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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생각보다 짧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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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500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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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저 피식 웃더니 냉장고를 열어 물통을 꺼내 그저 물
한잔을 마실 따름이다. 나는 입맛만 다시다가 다시 한번 졸랐다.

"미안한데, 딱 500만 해줘. 이제 다시…"
"지금 나한테 500 달라고 하기 전에, 빌려간 1500부터 갚아"

딱 잘라 말하는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고개를 잠시 주억거리다가 그녀 곁으로 갔다.

"내가 진짜 딱 500만 더 있으면 이게 다 해결되니까, 그때는, 음, 그때는 이제 그때부터 일하면 천천히
뭐, 2천 갚는거 금방이잖아. 내가 진짜 딱 1년 반 안으로 갚아줄께. 이거는 내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어.
자 봐라, 내가 지금 저번달 기준으로 350, 아니, 370 딱 찍고 거기서 내가 준수 그 새끼 돈 180 그 자리
에서 바로 갚았거든? 이게 다다음달까지는 그렇게 들어가고…"
"됐고, 내 돈부터 갚으라고. 나 이제 너한테 돈 한 푼도 못 줘. 너어, 진짜 내가 지금 맨날 장난처럼 하는
소리 같지? 어? 나 내일 고소장 써서 경찰서에 낼거야. 너 차용증도 다 남아있는거 알지?"

길게 한숨을 쉰 나는 고개를 흔들며 혜경의 어깨를 잡았다.

"혜경아, 지금 내가… 그래, 뭐 내가 지난 몇 년, 뭐, 2년간, 쓰레기처럼 막 니 힘들게 한건 아는데, 이제
나도 지금 일하는 여기서 자리 잡았어. 단골이 몇 명인데, 그냥 얘들은 고정으로 나 지명해주는 애들
이야. 이런 식인데, 이제 돈 딱딱 들어오면, 내가 너 그냥 다른 빚은 몰라도 진짜 앞으로 내가 니 돈은
정말이지 너부터 챙겨서…"

하지만 혜경은 듣기 싫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산산조각을 예상했지만 그저
머그잔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손잡이만 부러졌을 뿐이다. 그렇게 깨진 머그겁은 뒹그르르 구르며 저기
소파에 가서야 멈춰섰고 물은 온 거실에 흐르고, 튀었다.

"너 진짜 그냥, 나랑 같이 죽을래? 어? 나아, 지금 솔직히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 너같은 새끼 만나서
인생 망친거 생각하면 죽고 싶은데, 나 지금 그냥 겨우겨우, 악에 받친 마음에 사는거야. 자꾸 그런 나
신경 건들지마. 너, 내가 그렇게 우습니?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어?"

안되려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혜경아, 그래 알았어. 니 맘 잘 알아. 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다 인정하잖아. 근데 지금 내가 뭐 어디
가서 이렇게 말이라도 꺼내보겠니? 지금 나도… 후우, 그래, 니 말이 맞어. 너도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죽고 싶겠지. 나도 그냥 솔직히 지금 옥상에 가서 휙 다이빙해서 그냥 죽고 싶어. 왜? 나는 차라리 그게
편해. 너한테도 미안하고, 뭐 다 그러니까. 근데 그게 답은 아니잖아. 나 죽고 나면 넌? 아니, 나 내일…
솔직하게 말할께. 나 내일 모레까지 500 안 들어가면 나 정말로 그냥, 뭐 이제 나는 그냥 죽는거야.
증말로. 농담 아냐? 자, 휴대폰 문자 보여줄께"

나는 휴대폰을 만져서 문식에게 온 문자를 보여주었다.

"봐. 나 이미 그런 상황이야. 후우, 근데… 나 내일 모레 그렇게 끌려가고 나면, 뭐 걔들은 날 뭐 어디
팔아넘기면, 그렇게 돈 받고 지들은 그걸로 빚 땡치면 되지만, 그럼 니 돈은? 난 진짜… 그래 넌 그냥
나를 아주 찢어죽이고 싶겠지. 니 맘 알아. 왜? 내가 니 옆에서 계속 있던 사람이잖아. 그 누구보다,
솔직히 니 가족보다 니 사정 내가 잘 알잖아? 너, 왜 나한테 처음에 천 해줬니? 사랑해서, 나 믿어서
준거 아냐? 나, 그래, 진짜 뭐 이 시점에 와서 사랑이니 뭐니 개소리 씨부리는거, 나도 민망하고 나도
이런 말 꺼내는 내가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 근데…"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메인다.

"혜경아, 나 한번만 살려주라. 아니, 니가 죽으라면 나 그냥 내일 내가 문식이네 사무실 찾아가서
그냥 배 까고, 나 못 갚겠다, 나 그냥 죽여라, 하고 갈께. 근데 그럼 너도 너 돈…"
"그 돈 안 받아도 되니까, 그럼 그렇게 해. 내일 가서, 그렇게 해"

혜경은 건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애가 아닌데.

"혜경아… 그래, 내가 니 마음 잘 안다니까? 근데 내가"
"됐고, 나 이제 너랑… 아니 이미 우리 끝난 사이잖아. 언제 끝난 사이인데 아직까지 이래? 그냥 다
포기할테니까, 그렇게 해. 나 이제 너 얼굴 보는 것도 싫어"
"혜경아"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은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살인충동을 느
꼈다. 나도 그녀도 많이 흥분했고, 이 숨막히는 공기와 현기증 나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나는 슬슬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리고 어느새 양말이 흐르는 물에 젖는 것을 느꼈지만 난
혀를 차며 오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숨막히는, 둘의 숨막히는 콧소리가 가득한 분위기 속에 말했다.

