 니가 책임져라, 하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이번에 은진에게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은진은 그 비난에 항변했다.
"저는 성일이에게 여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있는 줄 알았다면 저 역시… 형표도 몰랐고 준수도
몰랐습니다. 그냥 그래서, 그랬던 겁니다. 그리고 형표와 준수가 계산하고 형표가 준수를 먼저 데리고
간 다음에, 성일이를 부축해서 가게를 나왔을 때… 술에서 조금 깬 성일이가 저에게 쉬었다 가자고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방청석은 들끓었다. "조용 조용 조용!" 하는 의장의 호통이 있는 후에야 다시 잠잠해졌다. 형진은
성일에게 물었다.
"은진씨에게 묻고 싶은 말이라도?"
성일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들은 그대로입니다"
그러자 형진은 은진에게 "내려가셔도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의장은 잠시 휴정을 선언했다.
"15분간 청문회를 휴정합니다"
의외로, 은진과의 원나잇이 은진의 유혹이라는 측면에 맞춰짐으로서 오히려 오해는 많이 해소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원나잇 바람 자체에 거부감을 가진 여성 방청객들은 여전히 성일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가졌지만 남성 방청객들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 라며 성일의 편을 들어주었다.
"청문회를 다시 속개합니다"
이번에는 성일에게 우호적인 청문감사관 성훈이 질의를 시작했다.
"반대로, 성일씨가 전 여자친구였던 가영씨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부분은 무엇이 있습니까"
성일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남자로 태어나서 꼭 전 여친을 흉보는 느낌이라서 민망합니다만… 여튼, 뭐, 다 비슷한 거 아니겠습니까.
싸우고나서 단 한번을 먼저 사과하는 일이 없고, 아니 그런 문제를 떠나서, 한 가지, 저도 솔직히 아까 뭐
은진…이외의 일,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좀 그랬던 일은 몇 번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성일은 자리 앞에 놓인 물을 한잔 마시며 말했다.
"정확한 일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녀가 이직을 하고 나서 한 일주일쯤 지나서였을 겁니다. 왜
기억을 하냐면 그녀가 이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요. 여튼, 저에게는 친구 만나러 간다고
해놓고서는, 그리고 그날 밤에 저한테 전화하기로는 지 친구 이야기를 술술술술 해놓고서는, 아 정말로
너무 깜쪽같이 디테일하게 이야기를 하길래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며칠 후에 진실을 알았습니
다"
"진실이 뭐였습니까"
"그 며칠 후에, 가영이 휴대폰에 스팸이 자꾸 와서, 그 스팸 메세지를 막는 법을 잘 몰랐던 가영이가
저한테 스팸 등록 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르쳐주다가…전에는 안 그랬는데 휴대폰
에 비밀번호가 걸린 겁니다. 수상하잖습니까. 여튼 스팸 메세지 차단법을 가르쳐주다가 그녀가 잠시
화장실 간 사이에 문자 메세지함을 슥 보니까, 아 그 날, 지 친구랑 놀았다고 한 날 다른 남자랑 고기
먹고 놀고, 헤어지면서 다음에 또 보자는 메세지까지 나눈 것을 확인했습니다. 솔직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났었습니다"
방청석에서는 이야기가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분위기로 성일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항의를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모르는 척 했죠. 문자의 내용이나 시간대로 보건데, 그리고 고기 먹고 뭐 그런 것을
보건데, 갈 데까지 간 사이는 아닌 거 같고, 그리고 그 다음 날에 가영이가 신입사원들 입사 기념으로
회사에서 뭐 높은 사람이랑 같이 행사하는 날이라고 하길래 또 거기 죽상으로 보내는거 아니다 싶어서
걍 모르는 척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슷한 경험이 두어번 더 있습니다. 제가 잡아낸 것만"
그리고 성일은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지만 곧 말했다.