"그래, 알았다. 혜경아, 나 그냥 니가 죽으라니까, 죽으러갈께. 농담같지? 내가 괜히 하는 소리같지?
근데 나 솔직히 많이 겁나. 후우, 그래 뭐…"

무어라 말을 이으면 좋을까. 입이 바싹 마른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니가 나한테 정말로 딱 이제 500만 더 해주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는 정말로 이제 살 길이 있는건데… 아니 뭐… 하아, 내가 진짜 너 말고는…"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 전 혜경이 담담한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냈다.

"현수야. 잘 들어? 내가 너한테 준 천 오백있지. 너같은 양아치 새끼한테는 그 천오백이 우스워
보일지는 몰라도, 나한테는, 피같은 돈이야. 이 집에 보증금으로 들어간 이천 빼면, 그게 내 전재산
이야. 내 결혼 밑천이고, 내가 정말 피땀 흘려 모은 돈이야. 너는, 너같이 여자들 꼬셔서 막 돈이나
긁어내는 새끼들은 모르겠지만! 그 돈…나는 정말 어렵게 모은 돈이야. 알아?"

혜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아, 너 정말 믿었다? 나, 니가 사업한다고, 정말 확실한거라고, 그거 뭐 중국에서 물건 떼와서
장사한다는 말 들었을 때, 드디어 네가 정신 차리고 이제 그런 일 안할거라는 기대감에, 그래서
내가… 나 그때 정말 너 믿었어"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어, 그래, 너처럼 한달에 몇 백씩 벌고 그런 애한테는 그런 돈이 정말 우스워보일지 모르겠는데
그럼 왜 내 돈을 몇 년이 되도록 못 갚아? 아니 다 됐고, 그래, 만약에 니가 정말로 사업을 했으면,
나 그 돈 정말로 다 잃었어도 뭐라고 안 해. 왜? 내가 정말 너한테 적금까지 깨면서 돈 빌려줄 때,
그런 생각 안 했겠니? 나, 정말로 너 믿었다고. 니가 정말로 사업하다가 잃었으면 나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보증금이라도 빼서 도와줬을거야"
"혜경아"
"내 말 끝까지 들어!"

혜경은 소리를 빽 질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가 모를 줄 알지? 그 년 누구야, 이름이 뭐더라? 그, 니 휴대폰에 남자 이름으로 저장된 애,
이름이 뭐더라? 여튼, 너 무슨 호모야? 남자랑 2박 3일로 주말에 펜션 여행 다녀왔니? 참나. 뭐?
여권을 잃어버려? 기도 안 차. 그리고 너, 니 카드 명세서, 책상 서랍 밑에 숨겨놓은거, 내가 다
못 봤을 줄 알지? 너 명품 수입해다 팔았니? 여자 가방, 구찌 가방도 팔았어? 어?"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나, 니 거짓말 이제 다 안 속아. 안 속는다고. 그리고 내 돈, 안 갚아도 되니까 꺼져. 나 이제 너 다신
안 볼거야. 천 오백? 그냥, 불우이웃 도왔다고 치고, 그냥 잊을래. 이제 너라는 애랑 더 인생 엮이는
그 자체가 싫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 놔줘"

지그시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또 한편으로 그녀의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털썩 주저앉은
그녀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기괴했다. 한 여자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한 남자는 눈 감은
채로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있고.

나는 누구인가. 눈꺼풀 속에서 내 영혼은 빙글빙글 내 머릿 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피곤했다. 다 그냥
집어치우고, 그냥 확 죽으면 어떨까 생각도 들고, 머리가 아주 혼란스럽고, 이게 다 꿈이면 좋겠고,
아니 어쨌든 현실로 내일 모레 이대로 뭐가 타계책을 찾지못하면 나는 정말로 죽는다. 아니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만 문식이 새끼들 성격상 손가락 두어개는 정말로 잘릴 지도 모른다.

"혜경아"

그녀는 대답 없이 그저 끅끅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이쯤해선 도박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 사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 문을 열고 나갔다. 베란다에 서자 싸늘한 찬바람이 내 곁을 감돌
았다. 4층… 떨어져도 죽지는 않겠지. 아니 머리로 떨어지면 죽으려나? 어쨌든 뭐 나는 살던 죽던 상관
없다. 흐음.

뒤를 돌아보고 싶다. 그녀가 내 뒤를 잡아줬으면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난 그 강렬한 충동을 참고
베란다 난간에 발을 올리고 이윽고 몸을…

"뭐하는거야!"

…혜경이 내 등을 잡아끌었다. 사실 그 힘은 약했지만, 나는 못 이기는 체, 슬그머니 다시 다리를 내리
면서 베란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녀도 역시 함께 나와 쓰러졌다.

'됐구나'

나는 기쁨을 느꼈다. 세상에 제일 모질고 더러운게 정이라던가. 나는 바닥에 나뒹굴며 그녀의 품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울었다. 사실은 억지눈물이었지만, 순간 솔직히… 아까 베란다에 발을 올리면서
솔직히 어느 정도는 진짜로 자살충동을 느꼈기에… 잡아준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참
이 못할 짓 한 나같은 새끼한테 아직까지도 연민을 갖고 있는 너무나 바보같은 그녀가 안쓰러워…
눈물이 우러나왔다.

"미안하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혜경은 그대로 엎어진 채 내 품에 안겨, 내 가슴을 적시며 울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그렇게
가슴에 끌어안은 채, 가슴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계산을 시작했다.

'혜경이가 내일 500을 해주면, 일단 문식이한테 300만 갚고 200 중에 150은 판돈으로 쓰고, 50남은
걸로다가 주리랑 밥 먹고 30은 그 머플러 하나 사고…아 씨발 100만 더 있음 딱인데 그거는 뭐 걍
다시 카드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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