"제가 뭐, 가영이가 다른 남자랑 밥 한끼 먹는다고 지랄하고 그러는 치졸한 새끼는 아닙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게 기분이 나쁜 겁니다. 저는 그녀가 그냥 친구 남자애랑 밥 먹는다고 그러면 순순히 그러
라고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한 건 뭡니까. 그 남자는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까, 찔리
는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청문감사관 성훈은 물었다.
"그 이외에, 본인이 이별의 결정적인 사유 중 하나라고 꼽는 신발 사태는 뭡니까"
성일은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아니 다 그렇겠지만, 연애라는건, 상대에 대한 존중이 기반이 되야한라고 생각합니다.
그 존중이라는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지 마음에 안든다고 짜증 피우고 승질 부리는 뭐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며칠씩 전화도 안 받고 그러는건, 정말로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싸울 수도 있죠, 그리고 미운 마음에 연락하고 싶지도 않을 수도 있죠. 근데 사람이 뭐
5일씩 6일씩 전화도 안 받는건…"
"질문에 답변해주시죠"
의장의 독촉에 성일은 "알겠습니다" 하는 대답과 함께 본론을 말했다.
"진짜 별 거 아닙니다. 뭐, 그 은진이와의 일이 있은 며칠 이후에 있던 이야기입니다. 이제 아침에
출근 하려고 샤워를 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화장실 신발은 다 젖구요"
"네에"
"그리고 이제 씻고 나와서 옷 입고, 양말 신고, 준비 다 하고 출근을 하려는데, 아 갑자기 똥이, 아니
대변이, 아니, 큰 일이 보고 싶은 겁니다"
청문회장에서 '똥'이라는 언급이 민망했던지 두 번이나 표현을 고친 성일의 말에 방청객들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여튼, 볼일을 보려고 하는데 이 화장실 신발이 젖어있으니까 가끔 밖에 뭐 담배 하러 나갈 때 신는
삼선 쓰레빠를 신고 들어와서 볼일을 봤죠. 그리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을 하고 있는데
가영이가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간다길래 알았다고 했죠. 그리고 퇴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딱
왔는데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죠. 어디냐"
목이 말랐는지 또 물 한 모금을 마신 성일은 말을 이었다.
"그랬더니 아니 잔뜩 삐친 목소리로 이제 오빠 못 믿겠다, 이러는 겁니다. 그리더니 엉엉 우는 거에요.
아 제가 얼마나 황당합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왜 그려나, 그랬더니 어휴, 화장실에, 왜
신발이 두 개냐는 겁니다. 하, 기가 차죠. 지 딴에는 아마 무슨 내가 집에 여자를 데려와서 둘이서
씻었나보다, 뭐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아 그래서 아니다, 내가 이러이러했다, 설명을 하니까
못 믿겠댑니다. 아니 그래서 왜 못 믿냐, 그랬더니 또 온갖 옛날 이야기 다 끄집어 내더군요. 그때
생각했죠. 아 이 관계는 아무래도 시마이구나, 끝났네. 그리고 결정타로 그녀가 그랬습니다. 제가
이제 더이상은 자기한테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답니다. 이제는 더이상 머리 복잡해지고 싶지
않다더군요"
성일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요, 저는 분명 그리 착한 놈도 아니고, 제가 뭐 전 여친한테 썩 좋은 남자였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고, 몇 번의 치명적인 실수에 대해서 정말로
많은 반성과 고민도 했습니다. 또, 지난 연인들에 대해 많이 미안하다고도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그 많은 사랑에 대한 약속들을 다 못 지킨 셈이니까요. 다만, 다시 한번만 저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
준다면, 혜정이와의 이 새 연애를 시작할 수 있다면, 저는 정말로 마지막 불꽃을 태워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성일은 그 말을 하면서 혼자 예전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올랐는지 얼굴을 감싸쥐고 눈물을 흘렸다.
청문감사관 성훈은 "이상입니다" 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의장은 "그럼, 최종 결심은 3일 뒤, 같은 시각 이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
습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